2017-08-18

몫 없는 자들을 위한 공유 사회의 꿈 ②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1부 마지막에서 ‘작중인물’ 모어는 히슬로다에우스에게 유토피아 섬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2부는 히슬로다에우스가 유토피아 섬의 지형과 도시 설계, 정치조직, 사회구조, 경제체제, 가족 구성, 종교와 철학 등 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요소들을 설명하는 논설이다. 모어의 유토피아 상상이 ‘근대적’ 기획으로 이해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사회를 디자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사회질서가 신의 뜻에 따라 정해졌다는 중세적 세계관을 따르는 한, 이런 종류의 사회 디자인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가 인간에 의해 형성되고 인간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근대 휴머니즘적 사상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출현할 수 있다.


히슬로다에우스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모습은 1부에서 드러난 당대 현실의 모순과 병폐가 급진적으로 해소된 사회다. 흥미로운 것은 그 해소 방식의 독특함이다. 이는 유토피아 섬의 유래와 지리적 위치 그리고 명명 방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유토피아는 원래 대륙에 붙어 있던 ‘곶’이었는데 이곳에 처음 도착한 유토푸스 왕이 해협을 만들어 본토에서 떼어내 섬으로 변모시켰다. 섬은 육지에서 지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본토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이 고립성이 유토피아 섬을 현존 사회의 모순에서 벗어난 예외적 공간으로 만든다.


유토피아는 똑같이 생긴 54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각 도시는 구block, 거리street, 구역district으로 나뉘어 있다. 사각형의 모양으로 이루어진 ‘구’는 생산 단위로서 그 중앙에 구민들이 공동 관리하는 농원이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구민들은 2년에 한 번씩 농촌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2년이 지나면 도시로 돌아온다. ‘거리’는 소비 단위이자 정치 단위로서 서른 가구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이 서른 가구의 주민들이 ‘필라르쿠스’라 불리는 관리를 선출하고 이렇게 뽑힌 200여 명의 필라르쿠스들이 민회를 구성한다. 24개의 구로 구성된 ‘구역’은 경제 단위로서 중앙에 시장이 있다. 도시는 똑같이 생긴 4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구의 농원에서 재배된 농산물과 화훼는 구역의 시장에 모여 거리에서 소비된다.


유토피아 섬의 공간 구성에서 도시가 수행하는 핵심 기능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히슬로다에우스가 그린 도시의 지도에 ‘왕’과 ‘돈’의 자리는 없다. 국가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정치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원래 유토피아는 유토푸스 왕이 아부락사라 불리는 지역을 정복하여 원주민과 이주민들을 융합하여 건설한 나라다. 하지만 식민주의적 침략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이 정복 국가에서 왕의 공간은 없다. 유토피아에서는 필라르쿠스들이 ‘원수princeps’를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수는 폭군이 되려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는 한, 직책을 종신 유지한다. 공무에 관한 중대 사항은 필라르쿠스들이 모여 만든 민회에서 토의되고 원수와의 협의하에 결정된다. 로마의 원로원 제도와 선출 왕정 제도가 결합된 것 같은 이런 느슨한 형태가 유토피아의 정치체제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부상하고 있던 절대왕정 체제와는 다른 근대 정치제도를 선취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유토피아에서 원수라는 주권 권력은 설정되어 있지만 그가 거주하는 공간은 나타나지 않는다. 유토푸스 왕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절대 권력이지만 이곳에서 왕은 후일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출현을 예견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다.



유토피아에서 공간이 없기는 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히슬로다에우스의 서술에 따르면 시장은 각 구역의 중앙에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24개의 구가 모여 이루어지는 구역의 공간 구성상 그 중앙에 시장이 있을 자리는 없다. 이런 모순은 단순 실수가 아니다. 화폐의 사용을 전제하는 시장이라는 공간과 화폐경제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 이런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이 돈을 없애는 것이다. 화폐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금과 은도 유토피아에선 요강의 재료나 노예의 수갑처럼 저급한 물건에 쓰이면서 조롱의 대상이 된다.


유토피아에서 돈을 없앤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 충족과 분배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유토피아에는 굶주리거나 구걸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노동을 해야 하지만 누구도 궁핍에 내몰리지 않는다.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가 농업 사회라 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기본 경제 운용 방식이다. 일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1일 6시간의 노동에 종사하고 생존을 보장받는다. 시민들은 평등하게 노동을 나누는 대신 인간으로서 기본적 욕구와 쾌락을 보장받고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덕을 쌓는 데 쓴다. 이곳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정신적 쾌락이다. 천박한 오락과 육체적 방종, 사치는 금기시된다. 유토피아인들은 일부일처제로 구성된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에서 살며 간통과 이혼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간통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는 합의 이혼할 수 있으며 재혼도 가능하다. 기독교가 기본 종교로 제시되어 있지만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은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종교적 자유는 보장받는다.


히슬로다에우스가 묘사하는 유토피아 사회의 구체적 모습은 결혼과 이혼, 자녀 양육 등 가족제도를 제외하면 중세 수도원을 연상시킨다.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가 이루어지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와 공정성이 우선시되며, 검약과 도덕적 삶이 장려되는 공동체는 수도원을 닮아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에 따르면 모어의 유토피아 형상은 16세기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네 이념소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스 휴머니즘(폴리스), 프로테스탄티즘(개인의 믿음에 기초한 신자 공동체), 중세 기독교 공동체(수도원), 잉카 담론(국가 공산제)은 모어의 유토피아 형상figure을 구성하는 원재료다.2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경제적 토대로 삼고 있는 중세 수도원은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전해졌던 잉카 제국의 토지 공유 제도ejido와 결합하여 유토피아의 경제적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이 구조는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시민의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당시 부상하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넘어 공산주의를 선취하고 있다. 그리스 휴머니즘에서 발견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와 종교개혁을 사회 변화의 도구로 삼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지식인을 공공 영역의 전위로 여기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가톨릭 휴머니스트였던 모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충돌하는 종교적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교회 권력을 비판하고 초기 기독교 정신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신교도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모어가 상상한 유토피아 형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당시 역사의 전면에서 부상하고 있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공유 경제체제다. 하지만 이 체제를 구성하는 세부 사항들은 작품이 뿌리내리고 있는 당대 역사의 한계에 묶여 있다. 이를테면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서구적이며 기독교 중심적이다. 만인의 평등과 공정한 분배, 공공복리common wealth에 기초한 공화국commonwealth을 지향하면서도 노예의 존재를 인정한다. 유토피아는 평등한 시민들의 도덕 공동체가 되기 위해 도축이나 전쟁 같은 일에는 노예와 용병을 사용함으로써 더럽고 위험한 일은 나라 안팎의 타자들에게 전가한다. 애초 유토푸스 왕의 정복 자체가 식민주의적 침략의 성격이 짙다. 더욱이 이 침략 전쟁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버려진 토지를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언제든 재개된다. 유토피아의 대외 정책에서 제국주의적 정복과 침탈의 징조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이처럼 모어가 상상한 유토피아는 세부 사항에서는 당대의 이념 지평에 갇혀 있지만 사유재산과 돈의 철폐라는 급진적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선다. 그것은 사회의 부분적 개선을 넘어 총체적 혁명을 지향한다. 모어의 상상 속에서 돈의 지배는 가치의 종말이다. 화폐와 사유재산을 없앤 공산 사회의 꿈은 평등과 사회정의의 실현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이상이다. 유토피아 사회를 소개하는 긴 담론을 마무리하면서 히슬로다에우스는 말한다. “유토피아인들은 돈을 없앴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탐욕까지 없앤 것입니다. 그 한 가지만으로 도대체 얼마나 큰 고통이 사라진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죄의 뿌리를 잘라낸 것입니까!”(152~153쪽) 탐욕은 “최악의 질병이자 만악萬惡의 근원인 오만”으로 이어진다. 돈의 지배와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지 않는 한, 탐욕과 오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유토피아에서 경제체제, 사회질서, 도덕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각각의 영역에서 ‘없음’을 실현한다. 이 ‘없음’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을 만들어낸다.



2   Fredric Jameson, Archaeologies of the Future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7), pp. 23~33 참조.




히슬로다에우스가 유토피아에 관한 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작중인물 ‘모어’가 등장한다. 모어는 히슬로다에우스가 소개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고 비판하면서 무엇보다 “전체 체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경제”에 가장 큰 반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2부 마지막에 덧붙인 이 짧은 논평은 1부에서 모어가 한 발언과 함께 이 작품을 반 유토피아 문학으로 되돌려놓는 결정적 대목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렇다면 ‘작중인물’ 모어의 시각은 ‘저자’ 모어의 입장을 대변하는가? 여기서 저자란 역사적 실존 인물인 ‘실제 작가’로 환원되지 않는, 작품 속에 구현된 ‘내포 저자’를 의미한다. 내포 저자란 특정 인물의 목소리 ― 설령 그 인물이 저자의 실명을 공유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 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가진 여러 인물들과 그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아우르면서 작품 전체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저자를 말한다. 『유토피아』에서 추출할 수 있는 내포 저자의 목소리는 작중인물 히슬로다에우스와 모어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가능성과 한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목소리다. 작가는 이 두 목소리를 대화적 관계 속에 놓음으로써 어떤 위태로운 균형과 열린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첨가된 작중인물 모어의 논평은 히슬로다에우스의 이상주의적 상상을 무효화한다기보다는 유토피아에 관한 토론이 종결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히슬로다에우스가 그려낸 유토피아는 당대 영국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정태적 사회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미완의 결말은 작품에 시간적 차원을 불어넣는다. 토론 형식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역동성을 만들어냄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지금 우리가 모어의 『유토피아』를 다시 읽는 것은 역사의 지층에 묻혀 있는 유토피아의 꿈을 다시 불러내 비판적 대화를 재개하는 일이다. 2011년 점령 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유토피아』 다시 읽기 현상은 이 꿈의 소환과 해석 작업이 소멸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점령 운동의 부활을 준비하려면 과거 유토피아 전통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우리 시대의 맥락 속에서 재발명하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히슬로다에우스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끌어내 이를 지속 가능한 대안 사회의 비전으로 새롭게 발명하는 일, 21세기 독자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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