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8

몫 없는 자들을 위한 공유 사회의 꿈 ①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새로운 어휘와 장르의 창시자다. 그는 대안 사회를 그린 자신의 책에 ‘유토피아utopia’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근대 담론 공간에 이 말을 최초로 도입했을 뿐 아니라 ‘유토피아 서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새로운 언어와 장르를 어느 한 개인이 창조한 경우는 드물다. 언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용을 통해 변화하며 장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새로운 말과 장르의 출현을 역사상 실존하는 어느 한 개인에게 소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창시자의 위치에 올라섰고, 그가 쓴 『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는 새로운 장르의 ‘기원 텍스트’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으로서의 위상이 『유토피아』를 읽어야 할 이유의 전부라면 문학사적 의미 이상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이 작품이 살아 있는 고전의 위상을 지니려면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사유를 촉발하는 문제적 텍스트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고전이란 어떤 이념적 왜곡이나 모순도 없는 완벽한 작품을 뜻하지 않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순간의 전망에서 벗어나 초월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무릇 고전이란 당대의 맥락에 묶여 있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시대의 제약으로부터 달아나고 그에 맞서는 대칭적 충동을 통해 현재를 비추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현재를 조망하는 해석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500년 전에 출판된 이 오래된 책이 우리 시대에도 유의미한 참조점이 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긍정적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례 하나를 소개하자면 2011년 세계를 뒤흔든 ‘점령 운동occupy movement’에서 시도된 ‘북 블록book bloc’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점령 운동은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의 사유화 경향에 맞서 ‘몫 없는 자들’이 ‘공유지’를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이제 그 불꽃은 사그라졌지만 선진 자본주의국가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이 격렬한 싸움은 대안 세계를 창조하려는 풀뿌리 운동 단체들과 시민들이 자본에 맞서 일으킨 저항운동이었다.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시위 현장에서 일부 가담자들은 물리적 점령만이 아니라 정신의 점령을 시도했다고 한다.1 2011년 11월 2일 미국 오클랜드 시의 점령 운동은 북 블록을 통해 경찰과 맞섰다. 시위 참가자들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에 제약을』, 수전 콜린스의 『헝거 게임』,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 같은 책의 표지를 붙인 피켓을 들고 경찰과 대치했다. 시위대가 만든 불온서적의 방패는 국가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물리적 보호막이자 사상의 전선이었다. 이후 발생한 사태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경찰은 북 블록의 무장해제를 명령했고, 이에 불복한 시위대가 경찰과 맞서 싸우다 80여 명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오클랜드 시의회는 북 블록을 폭력의 도구로 규정하여 금지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다. 국가가 개인의 사상을 금지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로서 시위대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오클랜드 시위 현장에서 북 블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죽은 글자들이 빽빽이 늘어선 책이라는 물건이 다른 세계를 꿈꾸는 변혁 운동에서 살아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점령 운동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가장 많이 소환된 텍스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해석되는 방식은 아주 달랐다. 점령 운동을 비판하는 논자들의 관심은 유토피아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 중 하나, 즉 ‘좋은 곳eu-topia’이 아니라 ‘없는 곳ou-topia’에 집중되었다. 이들의 해석에 따르면 히슬로다에우스Raphael Hythlodaeus가 묘사한 유토피아 섬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와는 거리가 먼 전체주의 국가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나마 뛰어난 것은 히슬로다에우스를 비판하는 또 다른 목소리, 작중인물 ‘모어’로 대변되는 현실주의적 목소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에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는 반 유토피아주의 작품이고, 바로 이 점이 점령 운동가들이 배워야 할 교훈으로 제시된다.


반면 점령 운동 옹호론자들은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의 근거를 끌어낸다. 이들은 16세기 영국 사회에 대한 히슬로다에우스의 비판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 자신의 비판 사이에서 현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히슬로다에우스의 목소리에서 보다 평등한 대안 사회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복원하는 히슬로다에우스는 유토피아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헨리 8세 치하의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회 비평가’라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해석은 반유토피아주의적 독법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지는 않다. 이들 역시 히슬로다에우스가 제시하는 이상 사회의 형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점령 운동의 슬로건 중 하나였던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점령’을 찾았다’는 ‘사유지’를 ‘공유지’로 바꿔내는 운동에서 다른 사회를 향한 유토피아적 갈망을 드러내지만, 그 갈망은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 21세기 히슬로다에우스는 유토피아 전통에 대해 착잡한 태도를 갖고 있다. 공산주의의 등장과 그 역사적 몰락을 목격한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아무 유보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미래의 청사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질서를 넘어설 다른 사회를 향한 꿈을 포기할 수도 없다. 사회공학에 입각한 미래 설계는 폐기해야 하지만 유토피아의 꿈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점령 운동의 조기 쇠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운동이 추구했던 ‘대표자 없는 운동’, ‘요구 없는 운동’, ‘목표 없는 운동’은 다양한 사회 세력들의 자율과 연대의 장을 구성하는 데는 필요했지만 운동의 지속적 동력을 끌어내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점령 운동에 관여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운동의 목표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온 것도 이런 현실적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다. 점령 운동의 부활을 준비하려면 『유토피아』를 새롭게 읽어야 하고 유토피아 전통과의 대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대두한 것이다.


1    Sarah Hogan, “What More Means Now: Utopia, Occupy, and the Commons,” Upstart, 2013.





토머스 모어는 1515년 헨리 8세로부터 외교 임무를 부여받아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에 파견되었던 짧은 체류 기간 동안 『유토피아』를 썼다. 원래 그의 구상은 자신과 지적 교분이 있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대응하는 ‘지혜에 관한 논설’을 쓰는 것이었지만, 계획을 바꾸어 당시 유행하던 여행기 형식의 픽션을 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상 사회를 그린 2부이고, 여기에 1부를 추가하여 현재 모양으로 출판한 것이 『유토피아』다. 1부는 플라톤식 대화에 풍자 요소가 가미된 극적 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고, 2부는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이 그곳을 소개하는 여행기 형식이다. 1부는 토머스 모어, 페터 힐레스Peter Gilles,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화를 주도하는 이는 히슬로다에우스다. 그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아메리카 항해에 동행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방랑 철학자로서 구대륙 문화와는 다른 시선을 지닌 허구적 인물이다. 그가 지식인의 정치 참여, 영국의 범죄와 사형 제도, 군주의 호전성과 탐욕 등 당대 영국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에 대해 실존 인물인 모어와 힐레스가 유보적 태도를 보이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2부는 대화 대신 화자 히슬로다에우스가 가상의 섬나라 유토피아에 대해 설명하는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히슬로다에우스의 긴 이야기가 끝난 후 ‘작중인물’ 모어의 짧은 논평이 이어진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형식적으로는 철학적 대화와 여행기의 조합으로, 내용상으로는 당대 현실에 대한 풍자적 비판과 대안 사회에 대한 급진적 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와 ‘독백’, ‘역사성’과 ‘허구성’, ‘현실주의적 비판’과 ‘급진주의적 상상’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유토피아』의 형식적, 내용적 특징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중성이 엇갈린 해석을 낳는 요인이 된다. 점령 운동의 찬반론자들이 이 작품에 내놓은 상반된 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문학의 기원이면서 동시에 반 유토피아문학의 씨앗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대안 사회에 대한 이상주의적 열정을 표현하면서 그에 대해 아이로니컬하게도 거리를 유지하는 텍스트로 읽힌다. 『유토피아』는 작중인물의 층위에서는 이상주의적인 히슬로다에우스와 현실주의적 모어가, 서사의 수위에서는 급진적 상상과 현실 풍자가, 이념의 측면에서는 화폐와 사유재산이 철폐된 공산 사회의 옹호와 그 전체주의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동거한다. 이런 불안한 동거가 『유토피아』를 이중적, 분열적 텍스트로 만들어주는 요인이자 이후 비평적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렇다면 모어는 왜 두 이질적 서사를 병치시킨 것일까? 그 효과는 무엇일까? 『유토피아』의 2부에 활용된 여행기는 낯선 세계를 방문한 자의 눈으로 익숙한 질서와 그 가치 체계를 흔드는 데 적합하다. 낯설게 하기가 의도하는 것은 낯익은 현실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적 폐쇄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 교란이 현실 비판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세계를 향한 상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유토피아 장르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세계를 향한 유토피아적 상상이 여행자의 입을 빌려 서술되고 있는 『유토피아』의 2부가 텍스트의 중심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2부는 1부를 교란시킨다. 허구적 상상이 현실을 뒤흔들어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급진적 상상을 담고 있는 2부는 현존 질서의 부분적 개선이 아닌 총체적 재구성을 시도하는 형식으로 그 자체가 진지한 사회정치적 기획을 담고 있다. 『유토피아』의 1부는 히슬로다에우스가 당시 영국 사회의 모순을 극복한 가상의 세 나라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가 묘사하는 아코리아, 마카리아, 폴릴레리트는 각기 군주의 군사적 정복욕을 제한하고, 재정적 탐욕을 통제하며, 도둑을 사형시키지 않고 자비롭게 대하는 나라들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 개혁이 사회문제를 푸는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군주의 정복욕이나 재정적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 신하들이 군주를 설득하거나 과도한 조세 징수를 막는 법을 통과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군주의 탐욕을 억제하려면 왕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왕정 질서를 넘어서는 정치체제를 요구한다. 또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절도범에게 사형 대신 공공 근로나 노동 봉사를 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도둑질로 내모는 요인이 남아 있는 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카를 카우츠키를 위시한 유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산주의의 원조로 읽어낸 히슬로다에우스의 발언에 따르면, 절도와 사형 제도라는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해서도 사회의 총체적 변화가 요구된다. 영국에 왜 도둑질이 창궐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히슬로다에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들 나라의 양입니다. 양들은 언제나 온순하고 아주 적게 먹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들이 너무나도 욕심이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들까지 잡아먹는다고 들었습니다. 양들은 논과 집, 마을까지 황폐화시킵니다. 아주 부드럽고 비싼 양모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대귀족과 하급 귀족 심지어는 성무를 맡아야 하는 성직자들까지 옛날에 조상들이 받던 지대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 아무런 좋은 일도 하지 않고 나태와 사치 속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이제는 더 적극적인 악행을 저지릅니다. 모든 땅을 자유롭게 경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목축을 위해 울타리를 쳐서 막습니다. 이들은 집과 마을을 파괴해버리고 다만 양 우리로 쓰기 위해 교회만 남겨놓습니다. 이미 많은 땅을 방목지와 사냥용 짐승 보호지로 만들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이 높은 분들은 주거지와 경작지마저 황폐하게 만드는 중입니다.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한 사람이 수천 에이커를 울타리로 둘러막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이 나라에 역병 같은 존재입니다. 소작농들은 쫓겨나든지 속임수, 강짜 내지는 끊임없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기 땅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그 얼마 안 되는 돈마저 다 날리면 결국 도둑질 끝에 당신 말대로 교수대에 매달리든지 아니면 유랑하며 구걸할 수밖에 없습니다. (27~28쪽)


‘인클로저enclosure’라 불리는 자본주의적 경제 운용 방식이, 농민들을 농토에서 쫓아내고 가난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유랑 생활 끝에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범죄를 없앨 수는 없다. 절도범을 사형시켜 사회정의를 세우겠다는 것은 “피상적으로는 정의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의롭지도 않고 효과도 없”다(30쪽). 1부의 후반부에서 히슬로다에우스가 밝히고 있듯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이다(55쪽). 사회정의와 국민의 행복을 가져올 근원적 해결책은 사유재산의 철폐다. 사유재산을 폐지한 이상 사회의 모습은 2부의 내용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유토피아 섬의 가장 큰 특징은 화폐와 사유재산이 없는 것이다. 이는 현존 질서 안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다. 『유토피아』의 1부는 2부의 급진적 상상이 함축하고 있는 전복성에 현실적 맥락을 부여한다. 당대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이자 쟁점인 사형 제도와 경제적 착취, 절대군주의 비대한 권력에 대해 복수의 의견들이 경합을 벌이는 1부가 추가됨으로써 2부는 ‘허황된 몽상’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진지한 대응을 담고 있는 ‘사회적 상상’이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