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7

유혹의 정석

수사학은 말로 하는 설득의 기술이다. 무력이 아닌 말로 자신의 이익을 상대에게 관철시켜 상대의 말과 행동을 나의 의지에 복속시키는 솜씨인 것이다. 따라서 수사학의 발전이 문명 자체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법이나 도덕과 같은 원칙들이 상대의 뒤통수를 때려 닭다리를 뺏어 먹는 것을 금지하면서 주먹을 쓰지 않고도 원하는 고깃점을 내 입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절실해진 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주먹보다 법을 더 의식해야 하는 문명사회에서 수사학은 주로 웅변이나 논쟁과 같은 공적 영역의 핵심 기술로 여겨진다. 수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체계화된 학문의 하나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득 기술을 고상한 학문으로 떠받드는 것은 일상을 전문화하는 근대적 기획에 말려드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설득은 특별할 것이 아무데도 없는 평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조삼모사, 고육지책, 또는 삼십육계 같은 말은 수사학의 기술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누구나가 다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법들이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수사학을 확인하기 위해 대학원이나 국회의사당까지 가야 할 필요는 없다. 수사학은 마지막 피자 조각이 놓인 식탁에서 절실해지며. 애매한 양의 생선이 남은 어물전 가판대 위에서 치열해진다. 수사학은 그야말로 저잣거리의 공식 언어다.


저잣거리가 멀지 않으면 고깃간이 있기 마련이다. 설득의 기술이 가장 화려하게 펼쳐지는 곳으로 네온 불 오색으로 반짝이는 모텔 앞을 제할 수 있을까. 짐승의 살보다는 인간의 살이 더 비싸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간 육체와 관련된 거래는 고깃간 저울대 앞에서보다 훨씬 더 치열하다. 때문에 동원되는 설득 기술의 종류도 그 만큼 다양하고 또 그 수준은 한없이 높다. 물론 남성이라면 강아지 눈빛에 “내 아를 나도” 라든지 “쉬었다 갈까?” 정도만 보태도 충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연애상대의 옷고름을 풀기까지에는 상당한 정도의 설득이 필요하다. 몸과 몸을 맞댄다는 것이 서로의 세균을 교환해야 하는 위험을 극복하는 것 이상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텔이 보이는 거리를 서성이는 연인들이 모두 소피스트인 데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인들』, 퐁텐블로파(Ecole de Fontainebleau), 1550년 경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일에서도 비범하게 잘 해내는 사람이 있다. 연애상대를 유혹하는 일에서라면 「새침한 연인에게 그가」에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일 것 같다. 이 친구의 수법은 실로 정교하다. 효과적인 설득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엮어낸다. 먼저, 상대의 가치를 한 없이 높여주어 체면을 세워준다. 설득은 변화를 유도하는 일종의 공격이므로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방심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다음 현재의 상황이 어째서 미흡한지를 설명한다. 변화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내어놓으라고 압박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원하는 것은 여자의 살이다. 연인의 살에 대한 접근권을 허용하라는 설득은 그 성격상 지극히 사적인 요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 지극히 사적인 요구를 가장 공적인 수사적 형식에 담아낸다. 지금껏 서구에서 개발된 논법으로는 가장 효과적이라는 삼단논법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가장 말랑말랑하며 낯간지러운 내용을 가장 딱딱하며 엄정한 껍질에 담아놓아 유혹의 삼단논법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To His Coy Mistress     새침한 연인에게 그가


Had we but world enough, and time,   우리에게 세상이,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기만 하다면,

This coyness, lady, were no crime.   이렇게 새침하신 건, 아가씨, 죄가 아니겠지요.

We would sit down and think which way     그럼 우린 마냥 앉아 어느 길로 산책할까 궁리하며

To walk, and pass our long love's day;   기나긴 사랑의 날을 보낼 수도 있을 겁니다.

Thou by the Indian Ganges' side   그대가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Shouldst rubies find; I by the tide   루비를 찾고 있는 동안, 전 영국의 험버 강

Of Humber would complain. I would   물결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Love you ten years before the Flood;   저는 노아의 대홍수보다 십 년이나 먼저 그대를 사랑하고

And you should, if you please, refuse   그대는, 원하신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Till the conversion of the Jews.         유대인들이 개종할 그날까지 말입니다.

My vegetable love should grow 저의 식물 같은 사랑은 계속 자라겠지요,

Vaster than empires, and more slow.   제국보다 광대하게, 또 더 천천히.

An hundred years should go to praise 그대의 눈을 찬미하고, 그대의 이마를 바라보는데

Thine eyes, and on thy forehead gaze;       한 백 년을 다 바쳐도 될 겁니다.

Two hundred to adore each breast,   젖가슴 흠모하는 데는 각각 이백 년을,     

But thirty thousand to the rest;   그리고 그 밖의 부분에는 삼만 년을 바쳐도 되겠지요.

An age at least to every part,   그 하나하나 칭송하다 한 시대를 보내고

And the last age should show your heart. 마지막 시대에서나 그대의 진심이 드러나도 괜찮을 겁니다. 

For, lady, you deserve this state,   왜냐하면, 그대여, 그대는 이런 찬사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기에,

Nor would I love at lower rate.   그리고 저 역시 그 이하로는 그댈 사랑하지 않을 거니까요.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그렇지만, 등 너머로 전 언제나 듣고 있습니다,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시간의 날개 돋친 전차가 서둘러 다가오는 소리를.   

And yonder all before us lie   그리고 저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Deserts of vast eternity.           광대한 영겁의 사막뿐입니다.

Thy beauty shall no more be found,         그대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Nor, in thy marble vault, shall sound       그대의 대리석 무덤 안에서는 말입니다.

My echoing song; then worms shall try       제 노래도 메아리로 울리지 않겠지요. 그 땐 구더기만이

That long preserv'd virginity,   그대의 오래 간직한 처녀성을 파먹겠지요.

And your quaint honour turn to dust,   그대의 예스러운 명예는 먼지가 되고

And into ashes all my lust.   저의 욕정은 모두 재로 변할 겁니다.

The grave's a fine and private place,   대리석 무덤은 아주 훌륭하고 은밀한 공간이지요.

But none I think do there embrace.   하지만, 거긴 서로 얼싸안는 이들이 없을 것 같네요.


     Now therefore, while the youthful hue   자, 그러니, 청춘의 기운이

Sits on thy skin like morning dew,   아침 이슬처럼 그대의 살갗에 어려 있을 때,

And while thy willing soul transpires   그리고 그대의 활발한 영혼이 

At every pore with instant fires,   찰나의 불길로 모든 땀구멍에서 뿜어 나올 때,

Now let us sport us while we may;         바로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즐깁시다.

And now, like am'rous birds of prey,   그래서, 사랑에 빠진 맹금류처럼,

Rather at once our time devour,   당장에 우리가 시간을 집어삼켜버립시다. 

Than languish in his slow-chapp'd power.   서서히 씹어 삼키는 시간의 아가리 속에서 시들어 가느니.

Let us roll all our strength, and all   굴려 모읍시다, 우리의 모든 힘, 그리고 모든 부드러움.

Our sweetness, up into one ball;   한 덩어리로 굴려 모읍시다.

And tear our pleasures with rough strife     그래서, 거친 투쟁으로 우리 몫의 쾌락을

Thorough the iron gates of life.   삶의 철대문 밖으로 뜯어냅시다.

Thus, though we cannot make our sun 그리하면, 우린 비록 우리의 태양을 멈춰 세울 순 없어도

Stand still, yet we will make him run.   적어도 달려가게 할 순 있을 겁니다.


약강4보격을 맞추기 위해 접속사 If를 생략한 가정법 구문으로 시작되는 제1연의 요지는 ‘우리가 영원한 존재라면 지금 같이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삼단논법의 대전제에 해당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세상과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넉넉한” 세상과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영원한 존재인 신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화자는 연인이 상대가 옷고름을 풀어주기를 ‘영원히’ 기다릴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영원히 기다리는 동안 영원히 상대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갖은 정성을 들여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여자가 내내 감추고 있던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도 상관없다. 실제로 여자는 그렇게 공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Had we but world enough, and time,      우리에게 세상이,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기만 하다면,

This coyness, lady, were no crime.     이렇게 새침하신 건, 아가씨, 죄가 아니겠지요.

We would sit down and think which way     그럼 우린 마냥 앉아 어느 길로 산책할까 궁리하며

To walk, and pass our long love's day;     기나긴 사랑의 날을 보낼 수도 있을 겁니다.

Thou by the Indian Ganges' side     그대가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Shouldst rubies find; I by the tide     루비를 찾고 있는 동안, 전 영국의 험버 강

Of Humber would complain. I would     물결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Love you ten years before the Flood;     저는 노아의 대홍수보다 십 년이나 먼저 그대를 사랑하고

And you should, if you please, refuse    그대는, 원하신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Till the conversion of the Jews.         유대인들이 개종할 그날까지 말입니다.

My vegetable love should grow 저의 식물 같은 사랑은 계속 자라겠지요,

Vaster than empires, and more slow.     제국보다 광대하게, 또 더 천천히.

An hundred years should go to praise 그대의 눈을 찬미하고, 그대의 이마를 바라보는데 

Thine eyes, and on thy forehead gaze;       한 백 년을 다 바쳐도 될 겁니다.

Two hundred to adore each breast,     젖가슴 흠모하는 데는 각각 이백 년을,     

But thirty thousand to the rest;     그리고 그 밖의 부분에는 삼만 년을 바쳐도 되겠지요.

An age at least to every part,     그 하나하나 칭송하다 한 시대를 보내고

And the last age should show your heart. 마지막 시대에서나 그대의 진심이 드러나도 괜찮을 겁니다. 

For, lady, you deserve this state,     왜냐하면, 그대여, 그대는 이런 찬사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기에,

Nor would I love at lower rate.     그리고 저 역시 그 이하로는 그댈 사랑하지 않을 거니까요.  


문제는 인간에게 허용된 공간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 여인은 일종의 인류에 대한 혹은 사랑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이 범죄의 실제 내용은 여인의 “새치름한 태도”(“coyness”)다. coyness는 단순히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시가 발표된 17세기 중반 영국의 풍속에서 이 말은 여성이 성적인 유혹을 하면서도 남성의 유혹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짐짓 무관심한 척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상대인 여성에게 이른바 유혹하라고 신호는 보내면서 막상 이렇게 유혹하고 있는데 딴청을 부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여성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범죄’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과장법이기 때문에 이 항의가 엄중하거나 진지한 것은 아니다. 아마 하찮은 흠이나 결함을 ‘인류의 범죄’라고 주장하는 이 남성의 짐짓 엄중한 듯한 문책은 상대 여성에게는 ‘귀여운 앙탈’로 여겨질 것이다. 더구나 이 여성은, 제목에 의하면, 화자인 남성의 “mistress”다. 당시 mistress는 ‘혼외관계에 있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 귀한 신분을 가진 젊은 여성’을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 제2연에 ‘처녀성’에 관한 언급이 있고 또 제1연의 마지막 구절에 ‘지극한 찬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단순한 정부가 아니라 젊고 지체 있는 집안의 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실제로 계급관계가 어떠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이 시에서는, 이 남자는 상대인 여성을 자기보다 더 큰 사회적 권위를 가진 우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범죄운운하면서 꾸짖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전적으로 강자의 의지에 달린 부탁을 하고 있는 약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여인을 무조건적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귀여운 앙탈’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이 남자가 의도한 바이겠지만, 제1연의 논의구조로 보면 어쨌거나 남자는 여인을 나무라고 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실제로는 당신도 원하고 있으면서 뭘 그리 튕기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라면 세상이 끝나는 순간에 본심을 드러내도 상관없을 것이란 말(“the last age should show your heart”)은 지금 그런 본심을 갖고 있는데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에둘러 지적하는 말이다. 여인의 태도를 ‘coy’하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도 일종의 ‘지적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왜 여자를 추켜세우면서 한편으로 비난하는 것일까? 당연히, 여인이 ‘새침떼기’(coy) 전략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면서 변화를 촉구해야 하는 것이 설득의 기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남자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아주 일반적인 경우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녀관계에서 적어도 육체에 대한 접근권과 관련해서는 여자가 인색하고 남자가 적극적인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남자가 여인의 ‘coyness 전략’을 ‘범죄’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은 아주 특이한 데가 있다. 이 수사적 특이함은 여인이 ‘coyness 전략’을 쓰고 있는 이유를 파악하는 남자의 판단근거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목가적 풍경』, 프레더릭 레이튼(Frederic Lord Leighton), 1880-1881


범죄는 ‘정상적이지 않은 사건’이다. 남자는 여자의 ‘coyness’를 정상적이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여자는 이를 ‘정상적’이라 파악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정상성’을 차지한 편은 언제나 당당하므로 ‘정상’을 상대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남자는 ‘영원이 우리 편이라면 네가 원하는 것 다해줘도 괜찮다’고 하고 있다. 이 ‘원하는 것’이 여자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남자에게는 불만인 것이다. 여자는 지금 뭘 요구하고 있을까. 제1연의 첫 두 줄을 뺀 나머지 전부가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의 구체적인 목록이다. 첫째, 신체접촉 없이 진종일 산책만 하기. 둘째, 여자는 멀고 먼 신비의 땅 인도에서 고상하게 보석 수집하는 동안 남자는 촌스런 고향땅(험버강은 마블의 고향을 지나는 강이다)에서 흘러가는 강물이나 하릴없이 바라보며 여자 그리워하기. 셋째, 역사 시작지점(노아의 대홍수)보다 이전부터 역사가 끝날 때(유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날)까지, 즉 영원히, 변치 않고 사랑하기. 넷째, 오로지 성장만을 위한 성장을 하는 생명력의 근원 같은 식물처럼 오로지 여자만을 바라보며 한눈팔지 않는 사랑 실천하기. 다섯째, 여자의 몸 구석구석 하나하나 지극정성으로 칭찬하기. 마지막으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여자는 몸 허락하지 않기. 지금 세상에서라면 터무니없는 요구 같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의 연애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연인 사이의 거리를 가능한 한 넓히면서 둘 사이의 멀어지는 거리만큼 사랑하는 감정이 짙어지는 이런 식의 사랑은 원래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주로 기사들이 남의 집 귀부인을 상대로 벌였던 ‘궁정연애’에서 시작됐다. 여성 상대를 이상화하는 이 기사도 사랑방식은 중세가 끝나면서 궁정정치가 왕성했던 르네상스기에 귀족일반에게까지 퍼지게 됐고, 영국에 이런 궁정연애풍의 사랑방식이 들어온 것은 유럽 남부로부터 북상해온 르네상스의 기운이 도버해협을 건너온 15~16세기였다. 앤드류 마블(1621~1678)이 살았던 17세기는 이런 궁정연애풍의 사랑방식이, 적어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대중화된 시절의 끝 무렵이라 볼 수 있다. 여인은 지금 이 유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고, 남자는 그 유행이 이미 지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제1연에서 암시되고 있는 두 남녀 사이의 갈등은 육체성과 관련된 남녀 간의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면서 당대 영국 사회의 문화적 관습들 간의 신구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궁정연애풍의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중에서 상대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시로 지어 바치는 것도 포함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랑방식의 가장 이상적인 경우이므로 사랑을 표현하는 주된 수단이 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궁정연애풍 관습과 남자의 새로운 방식 사이의 갈등은 사랑시를 쓰는 문학적 관습 사이의 갈등이 된다. 르네상스기 궁정연애풍의 대표적인 시형식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페트라르카 식의 소네트Petrarcan Sonnet였다. 각 행의 끝음, 즉 각운이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되면서 8행의 옥타브octave와 6행의 세스텟sestet으로 구성되는 이 형식은 16세기 초 토머스 와이엇Sir Thomas Wyatt(1503~1542)을 통해 영국으로 들어왔고 영어의 리듬감을 살려 이를 변형한 세익스피어풍 소넷Shakespearian sonnet으로 발전했다. ‘그대는 온화한 여름날보다도 더 아름다우며, 그대의 아름다움은 저의 시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유명한 세익스피어 18번 소네트 「나 그대 여름날에 비할까」(“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같은 류의 시가 바로 지금의 시 「새침한 연인에게 그가」 같은 형식의 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영국의 주된 연애시 형식이었다. 마블의 시는 이전까지의 궁정연애풍, 혹은 페트라르카풍의 연애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첫째,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연애와 관련된 사적이고 부드러운 주제를 법률가나 웅변가, 혹은 논리학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딱딱한 논쟁조의 구조에 담아낸다는 점이다. 둘째,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물을 비유법으로 등치시키는  ‘기상奇想, conceit'이 자주 사용된다는 점이다. ‘기상’은 일종의 ‘생경한’ 비유법이라 할 수 있다.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온화한 여름날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평범한 종류의 비유법이다. 이에 비해 제1연에서 남자는 자신의 사랑 방식을 식물의 성장 방식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은 종류의 비유법이다. 이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비유쌍에서 한쪽이 독자에게는 아주 익숙한 범주인 사랑이고 다른 쪽은 비교적 익숙치 않은 범주인 자연과학과 관련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논쟁조의 구도와 최신 과학적 사실을 활용한 비유법을 써서 제시하는 시형식을 영국시사에서는 ‘형이상학파 시Metaphysical poetry'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1연에서 여자의 coyness 전략이 17세기 초엽 영국 문단에서 지배적인 형식이었던 궁정연애풍 연애시를 대표한다면, 이를 비판하고 있는 남자는 작가인 앤드류 마블이 대표하는 새로운 형식의 연애시인 형이상학파 시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육체성을 둘러싼 남녀 사이의 이견이 당대의 지배적인 시양식과 새로운 양식 사이의 대결, 즉 수사와 수사의 대결인 수사전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제2연은 삼단논법에서 소전제에 해당한다. ‘우리가 영원할 것이라면 날 거부해도 좋다’에 이어 여기서는 ‘그런데 우리는 영원하지 않으므로 거부하는 것이 옳지 않다’라는 명제를 입증하고 있다. 영원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우리는 곧 죽어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 주검이 되어 누운 그대에게 무슨 아름다움이 남아 있겠는가. 당연히 내가 이렇게 입이 마르게 그대를 칭송하며 애걸하는 것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이 간직한 처녀성과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영예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집이 부자니 무덤 정도는 대리석으로 만들겠지. 고급 무덤이지만 그것 또한 무슨 소용 있겠는가. 죽은 시체들이 사랑놀음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그렇지만, 등 너머로 전 언제나 듣고 있습니다,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시간의 날개 돋친 전차가 서둘러 다가오는 소리를.   

And yonder all before us lie     그리고 저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Deserts of vast eternity.             광대한 영겁의 사막뿐입니다.

Thy beauty shall no more be found,         그대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Nor, in thy marble vault, shall sound        그대의 대리석 무덤 안에서는 말입니다.

My echoing song; then worms shall try       제 노래도 메아리로 울리지 않겠지요. 그 땐 구더기만이

That long preserv'd virginity,     그대의 오래 간직한 처녀성을 파먹겠지요.

And your quaint honour turn to dust,     그대의 예스러운 명예는 먼지가 되고

And into ashes all my lust.     저의 욕정은 모두 재로 변할 겁니다.

The grave's a fine and private place,     대리석 무덤은 아주 훌륭하고 은밀한 공간이지요.

But none I think do there embrace.     하지만, 거긴 서로 얼싸안는 이들이 없을 것 같네요.


서양에서 시간의 흐름은 여러 가지 장치로 표현된다. 모래시계 같은 경우는 시간이 표시 없이 흘러 어느덧 다 지나가버리는 의외성과 놀라움 같은 정서를 환기시킬 때 사용되는 장치다. 그렇지만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여기에서처럼 인간과 시간 사이의 경주로 표현되는 비유법이다. 인간의 일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여행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왼쪽 혹은 서쪽이 기원을 나타내므로 인간이나 시간은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시간은 인간처럼 땅 위를 걷지 않는다. 세계의 기원인 크로누스Chronus가 시간이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은 신적인 존재이다. 시간은 빠르다. 아주 빠르기 때문에 날개달린 전투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나른다. 두 다리로 걷는 인간과 하늘을 나는 전차가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면 누가 이길까. 결과는 언제나 빤하다. 나는 마차가 걷는 인간을 뒤에서부터 따라잡으면 그 인간은 지상에서의 여행기간을 다한 것이 된다. 남자는 이 시간의 마차가 등 뒤에서 자신을 따라잡으려고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것도 언제나. 여인이 영원놀이를 하자고 뻗대고 있는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젊은 청춘에게는 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적어도 40을 넘기지 않았을까. 시간이 인간을 따라잡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다. 그 이후는 죽음의 세계다. 사막과 같은 불모의 공간이 끝없이 펼쳐지는 세계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이 세계에 형상을 가지고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먼지로 변한다. 육체에 깃들었던 정신 같은 게 남아 못 다 이룬 사랑을 계속하는 등의 생각은 이 남자에게는 망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세계는 무의 세계, 사막에 사는 도마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막과 같은 세계다. 남자는 사후의 삶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원래, 16세기 경 북유럽에서는 죽음을 상기시키는 이미지들이 삽입된 그림을 그리는 화풍이 있었다. 아름다운 육체나 경사스러운 일을 기념하는 그림들에 이런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육체나 좋은 일에만 혹하지 말고 신의 계시나 율법을 기억해서 겸손의 미덕을 잃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관습은 기독교가 주된 종교였던 중세시대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전통을 이어받는 것으로, 근대 초기 부르조아지의 물질적 풍요를 경계하는 문화적 코드였다.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경구 그대로, 혹은 해골이라든지 저승사자 같은 상징으로 표시되는 이 메멘토 모리는 이 시에서는 조금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겸손이나 절약이 아니라 낭비 혹은 쾌락을 추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금 제2연에서 여자의 육체를 파먹는 구더기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은 죽는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에 대한 환유로 여자의 처녀성과 여자의 성기("quaint"는 ‘아취가 있는,’ ‘고풍스러운’이란 의미로도 쓰였지만 당시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은어로도 사용됐다)가 등장하고 있으므로 ‘죽으면 나의 성기 대신 구더기가 그대의 성기에 삽입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암시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구더기에 처녀성을 잃느니 내게 잃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기서 메멘토 모리라는 문화코드는 죽으면 썩어질 몸이므로 아름다움을 과신하지 말고 처신을 신중히 하라는 것보다는 아름다움이 곧 사라질 것이니 쓸 수 있을 때 맘껏 쓰자라는 까르페 디엠Carpe diem의 일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까르페 디엠 역시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문화코드다. 그렇지만 메멘토 모리와는 달리 까르페 디엠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는 충고로 쓰인다. 그러므로 여인의 대리석 무덤은 여기서 생자필멸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정반대의 문화코드가 하나로 통합되는 공간인 셈이다.



제3연에서는 삼단논법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즐길 수 있을 때 화끈하게 즐기자’는 까르페 디엠의 메시지가 분명히 제시된다. 앤드류 마블 특유의 ‘기상’들이 여럿 등장하는 이 마지막 연은 그 때문에 깔끔하게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이다. 젊고 예쁠 때 한 몸이 되어 즐기자는 것이 기본 주제인 것은 분명하나 자연과학적인 사실을 활용하는 은유도 있고, 아주 찬찬히 분석해봐야 어떻게 즐기자는 것인지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드러나는 진술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Now therefore, while the youthful hue   자, 그러니, 청춘의 기운이

Sits on thy skin like morning dew,     아침 이슬처럼 그대의 살갗에 어려 있을 때,

And while thy willing soul transpires     그리고 그대의 활발한 영혼이 

At every pore with instant fires,     찰나의 불길로 모든 땀구멍에서 뿜어 나올 때,

Now let us sport us while we may;          바로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즐깁시다.

And now, like am'rous birds of prey,     그래서, 사랑에 빠진 맹금류처럼,

Rather at once our time devour,     당장에 우리가 시간을 집어삼켜버립시다. 

Than languish in his slow-chapp'd power.    서서히 씹어 삼키는 시간의 아가리 속에서 시들어 가느니.

Let us roll all our strength, and all     굴려 모읍시다, 우리의 모든 힘, 그리고 모든 부드러움.

Our sweetness, up into one ball;     한 덩어리로 굴려 모읍시다.

And tear our pleasures with rough strife      그래서, 거친 투쟁으로 우리 몫의 쾌락을

Thorough the iron gates of life.     삶의 철대문 밖으로 뜯어냅시다.

Thus, though we cannot make our sun 그리하면, 우린 비록 우리의 태양을 멈춰 세울 순 없어도

Stand still, yet we will make him run.      적어도 달려가게 할 순 있을 겁니다.


아침이슬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것이지만 세상 어떤 것보다 신선하고 순결한 느낌을 주는 비유어로 여자의 피부가 아직 청춘의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영혼이 땀구멍으로 증발해 나오는 다음 이미지가 형이상학파 시의 특징적인 은유인 ‘기상’이라 볼 수 있다. 17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 속에 있으며 이 영혼이 다른 사람의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첫째는 눈을 통해 드러난다. 눈은 ‘마음의 창’이란 아주 낡은 은유가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눈은 투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눈을 통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보았다. 아마 눈빛으로 그 사람의 본심을 짐작할 수 있다는 통념에서 유래한 생각일 것이다. 두 번째로 영혼이 드러나는 경우는 유체이탈의 경우였다. 죽거나 혼절할 때 사람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면 이때 어떤 경우 그 영혼은 다른 사람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될 수도 있었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악마의 혼이라든지 천사의 영성이 아닌 인간의 혼이 가시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자의 영혼이 얼마나 젊고 활기찬 것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여자의 몸에 갇힌 영혼이 인간 육체의 해부학적 구조인 땀구멍을 통해 액체가 기화하듯transpire 증발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해부학과 관련된 자연과학적인 사실을 아름다운 혹은 활기찬 영혼과 결합시키는 비유법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종류의 수사법이었다. 지금 같으면 슈퍼사이언이 전투력을 끌어올릴 때 그 전투력의 상승 정도가 몸을 둘러싸고 있는 초록빛 불꽃의 세기로 표시되는 것과 같은 장면이 17세기 점잖은 영국사회에 던져졌다고 상상해보면 이런 기상의 놀라운 효과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맹금류의 새는 독수리 같이 다른 짐승을 먹이로 삼는 기가 센 종류의 새다. 이들이 사랑을 하면 적어도 비둘기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먹이를 먹을 때도 이들은,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먹이를 먹는가는 중요하지 않지만, 참새처럼 깨작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맹렬한 기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집어삼키자고 남자는 제안한다. 시간을 집어삼킨다는 것은 일정하게 주어진 삶의 기간을 빠른 속도로 없애버리는 행위이므로 ‘제 명을 재촉하는’ 지극히 부정적인 행동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성행위 자체가 생명력의 상징인 피를 낭비하는 행위로 여겨졌고, 그래서 성행위를 많이 하면 빨리 죽는다는 ‘과학적인’ 속설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을 꿀꺽 삼키는 행위는 시간이라는 녀석의 아가리 속에서 서서히(“slow-chapp'd”) 씹어 먹히는 것과 대조되어 있으므로 긍정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죽음 대신 적극성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시간은 여기서 (모든 것을) 씹어 삼키는 거대한 아가리(크기 때문에 서서히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또 존재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데는 일정한 기간이 걸리므로 서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로 비유되어 있거니와, 이는 제2연에서 구더기가 메멘토 모리로 활용된 것과 달리 해골바가지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힘차게, 적극적으로 육체를 즐기자는 주제는 말똥구리가 말똥을 굴려 둥글게 만드는 비유로 이어진다. 여기서 힘은 남성성의 상징이고 부드러움은 여성성의 상징이므로 힘과 부드러움을 한 덩어리로 굴려 모으는 행위는 남녀가 하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렇게 노력하면 어떤 대가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쾌락이다. 육체를 특정 행위에 열심히 쓰면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쾌락을 얻는 과정을 남자는 철대문으로 에워싸인 인생에게서 힘들여 떼어내는 투쟁으로 비유한다. 이 비유는 원래 인생은 즐거워야 하는 것이라는 까르페 디엠 식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다. 인생에는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많은 쾌락이 들어있다. 그런데, 궁정연애풍이니 정조니 하는 쓸데없는 인위적 장애물(철제 대문) 때문에 두 남녀에게는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당연한 쾌락이 거부되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 장애물을 뛰어 넘어 즐겨 마땅한 쾌락을 즐기는 행위가 대문 안쪽의 것을 바깥쪽으로 훔쳐내는 도둑질의 일종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이 되어야 온당한 쾌락을 두 사람이 협력해서 확보하면 마지막 두 행의 효과가 발생한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것이 하루 낮의 기간이므로 여기서 태양은 시간을 나타내는 은유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태양”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의 기간이 되고, 해를 멈춰 세운다는 것은 시간의 진행을 막음으로써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을 타고난 두 사람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이 시의 구절구절 사이에 우리의 사랑이 영원히 남아 있을 거야’ 따위는 이 남자에게는 닭살 돋는 ‘멘트’에 불과하다). 아무리 두 육체를 하나로 만들어봤자 인간이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태양이 달려가게 할 수는 있다.’ 뛰는 것은 걷는 것보다 더 빠르다. ‘달려가게 만드는’(“make him run”) 것이므로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른다면 두 사람은 더 빨리 죽을 것이다. 더 빨리 죽는 것은 남자에게 좋은 일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빨리 죽자’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 비유법에서 본다면 태양은 혹은 태양의 위치는 인간의 삶의 기간을 결정하는 주재자다. 태양이 이동하는 속도에 따라 인간 삶의 주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양을 더 빨리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피주재자인 인간이 주재자인 태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그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연에서부터 이어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주제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시간이 우릴 서서히 잡아먹게 두느니 우리가 시간을 집어 삼켜버리자’와 같은 구조의 비유가 된다.  태양이 빨라지는 것을 운명 또는 삶이 엄청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는 의미로 본다면 이 비유는 또한 질주감과 같은 높은 강도의 쾌감과 관련된 경험을 가리키는 구절로도 볼 수 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둘이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쾌락을 쟁취하게 된다. 이 ‘투쟁으로 확보한’ 쾌락이 다른 방식으로 얻는 쾌락보다 더 진하고 황홀한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부연설명하는 구절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입맞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909


「새침한 연인에게 그가」라는 제목은 제3인칭의 화자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여타의 서정시 제목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제목이 그냥 ‘새침한 연인에게’일 경우와 어떻게 다를까. 시 자체와 시인 사이의 거리다. 제목에 의하면, 이 시의 화자인 남자는 작자인 앤드류 마블이 아니다. 그래서 이 시 자체는 제3자인 남자가 자신의 연인에게 하는 말을 시인이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된다.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자기 애인에게 하더라구’라며 시인은 이 시의 문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마블 자신은 근엄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데리고 있던 하녀가 내연의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마블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신부였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근엄하기로 으뜸이었던 크롬웰Cromwell 청교도 공화정에서 관리로 지내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이 시에서처럼 노골적으로 여자에게 살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내용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시가 마블 자신에게는 자신의 심정을 내비치는 고백시가 아니라 일종의 문학적 관습을 실천해보는 방편으로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연애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하느니’라며 들이미는 예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단순하게 한 남성이 여성에게 몸을 허락하라고 설득하는 사건인 것만은 아니다. 기존의 문화 코드와 새로운 문화 코드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고, 연애시를 쓰는 방식, 즉 수사법들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공통점은 설득을 통한 유혹이다. 상대의 것이 자신이 들이미는 것보다 덜 효과적이거나 덜 합리적이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다정한 연인의 귀에다 대고 웅변 같은 연설을 유혹이랍시고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설득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옷고름을 푸는 여인의 몸짓 하나에 공적인 수사학과 삶의 방식의 문제까지 함께 엮어 놓는 남자의 말솜씨 하나 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남성이 여성을 집안 하녀로 주저앉힌 이래 여성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는, 대개의 경우,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그래서 딱히 보잘 것이 없는 남성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다. 사랑하는 연인의 육체 위에서 펼쳐지는 한 남자의 화려한 수사학을 보여주는 이 시는 그런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유혹의 정석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