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31

위험한 고백

고백은 일방적이다. 상대의 가시적인 동의나 요구 없이 어느 한쪽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정보전달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정보전달은 정보과잉의 상황을 낳는다. 알고 싶지 않거나 알 필요가 없는 정보가 세상에 떠돌게 되는 경우다. 이런 과잉정보는 혼란과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전달되는 정보가 사람의 감정과 관련된 것일 때 이 과잉정보는 어떤 식으로건 인간관계에 치명적이다. 지금의 관계가 다른 관계로 발전하거나 관계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고백은, 특히나 사랑 고백은 위험하다. 과잉정보만 전달할 가능성이 다른 고백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사랑 고백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개 고백의 상대보다는 고백한 사람이 더 큰 낭패를 겪는다. 섣불리 김칫국을 마셔버린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무신경한 사람이 되거나, 아예 스토커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어쨌건, 고백 이전까지 그나마 유지해왔던 체면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고백의 사촌이 고민인 것은 당연하다.


멀쩡한 사내가 있다. 많이 배운 데다가,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성격도 참하다. 몸가짐은 점잖고 우아하며, 하는 말마다 교양이 묻어난다. 이른바 영국신사의 전형이다. 이름 자체가 ‘프록코트frock coat를 입은 신중한prudent’ 사람을 연상시키는 프루프록Prufrock이다. 점잖음 빼면 시체인 이 사내의 평온한 일상에 위기가 찾아왔다. 사랑을 고백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해서, 사내는 고민에 빠진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계산에 계산을 거듭한다. 어떤 순간에 입을 열어야 할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과연 결과는 어떨 것인가. 결과가 좋지 않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럴 경우를 떠올리기조차 싫어질 정도로 사내에게 이 고백은 위험해 보인다. 



위험은 위험을 부른다. 위험관리라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프루프록은 고백의 위험을 잘 알고 있기에 고백에 대해 그리고 고백의 결과에 대해 치열하게 따져본다. 할 만한 것인가. 사실, 사랑 고백은 사랑 고백일 뿐이다.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신용불량자가 된다거나 누구의 목숨이 오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은은한 조명, 달콤한 분위기, 또는 술의 힘을 빈다든가 해서 객기로 한 번 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외부조건의 힘을 빌거나 없는 기운을 끌어올려 보는 것은 모두 고백에 따르는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일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위험관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그런데 프루프록은 131줄의 시행에 걸쳐 이 고백에 대해 고민하지만 효과적이거나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을 찾지 못한다. 위험을 관리하는데 지나치게 골몰하기 때문에 위험관리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예 실패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프루프록의 위험관리 방식은 고백을 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곤란한 위험을 초래한다. 시 전체에서 보고되는 사건 자체는 고백에 대한 고민이 고백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프루프록이라는 멀쩡한 인물의 인생이 실제로는 얼마나 멀쩡하지 않은 지이다. 프루프록은 사랑 고백의 위험을 헤아리며 어째서 결심을 미루는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를 정당화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저렇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고, 저렇게 하기로 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정당화를 하면서 프루프록은 자신의 관찰력이 얼마나 뛰어나며, 교양이 얼마나 풍부한지, 그리고 이런 관찰력과 섬세함과 지식을 바탕으로 결정을 미루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강조한다. 그런데 이 정당화 논리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프루프록의 고민 자체가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가이다. 왜냐하면, 프루프록은 모르지만, 프루프록이 고민하고 있는 고백의 실체는 첫째,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 고백하기, 둘째,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하기, 셋째, 사랑 고백할 능력이 없는데 고백하기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푸르프록의 고백 고민은 하루 저녁 잠깐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고백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중년의 프루프록에게는 긴 인생살이에서 별 의미 없는 일개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상적인 사건은 프루프록이란 인물의 됨됨이 자체,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결국, 프루프록의 사랑 고백에 대한 고민의 고백이 감추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그리고 그 사실을 정작 본인만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위험, 그런 종류의 위험이다. 


독자는 알지만 극중 인물은 모르는, 그래서 지식의 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가장 고전적인 종류의 이른바 ‘극적 아이러니’는 전통적으로 비극에서 많이 사용되는 수사법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대표적인 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치고 마침내는 자신을 처벌하는 오이디푸스는 인간 존재의 서글픔을 입증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비극의 전형을 완성한다. 오이디푸스에게 발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시민공동체에 대한 연민과 헌신 그리고 진실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의 전개가 치밀해질수록 그 동원되는 논리 자체가 저급하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고민을 오래 할수록 그 고민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는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의 ‘극적 아이러니’는 독자의 실소를 자아내는 종류의 아이러니다. 고상한 척하면 할수록 프루프록은 더 비참해지며, 치밀할수록 허술해지기 때문이다. 1915년 『시가Poetry』에 엘리엇(1888~1965)의 처녀작으로 발표된 이래로 「프루프록 씨의 사랑 노래」가 현대인의 유약한 내면을 효과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얄궂은 운명에 맞서 싸우는 영웅처럼 비장미가 흐르지만, 실상 그 투쟁의 상대는 동굴 속 괴물도 가혹한 숙명도 아닌 과잉된 자의식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프루프록은 영웅의 반대이며 영웅을 희화화한 인물이다. 그런데, 현대를 살고 있는 인간으로 그렇지 않은 이가 몇이나 있을까? 올림푸스의 신들의 횡포, 유일신의 간섭, 자연의 억지로부터도 해방된 현대인들의 적은 현대인 자신들이다. 과잉된 자의식이라는 허깨비를 상대로 절대무공의 초식을 화려하게 펼치는 무협인, 혹은 자기 꼬리를 물어보겠다고 하루 종일 뺑뺑이를 도는 강아지가 현대인의 초상이 아니었던가. 프루프록은 우리 모두의 사촌뻘이다. 그러기에 프루프록을 지켜보며 우리가 날리는 비웃음의 메아리는 언제나 흐느낌으로 되돌아온다.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는 엘리엇의 발문으로 시작한다. 발문은 문학관습상 필자가 화자나 등장인물의 입을 빌지 않고 직접 독자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엘리엇은 단테의 『신곡』 27장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따 발문을 붙였다. 버질Virgil과 함께 지옥의 제8계를 순례하고 있는 단테에게 귀도 다 몬테펠트로Guido da Montefeltro가 하는 말의 첫 부분이다. 

 

S’io credesse che mia risposta fosse 

A persona che mai tornasse al mondo, 

Questa fiamma staria senza piu scosse. 

Ma perciocche giammai di questo fondo 

Non torno vivo alcun, s’i’odo il vero, 

Senza tema d’infamia ti rispondo. 


내 대답이 누군가

이승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면

나의 혀인 이 불꽃은 더 이상 펄럭이지 않으리.

하지만 이 죽음의 골짜기로부터 살아 돌아간 자

아직 없다 들었으매, 그게 사실이라면,

세인의 욕을 걱정 않고 내 말해드리리다.


귀도는 13세기 말엽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전쟁에 휘말려 있던 시절 모사꾼으로 악명이 높았던 장군이다. 살려줄 테니 항복해라 하고는 항복하면 떼죽음시키는 식으로 거짓된 술수를 거듭 부리다 결국 자신도 그런 술수에 속아 죽음을 맞게 된 인물이다. 한마디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사기꾼 영웅인 것이다. 귀도의 벌은 혀만 남기고 온 육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혀도 혀 그대로 남은 게 아니라 불꽃으로만 남았다. 귀도가 말을 할 때는 이 불꽃이 일렁인다.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원문에 ‘세se,’ ‘쎄sse,’ ‘체che,’ ‘에쓰es’ 등의 소리가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단테, 천재!). 이런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귀도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자신이 무슨 죄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말은 하겠다만 지옥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그러니 자신과 관련된 추악한 진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전무하므로 혀를 놀려 말해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잘 알고 있다. 단테는 이 세상으로 돌아와 지옥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사실을. 귀도는 지금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발문 다음에 나올 프루프록의 모습과 꼭 같다. 이 시 전체는 프루프록의 독백이다. 그 독백의 내용은 프루프록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 프루프록으로서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알려지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시의 독자는, 프루프록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시를 읽고 있는 것이다. 엘리엇은 프루프록을 현대의 귀도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귀도 다 몬테펠트로와 함께 있는 단테와 버질』, 바르톨로메오 디 프루오시노(Bartolomeo di Fruosino), 1420년경


프루프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녁 어스름에 누군가와 함께 여자들이 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날 참이다. 싸구려 모텔과 싸구려 선술집이 늘어선 도시의 어느 거리를 지나가야 여인들이 있는 곳에 가 닿을 수 있다. 그런데 여인들을 만나러 가면서도 프루프록의 심기는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Let us go then, you and I,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Let us go, through certain half-deserted streets,  

The muttering retreats                  5 

Of restless nights in one-night cheap hotels  

And sawdust restaurants with oyster-shells:  

Streets that follow like a tedious argument  

Of insidious intent  

To lead you to an overwhelming question….         10 

Oh, do not ask, “What is it?”  

Let us go and make our visit.  

  

In the room the women come and go  

Talking of Michelangelo.  

  

그럼, 가보실까, 그대와 나

온 하늘에 저녁 어스름이

수술대에 마취되어 누운 환자처럼 펼쳐진 지금.

가보자, 인적 드문 어느 거리,

굴 껍질 낭자한 톱밥 깔린 식당과

싸구려 모텔에서 불면의 밤들을 보내는

웅얼대는 뒷골목을 걸어.

또 어떤 거리, 

머리 터질 듯 버거운 문제로 몰아가려는

음험한 의도가 깔린 

지루한 말다툼처럼 이어지는 거리를 지나......

아, 묻진 마시라, “무슨 문젠가?” 

가봅시다, 가서 만나봅시다.

  

방안엔 여자들이 서성댄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프루프록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이 일단 심상치 않다. 저녁 하늘은 “마취된 환자처럼” 뻗어 있고, 길거리엔 인적이 드물며, 도시의 지저분한 뒷골목은 “음험한 의도”가 숨겨진 논쟁의 흐름처럼 구불구불하다. 저녁 하늘은 ‘고요히 낮게 깔려’ 있을 수도 있고, 길거리는 ‘호젓할’ 수 있으며, 뒷골목 길은 ‘아기자기하게 이어질’ 수도 있다. 프루프록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증거다. 툴툴대고 싶은 불안감의 높은 압력이 느껴진다. 이 불안감은 “머리 터질 듯 버거운 문제”(“overwhelming question”) 때문이다. 지금 프루프록은 누군가를 데리고 길을 떠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이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문제는 “overwhelming”한 성격의 것이다. ‘버거운’ 문제 일 수도 있고, 자신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는/거꾸로 전복시키는’ 문제일 수도 있다. 실제로 프루프록은 이 거리들을 지나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 여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는 도시의 뒷골목을 묘사할 때 동원된 건물들과 그 건물의 용도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성적인 긴장이 있는 관계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어쨌건, 이 길을 떠나는 목적은 여인들과 관련된 버거운 문제와 한 판을 벌이기 위해서이다. 프루프록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물어볼 수 있다. 무슨 문제기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냐고. 프루프록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입에 올리지도 마쇼.’ 언급하고 논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프루프록과 이 문제 사이의 거리는 영이다.


『철길 해넘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929


프루프록과 함께 있는 이는 누구인가. 발문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단테가 프루프록이고 ‘그대’는 버질이다. 그렇다면 귀도는 프루프록이 버질을 대동하고 만나보는 프루프록의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 있다. 멀쩡한 프루프록이 이 시 전체를 진술하는 화자이며 귀도처럼 지옥에 갇혀 있는 죄 많은 사람으로서의 프루프록의 내면이 진술의 대상이 된다. 단테와 동행했던 버질은 이 시를 읽는 독자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사실, 이 시에서 “you”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일관성 없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 전체의 전문과도 같은 윗부분에서만 보아도 “you and I”의 “you”와 “To lead you to an overwhelming question”의 “you”는 서로 다르다. 앞의 것은 구체적인 제3자를 2인칭으로 지칭하는 인칭대명사이지만 두 번째 것은 막연한 제3자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용법으로 쓰인 인칭대명사다. 앞의 “you”는 다른 대명사로 대체할 수 없지만 뒤의 것은 ‘(any person)’으로, 복수형으로 생각한다면 ‘all of us human beings’로 대체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Let us go”의 “us”를 구성하는 ‘you’를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자신에게 ‘...해보자’ 라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에구, 이제 밥이나 먹어보자’라고 혼잣말을 할 때 말하는 사람도 ‘나’이고 듣는 사람도 ‘나’다. 이렇게 되면 “Let us go”에서 가정된 ‘you’는 프루프록 자신이 된다. 그리고 이 시는 세 명의 프루프록이 들려주는 프루프록에 대한 진실이 될 것이다.


“you”가 가리키는 인물이 누구인가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왜 이 시에서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찾아내기 어려운가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이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엘리엇은 방년 22세의 풋내기 시인이었다. 22살의 청년이 중년사내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감탄과는 별개로 이 시는 풋내기 엘리엇이 전체 구조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솜씨가 아직은 서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이 시는 ‘극적 독백’의 형식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이 형식은 19세기 영국시단에서 완성된 것으로 드라마에서의 독백이나 방백과는 조금 다르다. 말하는 사람은 하나지만, 그 말하는 투로 보아 누군가와 함께 있고, 또 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형식이다. ‘너 이제 보니 아주 근사한데. 아니, 뭐 네가 평소에 근사하지 않았단 건 아니고. 야, 그렇게 삐지면 어떡해. 내가 밥 살게.’ 같은 말덩이가 극적 독백인 것이다. 윗부분에서 보자면 말하는 이는 프루프록 본인이다. 그런데, “Let us go, you and I”에서 보면 프루프록은 누군가와 함께 있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Oh, do not ask, “What is it?”을 보면 프루프록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함께 있던 사람이 뭔가를 물어보려 했고 이에 대해 프루프록이 반응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극적 독백’ 형식은 화자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면을 구체적인 실제 예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경우에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관건은 등장하는 두 인물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인들이 오가는 방안을 묘사하는 2행으로 된 짧은 연은 여백으로 앞 부분과 구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투 자체가 굳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의 어투가 아니다. 프루프록이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툭하니 내뱉는 말이다. 그리고 이와 꼭 같은 구절이 같은 형식으로 이후에 한 번 더 반복되는데 그 부분 역시 함께 있는 사람의 존재와는 전혀 상관없는 프루프록의 독백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전문에 해당하는 부분 다음부터 3행으로 이루어진 맨 마지막 연 사이의 시 전체의 대부분에서 이 ‘극적 독백’의 형식은 특유의 긴장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이 몸통 부분 전체는 그저 프루프록의 단순한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 결론은 엘리엇이 ‘극적 독백’ 형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you”의 존재감은 사실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구일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일은 재미있을 수 있지만 누구라고 특정하기는 곤란하다. 194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엇도 풋내기 시절엔 풋내기였을 뿐이기에 그렇다.


프루프록은 여인들이 서성대는 방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노란 밤안개가 도시의 밤거리를 뒤덮으며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서(15-25) 프루프록은 여인들을 만나게 될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예의 그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골똘히 생각한다. 여인들에 대한 정보가 조금 구체화되고 여인들과의 만남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도 그 윤곽이 드러난다. 차를 마시는 모임이므로 사교적인 목적의 회합일 것이고,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 미켈란젤로를 일상적인 문맥에서 논할 수 있으니 상당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프루프록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므로 원래 이 집단의 일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프루프록이 이 여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변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표정을 준비해두고서(“prepare a face to meet the face”) 만나는 관계, 만나서 고상한 이야기를 우아하게 나누는 관계라면 이른바 ‘화기애매한’ 관계이기 십상이다.


There will be time, there will be time  

To prepare a face to meet the faces that you meet;  

There will be time to murder and create,  

And time for all the works and days of hands  

That lift and drop a question on your plate;                 30 

Time for you and time for me,  

And time yet for a hundred indecisions,  

And for a hundred visions and revisions,  

Before the taking of a toast and tea.  

  

In the room the women come and go         35 

Talking of Michelangelo.  

 

시간은 있을 거야, 충분히 있을 거야, 

마주하게 될 얼굴을 마주할 만한 얼굴을 준비할 시간이.

시간이 있을 거야, 살인을 저지르고 세상을 창조할 시간이.

그리고 그 문제를 집어 올려 네 접시 위에 내려놓을   

그 모든 일과 손길들이 마련될 충분한 시간이.

그대에게도 시간이, 그리고 내게도 시간이,

그리고 수백 번도 더 주저해도 괜찮을 시간이 있을 것이다,

홍차와 토스트를 먹게 될 그때가 오기 전에는.  


방안엔 여자들이 서성댄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프루프록이 생각하는 방식과 이를 말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프루프록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기 위해 ‘시간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다. 계속되는 반복은 강박적이다. 사실, 프루프록에게는 이럴 여유가 없다. 여인들을 만나게 되면 해야 할 일과 관련된 결정이라면 이 여인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내렸어야 하는 결정이다. 프루프록은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이 길을 나선 것이다. 초조할 것이고, 그 초조감을 감추기 위해 ‘괜찮아, 아직 시간은 있어’ 라며 자신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셈이다. 동원하는 논리는 범주가 넓고 장대하다. ‘살인과 천지창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이 세상의 기원과 인류 역사의 시작을 가리킨다. 온 천지를 새로 만드는 데 전능한 기독교 유일신조차 7일이나 걸렸다. “그 모든 일과 손길들”(“all the works and days of hands”)은 그리스 시인 헤시오드Hesiod의 『일과 일상Works and Days』의 제목에서 따온 구절이다. 헤시오드의 이 시는 근면한 노동을 권하는 내용이지만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 삶의 변치 않는 진실에 대한 교훈으로 여겨진다. 세대를 달리하지만 변치 않고 적용되는 황금율의 기록인 셈이다. 따라서, 프루프록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역사가 되풀이 될 수도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식의 논리를 동원해서 결정을 미루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장대하고 진지한 논리를 표현하는 말투는 조잡하고 유치하다. 동일한 어구나 비슷한 발음의 반복이 지나치다. “time”이라는 어구도 그렇지만, “To prepare a face to meet the faces that you meet”에서 “face”와 “meet”의 반복과 “And time yet for a hundred indecisions,/ And for a hundred visions and revisions”에서의 “-ision”의 반복 등은 지나친 말장난으로 들린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서구의 구전동요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단어와 발음을 재미있게 익힐 수 있도록 짜여진 구전동요는 “간장공장 공장장은 강공장장이고...”처럼 동일한 발음과 동일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각 행의 끝음의 배열을 “쿵쿵따다 쿵쿵따...” 식으로 단순하게 반복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 시 전체에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프루프록의 자기설득의 대부분은 이런 젖비린내 나는 동요식의 리듬을 통해 표현된다. 장대한 규모의 통찰과 유치한 말투의 결합, 이것이 프루프록의 진면목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무슨 문제인지는 아직 분명해지지 않았지만 프루프록의 고민은 점점 무거워진다. 곧 다다를 그 순간에 앞서 미리 결심을 굳혀야 한다는 강박감에 이제는 자신에 대한 회의로 번져간다. ‘내가 그럴 만한 자질이 있던가.’ 그 여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떠올리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And indeed there will be time

To wonder, “Do I dare?” and, “Do I dare?”

Time to turn back and descend the stair,

With a bald spot in the middle of my hair-                                   40

(They will say: “How his hair is growing thin!”)

My morning coat, my collar mounting firmly to the chin,

My necktie rich and modest, but asserted by a simple pin-

(They will say: “But how his arms and legs are thin!”)

Do I dare                                         45

Disturb the universe?

In a minute there is time

For decisions and revisions which a minute will reverse.


그리고 정말이지 시간은 있을 거야

생각해볼 시간이. “한 번 저질러볼까?” 그리곤 또, “내가 한 번 저질러봐?”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갈 시간도 있겠지,

숱이 빠져 휑한 정수리가 드러날 거야.

(여자들이 그러겠지. “어머, 저이 머리가 많이 빠졌네!”)

모닝코트, 턱밑까지 빳빳하게 세운 셔츠 깃,

소박한 핀으로 강조한 화려하면서도 점잖은 넥타이 차림의 나.

(여자들은 그러겠지. “그렇지만 저인 팔다리가 가늘어!)

감히 내가

온 우주를 한 번 뒤흔들어봐?

일분의 시간에도 충분히 시간이 있다,

결정을 내리고 그리곤 그 결정에 대해 다시 일분이면 뒤집힐 번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Do I dare“)에서 ”dare“는 자신의 능력에 부치는 과제을 상정할 때 쓸 수 있는 단어다. 이런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인들과 만나 맞닥뜨리게 될 ‘문제’는 이제 ‘온 우주의 구조를 뒤바꿔놓을’ 만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과업으로 규정된다. 이에 비해 프루프록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중년 사내다. 용기라고는 여인들이 있는 집의 계단을 올라가다가도 얼마든지 마음을 바꿔 돌아내려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엉터리 용기밖에 없다. 프루프록이 보기에 자신이 이렇듯 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단정한 옷맵시에 수수한 멋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을 보는 여인들은 ‘머리가 빠졌다느니,’ ‘팔다리가 가늘다느니’ 하는 비남성적 자질만 주목한다. 이들과 함께 있은 적이 많으므로 프루프록은 실제로 이 여인들이 다른 남정네를 두고 수근대는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식의 말을 할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어쨌건 프루프록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근육이 줄어들고 머리가 벗겨지는 초로의 현상에 관심이 많으며,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그런 ‘치부’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남성적 매력을 잃어가는 중년의 사내인 프루프록은 그렇지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며, ‘이런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용의주도한 사람이며, 예민한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증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지옥의 귀도와 마찬가지로 프루프록이 자기변명을 위해 입을 열면 열수록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신경증적인 소심함과 불안감밖에 없다.


For I have known them all already, known them all:

Have known the evenings, mornings, afternoons,                         50

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I know the voices dying with a dying fall

Beneath the music from a farther room.

  So how should I presume?


And I have known the eyes already, known them all-                 55

The eyes that fix you in a formulated phrase,

And when I am formulated, sprawling on a pin,

When I am pinned and wriggling on the wall,

Then how should I begin

To spit out all the butt-ends of my days and ways?                 60

  And how should I presume?

 

And I have known the arms already, known them all-

Arms that are braceleted and white and bare

(But in the lamplight, downed with light brown hair!)

Is it perfume from a dress                         65

That makes me so digress?

Arms that lie along a table, or wrap about a shawl.

  And should I then presume?

  And how should I begin?

.      .      .      .      .      .      .      .


왜냐면 난 그 모두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죄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난 저녁이, 아침이, 오후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내 삶을 차숟갈로 재어왔기 때문이지.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말꼬리가 흐릿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맞힐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또 난 그 시선들도 모두 잘 알고 있다,  모조리 알고 있다.

상투적인 문구로 사람을 옭아매어버리는 눈.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상투화되면, 바늘에 꽂혀 뻗어버리면,

벽에 바늘로 꽂혀 버둥거리게 되면,

그러면 그땐 난 어떻게 입을 열어

나의 일상과 행동, 그 모든 담배꽁초들을 토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리고 난 그 팔도 이미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팔찌를 한 맨살의 흰 팔들

(하지만 등불에 드러나면 옅은 갈색 털로 수북하지!) 

드레스에서 나는 향수냄새 때문인가,

내가 이렇게 헤매는 것은?

팔이 탁자 위 가장자리로 걸쳐질 때, 아니면 어깨에 걸친 숄을 감쌀 때,

  그러면 그때 입을 열어야 할까?

  그럼, 어떻게 시작하지? 

.      .      .      .      .      .      .      .


먼저, 프루프록이 보는 자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남’이다.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사건들로 채워지는지 다 알고 있다.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뻔한 일들만 일어날 뿐이다. 자신은 이런 날들을 아주 섬세하게 관찰하며 주도면밀하게 가늠하며 살아왔다. 자신의 인생을 커피 젓는 숟가락 크기의 잣대로 재량해왔기 때문이다(“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a coffee spoon”). 그리고 자신이 상대할 여인이 섞인 무리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도 잘 알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만큼 교양은 있지만 사람을 틀 속에 가둬 파악하는 선입견이 강한 사람들이다(“The eyes that fix you in a formulated phrase”). 이런 여인들의 시선을 받으면 자기는 등에 핀을 꽂아 박제되는 곤충처럼 무기력해진다. 그 시선들이 너무나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시선에 항의하거나 저항할 만큼 자신이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일상 또한 담배꽁초처럼 무의미하며 따라서 무가치하다는 것을 프루프록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all the butt-ends of my days and ways”). 여인들의 이성으로서의 매력도 별로다. 얼핏 맨팔의 하얀 살색에 끌리기도 하지만 이미 프루프록 자신은 이들의 흰 살이 실제로는 지저분한 갈색 털로 덮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여인과 가까이 있게 되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이처럼 어떻게 할까를 이토록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그런 여인들 중 어느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어떤 순간을 포착해서 입을 열 것인가. 그 순간을 포착한다면 어떤 말로 시작해야할 것인가. 

 

평소 프루프록이 이들 여인들과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를 짐작해보면 어떻게 입을 열 것인가 고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보인다. 결정적인 단서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사랑 고백을 할 대상이 불특정하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한 명일 텐데 67행에 이르기까지 프루프록의 뇌리 속에서 떠다니던 존재는 “they”로서 복수형으로 지칭되고 있다. 프루프록에게 67행에서의 팔을 탁자 위에 올리거나 숄의 매무새를 고치는 한 명의 여인은 ‘그들’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자신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을,’ 혹은 ‘온 우주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그 어마어마한 ‘문제’와 연루된 여인이 불특정 다수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점은 그 ‘문제’ 자체가 프루프록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할 정도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이것은 이 여인에 대한 프루프록의 사랑 고백이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두 번째는 프루프록이 복수형이건 단수형이건 여인(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누구든 프루프록이 떠올리는 대상은 자신이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했을 때의 모습이거나, 가까이 있을 때는 신체의 일부만 강조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 사실은 이들 여인들과 함께 있었던 경우는 많지만, 시선을 두려워 하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루프록은 이들 중 누구와도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기에 이제 와서 이들 중 한 명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비스듬히 기댄 여인』, 라이문도 데 마드라조 이 가레타(Raimundo de Madrazo y Garreta)


어찌 됐건, 프루프록은 고백을 시작할 대사를 떠올려 본다. 참고로 말하자면, 아직 프루프록은 고백을 실제로 할 것인지 그러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랄까. 생각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외로운 남자들이 담배 피우는 걸 지켜봤다는 말로 시작해볼까 하지만 이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나날이 이들 가난하고 무료한 사내들의 일상과 너무 비슷하다는 자격지심 탓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갑자기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차라리 사람 아닌 게 같은 생물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프루프록은 이제 적극적으로 고백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역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자격지심이 그 하나고, 해봤자 소용이 없을 수도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이 그 둘이다.

 

Shall I say, I have gone at dusk through narrow streets                        70

And watched the smoke that rises from the pipes

Of lonely men in shirt-sleeves, leaning out of windows?…

 

I should have been a pair of ragged claws

Scuttling across the floors of silent seas.

.      .      .      .      .      .      .      .


Should I, after tea and cakes and ices,

Have the strength to force the moment to its crisis?                  80

But though I have wept and fasted, wept and prayed,

Though I have seen my head (grown slightly bald) brought in upon a platter,

I am no prophet—and here’s no great matter;

I have seen the moment of my greatness flicker,

And I have seen the eternal Footman hold my coat, and snicker,                  85

And in short, I was afraid.


[......]


And would it have been worth it, after all,

Would it have been worth while,                         100

After the sunsets and the dooryards and the sprinkled streets,

After the novels, after the teacups, after the skirts that trail along the floor-

And this, and so much more?-

It is impossible to say just what I mean!

But as if a magic lantern threw the nerves in patterns on a screen:                 105

Would it have been worth while

If one, settling a pillow or throwing off a shawl,

And turning toward the window, should say:

  “That is not it at all,

  That is not what I meant, at all.”

.      .      .      .      .      .      .      .


이렇게 해야 하나? 저녁 어스름 좁은 골목길을 지나며 저는 지켜봤습니다.

셔츠차림으로 창밖으로 몸을 기댄 외로운 사내들의 담뱃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을 분주히 오가는

게의 집게발로 태어났어야 했어.


차를 마시고, 과자와 아시스크림을 먹은 다음, 그때 

그 순간을 가장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절정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내겐 있는 걸까? 

하지만 난, 통곡하며 단식하고, 또 통곡하며 기도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내 머리(살짝 대머리가 된)가 접시에 놓여 들여지는 걸 보기도 했지만,

그렇지만 난 예언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건 뭐 대단한 문제도 아니다.

난 내가 위대해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 가물거리는 걸 이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승사자가 내 옷자락을 잡고 킬킬대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그때 난, 한 마디로, 무서웠다.


[......]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될까?

해지는 것을 보고, 정원을 거닐고, 거리에 살수가 끝나고,

소설도 이야기 하고, 차를 마시고, 바닥을 끌며 치맛단들이 오가고 난 뒤...

그리고 이렇게 망설이는 것과, 이후에 더 망설이게 될 것까지 포함해 모든 것이 있은 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될 것인가?  

내 속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무슨 마법의 등불 같은 것이 내 몸속 신경을 화면 위에 그대로 비춰준다고 하자.

그러면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될까,

여인이 쿠션 방석을 매만져 받치면서, 혹은 숄을 젖혀 내리면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면.

  “그런 게 정말 아니에요.

  전 정말 그런 뜻으로 그런 게 아니라구요.“


프루프록 자신이 회고하기에도 자신의 삶은 겉으로는 중상층의 신사 체면에 어울리는 것 같아도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회한과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하고 스스로 살로메의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세례요한의 삶과 같은 면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 때 그랬다는 것이다. 자신이 “위대해질 수도 있었던 순간들”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바람 앞의 촛불처럼 “깜박이며 꺼져버린 후다(”I have seen the moment of my greatness flicker“). 게다가 자신은 세례요한에 비견될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의 문제, 즉 고백을 해야 하나,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문제는 세례요한이 고민했던 문제와는 차원이 형편없이 다른 문제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저승사자가 눈에 아른거릴 정도의 나이다. 중년의 사내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무서워하는 비겁한 중년의 사내가 사랑 고백을 하고 퇴짜를 맞는다면 정말 체면을 구기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고백이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어찌어찌 해서 복잡한 내 속을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하더라도 고백을 들은 여인이 아주 무심하게(”settling a pillow or throwing off a shawl,/ And turning toward the window”) ‘아, 오해하셨네요, 프루프록 님’이라 말한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망설이고 고민하고 기회를 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 고백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무의미하지 않은가. 프루프록은 이제 고백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든 살로메』, 귀도 레니(Guido Reni), 1635


푸르프록은 고백에 대한 고민이라는 화두를 포기해버린다. 일상적인 상념이 그 자리를 채운다. 늙어가는 나이를 의식하고, 좀 더 젊어 보이려는 노력을 해야지 않겠나 생각해본다. 회춘에 대한 욕망은 곧 젊고 싱싱한 육체들이 득시글거리는 해변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가본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중년의 사내에게 젊고 발랄한 여성들이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다. 자기네들끼리 희희낙락할 뿐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프루프록의 여정은 끝난다. 

 

I grow old … I grow old …                           120

I shall wear the bottoms of my trousers rolled.

 

Shall I part my hair behind? Do I dare to eat a peach?

I shall wear white flannel trousers, and walk upon the beach.

I have heard the mermaids singing, each to each.

 

I do not think that they will sing to me.                         125

 

내가 나이 먹어가는 거다..... 늙어가는 거다.....

바짓단이나 접어 올려야지.

가르마를 뒤쪽에다 타야 할까? 복숭아를 어디 한번 먹어봐?

플란넬 바지를 흰색으로다 입어야겠다. 그리곤 해변으로 가는 거야.

난 인어들이 저들끼리 노래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다.


나한테 노랠 불러주진 않을 거야.


그렇게 복잡하고 거창한 논리를 동원하고, 고전과 고사를 인용하며, 세밀한 분석을 적용한 뒤 프루프록이 내린 결정은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고민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 결정을 내린 후 프루프록은 그토록 집착했던 ‘어마어마한 문제’를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다. 곧바로 다른 여인들의 세계에 들어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안의 우아한 숙녀들을 떠나 해변의 발랄한 여인들에게 접근한다 해서 프루프록이 새로운 경험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사적이거나 진지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겉돌게 될 것이다. 해변의 ‘인어’들이 자신에게는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루프록은 고백에 대한 고민했던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동일한 궤적을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릴 뿐이다. 


그리고 프루프록은 상념에서 완전히 깨어난다. 당연히 상념 속에 함께 있던 인물도 함께 깨어난다.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은 상념 속에 존재했던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념의 세계는 인간이 사는 육지와는 다른 세계다. 상상의 세계이므로 현실과 부딪치게 되면 그 즉시 스러지고 만다.  


We have lingered in the chambers of the sea

By sea-girls wreathed with seaweed red and brown             130

Till human voices wake us, and we drown.


우린 여태껏 바다 속 작은 방에 있었다.

홍갈색 해초로 화관을 받쳐 쓴 인어들과 함께였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린 깨어나고, 그리고 익사한다.


프루프록이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목소리 때문이다(Human voices wake us). 일차적으로, 이 목소리는 복수형인 것으로 보아, 그리고 애초에 프루프록이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므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프루프록에게 집안으로부터 들려온 사람들의 말소리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은 목소리가 들려나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프루프록이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지껏 고민을 하다 고백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아니 고민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던 프루프록에게는 정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요리 빼고 조리 빼보려다 정말 혼쭐이 나게 된 셈이다.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애초에 이 여정의 시작은 가공의 인물과 함께였다. 이 시의 시작 자체가 상념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루프록은 실제로 집을 나서 지저분한 골목길을 따라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던 것일까? 자신의 집 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런 여정을 상상해본 것은 아닐까? 이런 가정을 무너뜨릴 만한 증거가 실제 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관조적인 그리고 상상력만은 풍부한 프루프록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프루프록 집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도 볼 수 있다. 하인이나 집사가 응접실에 불쑥 들어 온 경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단순히 프루프록이 상념에서 깨어난다는 것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들려온 목소리는 단순하게 ‘누군가의 목소리,’(some people’s voices) 혹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the voices/ their voices)이 아니라 “Human voices”이다. 물론 바로 윗줄에 바닷속 인어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 상념의 세계에 있던 가공의 등장인물의 것이 아닌 실제 사람의 목소리를 지칭하기 위해 “Human”이란 단어를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시의 발문을 상기해보면 이 단어에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귀도는 지옥에서 세상으로 탈출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귀도는 지옥에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혹은 그런 내면을 가진 프루프록의 다른 모습이었다. 지옥에 있는 존재들은 human이 아니다. 그들은 spirit이거나 soul이다. 이들에게 human은 이승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프루프록이 듣는 목소리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며, 프루프록이 지옥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의 증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의미는 시의 등장인물인 프루프록이 깨달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고, 따라서 이 구절은 이 시 전체에 대한, 이른바 ‘메타적인 진술’이 된다. 발문의 목소리가 온전히 엘리엇의 것이었다면 마지막의 목소리는 프루프록의 목소리에 엘리엇의 목소리가 교묘하게 덧씌워진 셈이랄까.


프루프록은 사랑 고백을 쉽게 보았다 큰코다치는 인물이다. ‘어마어마한 문제’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기로 하면 그만인 것으로 가볍게 여겼다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과 내면을 고스란히 내비치게 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게 됐다. 게다가, 본인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혹여 중년의 나이를 넘겼다는 데서 오는 강박 때문에 혹은 이성의 냄새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고 사랑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프루프록은 경고한다. 섣불리 덤비지 말라고, 꼭꼭 숨겨두고 싶은 자신의 남루함을 까발리게 되는 치명적인 위험을 경계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