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3

사랑 예감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이 내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불꽃, 감전, 바람, 봄비, 아지랑이, 밤안개, 불면, 심지어는 황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고 나는 사랑을 예감한다. 짝짓기의 통과의례이건 영혼의 교감이건 사랑의 시작은 이렇듯 대개 신비한 것으로 묘사된다. 의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상으로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의 예감은 확실하다. 내 몸이 느끼고 마음이 느끼고 전 우주가 그 느낌을 확인해준다. 


사랑이 시작될 것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불안하다. 구름은 단단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만 확실할 뿐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 왜 이 사람은 내게 이토록 특별해졌는가. 어떻게 할 셈인가, 이 사람은.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저 몸짓은 뭐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이 어떤 건지는 안다.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대충 안다. 그 막장 드라마를 또 다시 시작해야할까. 그냥 접어, 여기서? 그런데, 좋다. 너무 좋다. 설렘과 망설임, 가능성과 불확실성, 추측, 계산, 그리고 지복의 행복감. 이 모두가 두서없이 그렇지만 집중적으로 또 동시에 진행되는 시기, 이른바 밀당의 단계, 사랑의 시작이다.


「희롱」(1904), 에우제네 데 블라스(Eugene de Blaas, 1843~1932)


리타 도브(1993~1995)는 1983년 출간된 『미술관』(Museum, 1983)에 수록된 「사랑의 서곡」에서 사랑을 예감하며 갖가지 감정과 계산의 회오리에 휘말린 여인의 심리를 재미있게 그려낸다. 복잡미묘한 심리를 탁월한 형식으로 담아낸 시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소품이다. 


  

Flirtation         사랑의 서곡


After all, there’s no need 결국, 뭐라고 굳이

to say anything         말할 필요가 없다


at first. An orange, peeled 처음에는. 불꽃으로 피어난다,

and quartered, flares 껍질 벗겨 사등분 한 오렌지 하나 


like a tulip on a wedgewood plate 튤립처럼 웻지우드 접시 위에서  

Anything can happen.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겠어.


Outside the sun         바깥에는 해님이 

has rolled up her rugs         자리 접은 지 오래


and night strewn salt 밤은 이미 온 하늘에  

across the sky. My heart         소금을 뿌려 놓았다. 내 심장은  


is humming a tune 박자를 탄다,

I haven’t heard in years!         오랜만에 들어보는 낯선 노래!


Quiet’s cool flesh— 고요한 정적의 서늘한 과육--

let’s sniff and eat it. 우리 그 내음 들이키며 먹어보자구요.

There are ways         이 순간은 여러 가지의

to make of the moment 기회가 될 수 있을 터. 


a topiary         토피어리 정원 같은 것

so the pleasure’s in 하여, 쾌락이 들어선다,


walking through.         쓱 하니 걸어서.



두 사람이 만났다. 공들여 손질한 토피어리 정원이 딸리고 기품의 상징인 영국제 웻지우드 식기를 사용하는 곳이니 이른바 ‘근사한 곳’일 것이다. 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오렌지가 나왔다. 음식을 먹는 동안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호구조사를 했을 수도 있고 세상의 가난을 없애버릴 묘책을 강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식이 나오자 여인은 말을 않는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여인은 오렌지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다. 이윽고 누군가가 입을 연다. ‘산책이나 할까요?’ ‘정원을 참 잘 가꿔놨네요.’ ‘그러게요.’ 두 사람은 정원으로 내려선다. 사랑이 시작됐다.


사건은 단순하다. 밥 먹고 산책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의 열기에 휘말려 정신을 잃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도 두 사람은 한껏 예의를 차린다. 의례적인 만남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이 시를 읽는 재미는 이런 사건의 단순함과 심리의 복잡함을 사건의 당사자 어느 한쪽의 심리묘사만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데 있다. 


후식으로 오렌지가 나오면서 여인은 직감한다. 뭔가 이 만남에  대해 분명히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밥 먹는 건가? 아님 뭔가 시작하려고 이러고 있는 건가? 하지만 여인은 현명하다. 이런 일은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해도 나중에 하면 된다. 아니면 아예 말을 할 필요조차도 없는지 모른다(“no need to say anything/ at first”).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여인은 잠시 앞에 앉은 사람을 잊는다.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만 쏘아보고 있다. 그런데, 이윽고, 혹은 갑자기 여인은 감을 잡는다. 아 바로 그거로구나! 보고 있는 오렌지가 튤립처럼 붉게 피어난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시랑이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불꽃처럼. 그렇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나만의 예감일 수도 있다. 저 사람도 나도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 같다. 아 이제 어떻게 될까. 앞으로 우리 둘은 어떻게 될까. 그냥 덮어두게 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게 ‘그냥 밥 먹는 것’으로 끝나면서? 아님, 춘향이와 도련님처럼 업고 놀게 될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Anything can happen”).

 

붉은 속살의 오렌지가 뜬금없이 접시 위에서 불타오르는 걸 봤으니 여인의 볼이 상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저 혼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상대에게 보이느니 괜스레 밖을 내다본다. 어머,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몸의 열기가 식는 것 같다. 그런데, 무심한 척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심장이 뛴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린다(“My heart/ is humming a tune”). 예사롭지 않는 박자다. 잊고 살았던 예의 그 박자다(“haven’t heard in years!”)! ‘경험있는’ 여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 심장의 박자가 이상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선다. 고요한 밤, 공기가 차다. 달큰한 과일의 시원한 속살 같다. 먹고 싶다. 향긋한 냄새를 맡으면서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싶다. 여인은 현명하면서도 교활하다. 혼자 먹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이 사람, 유혹하고 싶다. 확실하게 내 걸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속내를 그렇게 훤히 내비칠 순 없다. 그저 속으로만 유혹한다. ‘같이 드실래요?’ ‘우리 같이 달콤한 속살에 코를 박고 마음껏 단 맛을 즐겨볼래요?’ 실제 여인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만약 했다면. ‘밤공기가 상쾌하군요.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그럼. 서두를 필요는 없지. 함께 하는 산책이 뭘로 이어질지 어떻게 알겠어. 나도 알만큼은 알고 있는 사람이야. 지금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쯤은 알고 있다구. 이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풋사랑도 아니고, 먹을 만큼 먹은 나이의 사람들인데. 다 하기 나름 아니겠어(“There are ways/ to make of the moment”). 정원의 나무들이 온갖 동물의 모양으로 손질되어 있다. 이 산책은, 그리고 지금 우리 둘의 관계와 주고받는 수작은 토피어리 정원과 같다. 어떤 모습으로도 가공될 수 있는 원재료와 같은 것이다. 늘어선 정원수 사이로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 같은 곳에 희열이, 쾌락이 걸어 들어온다(“pleasure’s in/ walking through”). 사랑이 시작된다.


리타 도브는 미국의 제7대 계관시인이었다. 현재도 현역 시인이자, 편집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백악관에 초청되어 시를 낭송하기까지 했다. 특별한 시학적 경향을 따르지는 않지만 일상에서부터 정치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형식으로 담아내는 데 소질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랑의 서곡」 역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1987)의 작품답게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탁월하다. 구어체의 단순한 문장들은 구두점이 생략된 채로, 그리고 연이 끝나지만 연의 마지막 어구가 다음 연의 첫 구절로 이어지는 연걸치기 수법으로 빠르게 흘러 전달하는 사건의 단순함과 함께 화자의 가쁜 호흡을 느낄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화자가 인지하는 것, 화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단상들만 간단하게 나열되어 있고 사건의 진행을 중계해주는 진술이 없으므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래서 이렇고 저래서 그렇다’는 식의 복잡한 논리적 흐름이 아예 배제된 것이다. 


그런데 속은 아주 복잡하다. 무엇보다 말의 종류가 여러 가지다. 단순한 물리적 환경인 창밖의 풍경을 묘사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화자가 화자 자신에게 속삭이는 말도 있고, 화자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다. 일반적인 시에서라면 이런 말의 다른 종류는 인용부호나 괄호를 사용한다든가 연을 특별하게 구분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구별되어 제시된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배려가 없다. 읽는 사람이 찾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들 말들이 단순하게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기능 이외에 다른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말을 다중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오렌지가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을 전달하는 문장이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여인이 오렌지에 오랫동안 주목하고 그래서 오렌지의 붉은 속살이 아주 강렬하게 느껴지게 되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붉은 속살이 강렬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여인의 심리적 변화를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 은유는 그 자체로 다시 한 번 이 여인이 있는 공간적 배경과 연루된 사건의 진행과정상의 단계를 암시한다. 표면이 있고 그 위에 다른 층위의 표면이 있으며 또 그 위에 또 다른 층위의 표면이 덮고 있는 삼중의 역할을 하나의 문장이 하고 있는 것이다. 


각 문장이 지시하는 것이 하나 이상이라는 점보다 더 복잡하고 또 미묘한 점이 있다. 문장의 구조와 배열구조가 화자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분한 마음일 때는 차분한 방식으로, 흥분했을 때는 흥분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짓궂게 애교와 함께 흑심을 드러내는 문장은 또 그에 맞는 구조와 배치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말의 어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인데, 먼저 첫 번째 연에서 세 번째 연까지를 보자,  



After all, there’s no need  결국, 뭐라고 굳이

to say anything          말할 필요가 없다


at first. An orange, peeled  처음에는. 불꽃으로 피어난다,

and quartered, flares  껍질 벗겨 사등분 한 오렌지 하나 


like a tulip on a wedgewood plate  튤립처럼 웻지우드 접시 위에서  

Anything can happen.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겠어.



첫 번째 문장 “After all... at first”는 차분한 호흡으로 흐른다. “After all”이라든가 “at first” 같은 어구는 논리가 개입될 때 사용되는 것들이다. 거기다 “there is no need to...” 같은 구문은 문어체의 어투로서 고답적인 맛까지 풍긴다. 문장의 구조 역시 도치나 삽입 같은 왜곡 없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After all” 다음의 콤마는 이 차분한 어조의 호흡을 더 차분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비하면 두 번째 문장 “An orange,... wedgewood plate”는 다소 가쁜 호흡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문장의 뼈대 자체는 단순하다. 주어(“An orange”)와 완전자동사(“flares”)로만 되어 있는 가장 간단한 구조의 문장이다. 이런 1형식 문장은 원래 주어와 동사를 가급적 가까이 두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경우, 주어와 동사 사이에 과거분사 둘로 이루어진 형용사구가 삽입되어 있어 그 거리가 멀어져 있다. 더구나 “flares” 다음의 부사구 “like a tulip on a wedgewood plate”가 연구별을 위한 여백 다음에 나온다. 이 여백은 화자가 생각과정에서 뭔가 비유할 것을 찾아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생각해낸 것이 “tulip”임을 전달하는 여백이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문장구조로 제시되어야 할 1형식구문을 읽는 것을 더디게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더딘 진행이 화자의 사고과정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이 순간이 사랑 같은 강렬한 사건이 발생할 예감과 연결되는 의외성을 전달하데 효과적인 것은 분명하다. 일곱 번째 연의 문장 “Quiet’s cool... eat it”은 변덕과 애교, 유혹하는 이의 과감함 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문장이다. 시 전체를 통털어 단 한 번 사용된 대쉬(--)는 여기서 시간이 경과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나타내므로 화자의 과감성을 드러낸다. “sniff”은 ‘냄새를 킁킁대며 맡다’라는 의미의 단어로 다소 속된 몸짓과 태도에 집착이나 몰입의 정도가 강하다는 의미까지 더해진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이므로 얌전한 척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화자가 입 밖에 낼 수 없는 종류의 말이다. 이 문장이 화자가 마음속으로 감히 그리고 짓궂게 해보는 말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랑은 시작이 제일 어렵다고들 한다. 기념일을 챙겨줄 여유가 없어 시작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80만원 세대가 아니라면, 무엇보다 불확실한 단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평생을 통해 갈고 닦은 교감의 언어와 몸짓을 내보내고 또 해석하면서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야 성공할까 말까한 단계이므로 그 난이도가 높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또 사랑은 시작이 제일 좋다고 한다. 타성으로 흘러가는 본격 드라마에서보다 더 놀랍고 격렬한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이 시작되면. 아폴로를 피하는 다프네처럼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이 시의 화자처럼 흐름에 한 번 맡겨볼 것인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walking through”이다. 바로 앞의 여백으로 시 의 다른 부분과 떨어져 있다. 분사구문이므로 의미상의 주어는 “pleasure”라고 봐야겠지만 이 여백으로 인해 그리고 시 전체에서 화자가 보여주는 태도로 볼 때 그 주어는 화자 자신 또는 두 사람 모두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walking through”의 의미는 달라진다. 본격적인 사랑에 앞서 남녀가 서로를 희롱하는 이 순간과 기회(“the moment”)를 ‘당당하게 돌파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리타 도브 자신은 독일 유학 시절에 만난 사람과 젊은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까짓 것 하고 한 번 돌파해볼만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