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7

"용서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은 너무 빠른 용서에 빠져들었다가 뒤늦게 용서의 어려움에 부딪쳐 절망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용서란 자유의사를 가진 한 인간이 상대에게 건네주는 마음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주고받기까지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그리고 이웃과 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야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특히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 그의 삶과 정체성을 산산조각 낼 만큼 엄청난 것일 때, 용서는 관용과 아량의 범위를 넘어선다. 질 스콧은 용서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forgiving’의 중간에 들어있는 ‘주다give'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용서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간 상대에게 돌려받을 기대 없이 주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용서란 가벼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증오와 복수의 반대편에서 화해에 이르는 치유책 정도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거나 그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용서는 무너진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피해자가 치루는 내적 투쟁이다. 이 투쟁과정은 고통스럽다. 스티븐 체리가 용서 문제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용서라는 고통’으로 붙인 까닭이, 용서의 본질은 다름 아닌 ‘고통’에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유괴범에게 자식을 살해당한 한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 용서의 위험성과 불가능성, 그리고 한 줄기 ‘비밀의 빛’으로 나타나는 희미한 구원의 가능성을 그려 보인다.

   

비밀의 햇빛. 영화 제목이자 영화 속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 ‘밀양密陽'의 한자 의미다. “햇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스며 있어요.” 영화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약사가 아들을 잃은 신애(전도연)를 애처롭게 여겨 종교적 귀의를 권하며 건네는 말이다. 약사의 말을 듣고 신애는 손을 움켜쥐었다 펴며 대답한다. “여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신애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가 밀양에 내려오게 된 동기 가운데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도 없지 않다. 영화 초반 신애는 자동차 고장으로 국도에 멈춰 선다. 그는 길가 옆 개울에 앉아 손을 뻗어 햇살을 움켜쥐며 말한다. “햇볕 좋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신애는 자동차 수리 기사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이 ‘비밀의 햇볕’이라고 알려준다. 마치 그 햇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 것인 냥 신애는 뜻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에게 애써 ‘밀양’의 의미를 해석해준다. 신애 모자와 종찬이 밀양으로 향할 때 카메라는 차창 너머 하늘에서 오연히 빛나는 해를 비춘다. 카메라는 신애가 낯선 땅에서 대적해야 할 것이 저 너머의 세계임을 암시하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신애는 추방당한 여인이다. 그는 아내의 자리에서 두 번 밀려났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기 전 신애는 외도로 그를 먼저 잃었다. 두 번에 걸친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애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곳은 이상하게도 잊어버리는 것이 더 편할 남편의 고향이다. 신애는 망각 대신 부인否認의 길을 택한다. 남편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신애는 남편의 유지를 따르는 충실한 아내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밀양은 적당한 호의와 적당한 적의가 공존하는 낯선 세속도시다. 미장원과 학원과 교회 등등 도시 곳곳에서 신애는 토착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의 여자이다. 그가 그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위장이 필요하다. ‘돈 많은 미망인’은 이방의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신애가 취하는 사회적 가면이다. 그러나 이 위장은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온다. 이제 그는 엄마의 자리에서도 밀려난다. 웅변학원 원장이 돈을 노리고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것이다.     

  

영화는 유괴를 다루지만 관객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관객은 유괴과정도 유괴된 아이의 시신도 보지 못하며, 아이의 고통도 유괴범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 관객은 범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유괴범을 증오하는 것에서 벗어나며, 아이의 훼손된 신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관음증적 탐닉의 기회에서 차단된다. 여러 평자들이 되풀이 지적한 바이지만, 이창동 감독은 폭력을 다루는 영화가 종종 걸려드는 함정, 손상된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관객이 가해자를 비난할 수 있는 안전한 도덕적 위치를 마련해 주는 동시에 폭력을 외설적으로 즐기게 만드는 모순에 빠지기를 거부한다. 감독은 아예 폭력을 재현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관객은 유괴행위 자체의 육체성에는 접근할 수 없다. 관객이 보는 것은 유괴의 결과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아이 엄마의 고통이다.  

   

영화는 그 아이 엄마가 참척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빠져드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들을 화장하는 동안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신애는 교회 기도회에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울음을 발작적으로 터뜨린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그의 머리에 목사의 손이 내려앉는 순간, 마치 신의 권위에 복종하듯 신애는 울음을 멈춘다. 이후 신애가 보여주는 개종의 과정, 하느님을 영접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고 급기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는 과정은, 남편의 배신과 죽음 뒤 그가 취했던 ‘부인의 제스처’를 반복한다.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온 것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부정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기독교에 귀의하여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에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욕망’에서 연원한다.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신애는 인간의 논리가 닿을 수 없는 초월적 세계로 건너간다. 그는 초월적 존재자의 품 안에서 절망의 현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수용은 종교적 착시였다.   

   

“용서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애가 교도소를 찾아가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했을 때 목사가 건넨 말이다. 교도소에게 만난 범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자 신애는 자신이 믿었던 초월적 세계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 이제 신애는 용서의 권리마저 빼앗아간 신에게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다. 

   

한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은 청문회 열기가 뜨겁던 1988년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이 소설이 ‘광주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느꼈다고 말한다. 


청문회에서는 광주학살의 원인과 가해자를 따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제 화해하자는 공론화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벌레 이야기>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암시조차 없는데도 나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 소설이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진실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알 것이냐, 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청준 소설의 큰 미덕인데,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느꼈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은 영화에서 신애가 던지는 것이지만,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에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화두이기도 하다. ‘광주’는 한국사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찾도록 만들었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이를 종교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같은 인터뷰에서 평론가 허문영이 <밀양>이 “개인의 고통을 일종의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는 것 같다”고 하자 이창동 감독은 곧바로 부인하고선 이렇게 덧붙인다. “다 좋은데, ‘사회적’이라는 말은 좀 뺐으면 좋겠다. (…) 왠지 이제는 그 말이 진짜가 아닌 것 같은 뭔가가 마음속에 생겨버렸다.” 사회에서 비롯된 문제이되 그것을 풀려면 보다 깊은 차원, 종교나 윤리라는 말로 호명할 수 있는 어떤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다.  

   

영화에서 유괴범은 법의 심판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회는 유괴를 막지는 못했지만 가해자를 심판하는 법적 장치는 가동시켰다. 그러나 한 사회가 마련한 법이라는 공적 제도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행해야 하는 개인적 작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신애는 가해자에게서 어떤 참회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신애가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당하게 전유된 신의 면죄부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하는가. 이 참칭된 용서가 신애를 신에게 저항하도록 만든다. 신애는 하느님의 율법을 깨뜨리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기도회를 방해한다. 신애가 장로를 유혹하여 햇살이 훤히 비치는 공터에서 간음을 저지를 때, 카메라는 하늘을 노려보는 신애의 핏발 선 눈과 일그러진 얼굴을 길게 비춘다. 그가 과도로 손목을 그어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움켜쥐고 미친년처럼 거리를 헤맬 때 신애의 고통은 절정에 이른다. 누구도 그의 아픔을 나눌 수 없고 누구도 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 신애의 고통은 오롯이 그만이 짊어져야 하는 몫이다.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며 “난 너한테 안져. 절대 안져”라고 소리칠 때 관객은 그에게서 하느님에 맞서는 욥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신애는 욥의 시련을 겪지만 욥의 길을 따르지는 않는다. 감독은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복종함으로써 신에게 회귀하는 길, 신에게서 휴식하며 겸손과 신뢰로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는 욥의 길을 신애에게 주지 않는다.  

  

신에 대한 도전도 복종도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면 남은 길은 무엇인가. 사실 신애는 너무 빠른 용서에 빠져들었다가 용서의 불가능성에 부딪쳤다. 신애는 용서하려는 열망이 너무 앞섰다. 그는 가해자의 무엇을 용서하겠다는 것인지, 가해자의 뉘우침 없이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인지, 자신이 가해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넘어섰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용서를 결정했다. ‘용서자 신드롬’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과잉의 열망은 도덕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범인을 용서해주겠다는 신애의 결정은 도덕적 과시와 종교적 도그마를 떨쳐 버린 다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애는 아직 ‘용서하는 마음’에 이르지 못했다. 범인의 딸이 남학생들에게 구타당하는 현장을 지나갈 때 신애는 외면한다. 그애와 시선을 마주쳤지만 고개를 돌린다. 아들을 폭력에 잃었으면서도 신애는 또다른 폭력에 노출된 어린 소녀를 원수의 딸이라는 위치에서 풀어내지 못한다. 신애의 마음은 그 애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그 애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열리지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우연히 미용사로 일하는 그 애의 손에 머리를 맡기게 되지만, 신애는 여전히 그 애의 접촉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망과 분노가 그의 내면에 완강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찬이라는 일견 속물로 보이는 인물이 신애 곁을 맴돌게 함으로써 구원의 문을 조금, 아주 조금 열어놓는다. 종찬은 늘 네댓 걸음 뒤에서 신애 곁을 지킨다. 그는 부르면 다가가고 밀쳐내면 물러나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신애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종찬의 감정이 허영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 39살의 투박한 시골 노총각에게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의 피아노 선생은 분명 선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 존재였을 테니까. 그러나 그 여자가 치러내는 고난의 역정에 동행하고, 그 처절한 고통을 어떻게든 감싸 안으려는 종찬의 사랑은 어느 순간 스스로의 중력으로 허영의 벽을 뚫는다. 이 영화가 신애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신애와 종찬의 이야기인 이유다. 신애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갈구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보이는 현실이고 일상이다. 이 현실을 인격화한 존재가 종찬이다. 그는 손님을 끌기 위해 피아노 콩쿠르 상장을 위조하고, 동네 유지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다방 내지에게 질펀한 성적 농담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세속적 기준으로 속물이라 불러도 무방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속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뚫어내는 사랑의 공간은 절망에 빠진 신애를 완전한 파멸에서 지켜주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영화 마지막에 신애가 제 손으로 머리칼을 자를 때 종찬은 가만히 거울을 들어준다. 그때 황량한 땅바닥에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가장 낮고 비루한 곳에 비치는 햇살. 관객은 거울을 들고 있는 이 속물 남자에게서 ‘비밀의 빛’을 찾고 싶은 갈망을 억누를 길 없다.     

   

<밀양>은 하나의 완성된 도덕적 행위로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용서의 어려움, 어쩌면 근원적 불가능성이다. 영화는 용서란 피해자든 가해자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일회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 노력이자 불가능한 실천이라는 것, 따라서 누구도 함부로 미래를 말하고 화해를 종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용서의 반대가 증오와 복수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용서의 다면성과 복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용서는 한 번의 결정으로 종결될 수 있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증오와 용서 사이, 분노와 공감 사이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용서가 증오를, 공감이 분노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알리슨에 따르면, 용서란 “나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나와 같은 인간에게로 향하는 창조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일시적인 제스처나 선언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묵묵히 나아가는, 죽음을 무릅쓴 삶이다.”(『용서라는 고통』 263면에서 재인용) 스티븐 체리는 알리슨의 이 구절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새로운 우리”가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기보다 같은 인간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신이 아닌 인간의 용서는 “달갑지 않는 공감의 과정”을 통해 “가해자의 인간성을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을 열어주는 것”이다.(『용서라는 고통』263-4면) 범죄행위를 ‘묵인’하거나 가해자와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을 받아들이려면 “관대한 신뢰의 모험”이 필요하다. 용서란 인간성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 가해자에게 인간성을 선사하는 ‘증여giving' 행위다. 인간성을 부정한 사람에게 다시 그 인간성을 건네주는 일은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건네는 마음의 증여행위를 통해 인간성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용서가 ‘모험’이자 ‘창조’인 이유다.   

  

이 위험천만한 모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길동무가 필요하다. 영화 <밀양>은 용서의 길로 나아가는 긴 여정에 동행할 친구, 너무 앞서지도 뒤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함께 고통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런 사랑도 있다.” <밀양>의 메인 카피다. 영화가 찾는 구원의 빛은 종찬이 보여주는 “이런 사랑”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 속에서 신애는 스스로의 손으로 머리를 자르고 아들이 떠난 빈 집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