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6

시는 주검 옆에 있어야 한다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는 강물에 떠내려 오는 한 소녀의 시체와 함께 시작한다. 소녀의 시신은 거꾸로 뒤집혀 있어 관객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 얼굴 없는 주검 옆에 영화 제목 ‘시’가 포개진다. 엔딩 장면에서 카메라는 강물로 뛰어내리기 직전 뒤를 돌아보는 소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춘다. 관객은 울음인 듯 웃음인 듯 알 수 없는 표정의 소녀 얼굴을 바라보며 영화 주인공이 쓴 시가 죽은 소녀의 음성으로 낭송되는 것을 듣는다.  

   

<시>는 죽은 이의 얼굴을 만나는 일과 시 쓰는 일의 관계를 질문하는 영화다.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에 대한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 우리는 그것을 얼굴이라 부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얼굴을 만나려면 나는 나의 관념, 상상, 이해를 초과하는 타자의 부름에 나의 책임으로 응답해야 한다. 여기서 윤리가 발생한다. 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장르다. 하지만 미적 관조성을 뒤흔드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할 때 시는 어떻게 씌어져야 하는가? 아름다움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참혹한 현실은 고통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미적 쾌감이 불쾌한 현실을 만나면 어떻게 흔들리고 변용되는가? 아름다움과 윤리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에서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사실 모든 예술이 부딪치는 근원적 물음이기도 하다.         

   

영화는 경기도 어느 소도시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생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66세의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양미자란 이름의 그녀는 이름처럼 예쁜 꽃 좋아하고 시 좋아하는 조금은 속물 끼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중풍 걸린 노인의 간병일을 해서 버는 약간의 돈과 정부의 생활보호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나이 또래의 할머니에겐 어울리지 않는 레이스 달린 꽃무늬 치마와 모자를 갖춰 입고 소녀 같은 말투로 “내가 시인 기질이 좀 있잖니”라고 말한다. 미자가 문화센타의 시쓰기 강좌에 나가는 것 역시 이런 사춘기 소녀의 감상적 문학취향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초반 미자는 병원 대기실에 설치된 TV 화면에서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어머니의 흐느끼는 얼굴을 본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앞마당으로 걸어 나오면서 그녀는 응급차에 실려 온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가 실성한 듯 울부짖는 장면을 목격한다. 미자는 고통에 일그러진 두 얼굴을 보지만 아직 보지 못한다. 그 얼굴들은 아직 미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얼굴들은 미자의 삶과 연루되지 않은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그녀에게 응답을 요청하는 인간적 표정을 지닌 구체적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여학생이 자신의 외손자가 포함된 남학생들의 집단 성폭행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자는 사건에 당사자로 끌려 들어간다. 단순 자살로 묻힐 뻔한 사건은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가 딸의 일기장에 쓰인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사건이 확대되길 바라지 않는 경찰과 학교측은 가해학생 부모들에게 피해자측과 합의를 하라고 종용한다. 가해자 부모들은 “죽은 애도 죽은 애지만 우리 애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가족주의 논리로 위로금 삼천만 원을 건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다. 우리 사회 평균적 도덕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공동체의 도덕은 내 가족의 범주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의 대상에서 배제한다. 그들의 고통은 ‘위로’의 대상일 뿐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구체적 아픔’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고통의 치매에 걸려 있다. 미자가 치매에 걸려 단어를 잊어버리는 언어 상실에 시달리고 있다면 공동체는 아픔을 잊어버린 무통증의 세계에 살고 있다.      

   

미자는 가해자 부모들이 사건처리를 협의하기 위해 모인 첫 모임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혼자 식당 밖으로 나온다. 카메라는 유리창 밖에서 맨드라미꽃을 바라보는 미자의 모습을 비춘다. 유리창 안에서는 폭력을 은폐하는 부도덕이 진행되는 동안 유리창 바깥에서는 미적 감상이 일어나고 있다. 현실의 세계와 아름다움의 세계는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름다움은 부도덕한 현실을 외면하면서 얻어지는 가짜에 머물러있다. 미자가 의사로부터 치매를 판정받는 진료실 유리창 가에 동백꽃 화분이 놓여있다. 미자는 붉은 피를 상징하는 동백꽃이 예쁘다고 말하지만, 곧이어 의사는 그 꽃이 조화라고 일러준다. 미자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은 아직 가짜의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창작 교실의 강사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려면 무엇보다 사물을 잘 봐야 한다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이고, 관심 어린 눈을 통해서만 사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시인은 가르친다. 시 한편 써오라는 숙제를 받고 미자는 사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펴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을 올려다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보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접하고서도 그녀는 아름다운 꽃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는 ‘보는 자’에서 ‘보이는 자’로 바뀐다. 이런 위치전환과 함께 삶이 시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미자는 죽은 여학생 박희진(세레명 아네스)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여 성당 입구에 놓인 희진의 사진을 몰래 가져온다. 사진 속 희진의 얼굴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이 던지는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미자는 성폭행이 일어난 학교 과학 실습실을 직접 방문한다. 실습실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미자가 얼굴을 교실 유리창에 갖다 댔을 때 그의 코는 일그러진다. 미자가 방금 전 학교 앞마당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일그러진 코의 풍경으로 바뀐다. 성폭행 사실을 모르는 척 숨기는 손자에게 그의 잔인한 행동을 환기시키기 위해 미자는 식탁 위에 성당에서 가져온 희진의 사진을 올려놓지만, 손자는 눈앞에 놓인 사진 속 얼굴을 끝내 외면한다. 미자는 이불 속으로 뻔뻔스럽게 숨어버리는 손자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으며 고통에 신음한다. 합의를 부탁하러 찾아간 희진의 집 마루 벽에 걸린 낡은 액자에서 미자는 다시 한 번 희진의 얼굴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아직 미자는 희진의 얼굴이 던지는 시선에 충분히 노출되지 못했다. 미자는 희진 엄마를 만나러 가는 도중 길바닥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시작 노트에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어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라고 적는다. 미자는 밭에서 일하는 시골아낙을 만나 살구에 그런 간절함이 있는 줄 평생 처음 알았다고 이야기하며 자기도취에 빠진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살구의 아름다움을 설파한 그 여인이 희진 엄마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누구보다 심하게 깨어지고 짓밟힌 사람 앞에서 살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자신의 언어가 위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의 옷이 희진 엄마의 허름한 몸빼 바지 앞에서 부조화를 일으키듯. 이 위선과 부조화가 미자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미자가 보는 자에서 보이는 자로 위치 전환이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은 부동산 중개소에서 가해 학생 부모들이 희진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들의 숨은 동기는 폭력의 진실을 자식들의 안전과 바꿔치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를 위로금이라는 물질로 은폐한다. 그러나 미자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희진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다. 카메라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는 미자를 유리창 너머에서 희진 엄마가 말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길게 비춘다. 앞서 미자는 부도덕한 현실공간에서 뛰쳐나와 맨드라미꽃을 감상했지만, 이제 더는 아름다움 속으로 숨을 수가 없다. 희진 엄마의 얼굴이 더 이상의 은폐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취약한 부분이 드러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시선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다. 주체는 보여 지지만 아직 보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실반 톰킨스는 자아가 얼굴을 인식하는 것이 수치의 경험에서 핵심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굴은 자아와 타자가 서로를 구성하고 변형시키는 만남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미자의 얼굴은 희진 엄마의 얼굴을 만나 붉은 색으로 물든다. 그가 온 몸으로 수치심을 느끼는 이 순간 공동체의 도덕적 합의를 초과하는 주체의 윤리가 출현한다.    

    

미자가 이 수치심을 느끼기 전 통과해야 하는 결정적 관문이 있다. 그것은 희진이 자살을 결행하기 전 마지막 순간을 체험하는 일이다. 미자는 가해학생 부모들로부터 합의금 5백만원을 내라는 압박에 시달리던 어느 날 희진이 강물에 투신했던 곳을 직접 찾아간다. 미자가 콘크리트 다리 위에서 검은 물살을 내려다 볼 때 그가 쓰고 있던 모자가 꽃잎처럼 바람에 날려 강물에 떨어진다. 이 순간 미자의 얼굴에 고통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간다. 미자가 다리에서 내려와 강변을 거닐 때 거센 바람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린다. 그가 떠오르는 시상을 적으려고 시작 노트를 펼치는 순간 빗방울이 노트에 떨어진다. 시는 한 줄도 쓰이지 못하고 노트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다리에서 떨어진 희진의 몸이 강물에 파문을 일으키듯 노트엔 빗방울이 스며든다. 영화에서 가장 시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시가 고통의 현실을 언어화하기 전 견뎌야 하는 추락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이미지화한다.  

  

이 추락과 침묵의 시간을 홀로 견디며 미자는 반신불구의 강 노인에게 몸을 내주는 수모를 자청한다. 그건 희진의 죽음에 연루된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떠맡는 책임이자 속죄의식이다. 하지만 외손자를 대신해서 치르는 이 속죄행위가 한 개체적 존재로서 가해자 본인의 책임을 면죄시켜 주는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다. 청소년 성폭행 사건의 경우 고발이 접수되지 않으면 기소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미자는 외손자를 경찰에 넘겨주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종반부에 미자는 종욱과 배드민턴을 친다.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려 미자가 그걸 쳐 내리려고 할 때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심판의 느낌을 주는 이 부감숏을 통해 외손자 종욱이 형사들에게 걸어가고 종욱 대신 형사 박상태가 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이 비친다. 일그러진 얼굴 표정의 미자가 박상태와 미친 듯이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을 때에만 타인의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시낭송 장면이 이어진다. 시 창작 교실 수강생 중 시를 쓴 사람은 미자 한 사람 밖에 없다. 미자가 꽃다발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시 ‘아네스의 노래’가 처음엔 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엔 미자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희진의 목소리를 통해 낭송된다. 이 목소리의 이동은 가해자와 관찰자가 피해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피해자가 자신의 육성으로 고통을 말하게 하기 위해 도입된 영화장치다. 목소리를 바꿔 가며 시가 낭송되는 순간 카메라는 텅 빈 집의 내부, 아이들이 훌라후프를 돌리며 노는 아파트 앞 공터 등 일상적 풍경을 비추다가 희진이 뛰어내렸던 콘크리트 다리 위로 옮겨간다. 카메라는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 희진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한다. 영화 초반에 가려졌던 희진의 얼굴은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관객인 우리가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 묻는 것 같다. 울음인 듯 웃음인 듯 희미한 미소를 띤 그 애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애가 사라져간 강물을 볼 수 있는가? 그 거센 물살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미자는 희진의 얼굴이 던지는 시선에 죽음으로 응답했다. 그가 시 창작 수업의 숙제로 써낸 <아네스의 노래>는 죽음으로 응답한 시다. 그것은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져야하는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에 온 몸으로 공명할 때 얻어지는 시다. 그 시가 아름답다면 그것은 참혹한 아름다움이다. 시는 주검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