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1

죄책감의 윤리, 소설의 윤리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때로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의 결과로 타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꼭 상대를 해치려는 사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판단의 오류였을 수도 무심한 실수였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약간의 질투와 편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잘못으로 타인의 삶은 한없이 추락한다. 시간이 흘러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언 매큐언의 『속죄』(한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3)는 한순간 저지른 잘못에 대해 평생에 걸쳐 치르는 속죄를 다룬 소설이다. 속죄란 무거운 말이다. 종교적 색채를 짙게 풍긴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후회할 수도 상대에게 사과할 수도 있다. 후회는 혼자서 하는 일이고 사과는 타인에게 하는 일이다. 속죄 역시 상대에게 하는 일이지만 사과보다 더 깊은 마음의 작업이 요구된다.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해줘’. 이 세 마디 말은 잘못을 비는 세 가지 윤리적 태도를 가리킨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그 끝에 상대로부터 ‘풀려남’을 허락받는다. 속죄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요구되지만, 긴 시간에 걸친 고통이 뒤따른다. 용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을 마무리하면서 질 스콧은 “용서가 간단히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고 토로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용서란 피해자가 “불가역성의 곤경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자신의 도덕성, 자존감, 원칙,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수행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속죄도 용서만큼이나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한평생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토록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 『속죄』의 주인공 브리오니 탈리스는 작가를 꿈꾸는 열세 살 소녀다. 아직 제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영국 상류층이 마지막으로 좋은 시절을 보내던 1935년, 탈리스 가문의 대저택이 작품의 배경이다. 방학을 맞아 대학에서 돌아온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는 어린 시절의 소꿉동무이자 탈리스가의 가정부 아들인 로비 터너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해 감정의 혼란에 빠져있던 데다 성적 긴장이 둘의 관계를 묘하게 뒤틀어 놓는다. 주인집 딸과 가정부의 아들이라는 계급적 차이도 이 사랑의 보이지 않는 방해세력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감정이 폭발한 세실리아는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정원 분수대로 뛰어들고, 2층 창가에서 브리오니가 그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보낸 성적 암시가 짙게 밴 편지를 읽게 되고 서재에서 두 사람의 격렬한 키스장면을 본다. 그날 밤 실종된 사촌 동생들을 찾으러 나간 사촌언니 롤라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브리오니는 현장에서 누군가 급히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흘낏 보지만,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경찰조사에서 그는 범인을 로비라고 지목한다. 실상 범인은 그날 탈리스가를 방문한 오빠의 친구 마셜이었지만. 롤라와 마셜의 거짓 침묵과 브리오니의 위증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 중이던 전도유망한 청년 로비와 그를 사랑하던 명문 여대생 세실리아의 인생은 급전직하한다. 로비는 강간범으로 기소되어 감방에 수감되고 세실리아는 집을 떠난다. 강간혐의로 복역 중이던 로비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전선으로 징집된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이 일으킨 아비규환과 폭격의 공포, 절망에 빠진 아군 병사들이 저지르는 집단 폭력을 경험한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으로 소개한 1, 2부 스토리다.

  

3부는 브리오니가 전쟁 부상병을 돌보는 수련 간호사가 되어 속죄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린다.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롤라는 이 모든 비극을 몰고 온 강간범 마셜과 결혼식을 올리고, 브리오니는 언니를 찾아가 진실을 고백한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하숙집에서 뜻밖에 로비와 마주치고, 자신의 거짓말도 참혹한 전쟁도 두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지 못했음을 보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는 늦었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로비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술서를 작성하기로 약속한다. 

  

이제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연인들은 세상이 갈라놓은 사랑을 회복한 것일까? “돌아와. 그냥 악몽일 뿐이야.” 어린 시절 악몽에 시달리던 브리오니를 깨우며 언니가 한 말처럼, 과거는 돌아올 수 있을까?  소설은 이 행복한 예측을 배반한다. “1999년 런던”이라는 제목의 소설 종결부는 소설가로 성공한 브리오니의 서술로  되어있는데, 혈관성 치매로 기억 상실에 시달리는 77세의 브리오니는 3부까지의 내용은 자신이 쓴 소설이고, 로비는 세실리아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1940년 6월 패혈증으로 죽었고 세실리아 역시 같은 해 밸엄 지하철 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3부의 행복한 결말은 소설가 브리오니가 지어낸 허구였던 것이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77세 생일날 호텔로 변한 탈리스가의 옛 저택을 방문하여 열세 살 때 자신이 쓴 희곡을 친척 손자들이 무대에 올리는 것을 바라보며, 왜 자신이 소설 속에 언니와 로비를 살려놓았는지 고백한다.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521쪽)


브리오니가 냉혹한 사실주의를 포기하면서 연인에게 행복한 결합을 선사한 것은 용서받으려는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건네주는 마음의 선물이지만 피해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를 용서해줄 수 있는가. 더욱이 로비는 죄라는 관념조차 떨어져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로 변한 잔혹한 전쟁터에서 인간의 바닥을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세실리아의 삶을 망가뜨린 브리오니의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브리오니가 자신을 강간범으로 지목했을 때, 그는 “그 충동, 일시적인 악의, 사춘기 소녀의 파괴적인 감정, 이런 것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그 애가 품은 악의가 끝까지 거짓주장을 고수하며 마침내 그를 완즈워스 감옥으로 보낼 만큼 큰 것이었나 하는 점이었다.”(329-330쪽) 이런 생각 끝에 로비는 다짐한다. “나는 그 애를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애에게 진 빚을 두고두고 되갚아 줄 수 있는 길이니까.” (330쪽) 로비의 이 발언은 브리오니가 쓴 소설 3부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이 쓴 소설에서 브리오니는 가해자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브리오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자의 도덕적 무게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도망갈 문이 없는 방 안에 갇혀 사는 것, 바로 그것”(404쪽)이라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용서의 이기심마저 거부하는 브리오니의 속죄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도피나 면죄부가 아닌 속죄가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과오의 인정이 속죄의 선결조건이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나? 브리오니는 자신의 거짓말이 초래한 파국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문제의 사건을 소설로 쓰려고 한다. 브리오니가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자기처벌 행위였다. 로비가 총알이 난무하는 전선으로 나갔다면 브리오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쟁을 치렀다. 전쟁에서 파괴당한 군인들이 몰려드는 부상병원에서 브리오니는 “인간은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파괴한 한 인생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 소설쓰기는 과거를 다시 쓰려는, 아니 과거의 잘못을 직시함으로써 과거를 원상으로 돌려놓으려는 그의 욕망이 투영된 속죄행위다. 속죄의 윤리와 소설의 윤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3부에서 브리오니는 그해 여름 오후의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중편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을 써서 문학잡지에 투고한다. 소설을 쓸 당시 브리오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설형식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 수법이라고 알려진 모더니즘 기법이다. 브리오니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의식의 흐름, 그 강물의 흐름과 갑자기 한데 모여 잔잔한 강에 동요를 일으키는 지류, 그리고 강물의 방향을 바꾸게 될 예기치 않은 장애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바람이었다.”(304)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이 짙게 깔린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그날 오후의 사건을 서술한다. 하지만 브리오니의 기대와 달리 편집자는 거절편지를 보낸다. 편집자는 인간의 마음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이 소설에 충분히 매료되었으면서도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다고 말한다. 작품은 세실리아와 로비가 분수대에서 벌인 사건을 소설로 쓰고 있는데, 동일 장면을 세 명의 다른 시점(창가에서 이를 바라보는 소녀 화자와 두 남녀 주인공)으로 서술하고 있다. 소설은 일상적 사물의 모습과 그에 대한 느낌을 길게 서술할 뿐, 화자인 소녀가 분수대 장면에 보이는 태도가 두 연인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그리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사건에 대한 주관적 인상을 넘어 사건 자체를 이야기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 즉 “이야기라는 척추”가 빠진 것이 작품의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이다.  

   

편집자의 편지를 반추하면서 브리오니는 자신의 소설쓰기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깨닫는다. 그녀가 과거의 사건을 소설로 쓰기로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서인데, 소설은 바로 그 잘못을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면해야 할 것을 회피했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 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도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449쪽)


브리오니의 속죄는 자기 인생의 척추를 대면하고 그것을 글쓰기 속에 온전히 복원해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는 1940년 1월 첫 원고를 쓴 다음 1999년 3월 마지막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여섯 개의 원고를 쓰면서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소설쓰기를 시도해왔다. 앞서 3부까지의 이야기는 그가 마지막으로 쓴 원고다. 이 원고를 탈고하면서 77세의 브리오니는 지난 59년간 자신을 괴롭혀왔던 숙제가 이제 끝났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극히 건조하고 분명한 사실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가, 롤라와 마셜과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518쪽) 범죄의 피해자들은 오래 전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가해자 세 사람은 살아있고, 그중 두 사람은 진실을 은폐하며 얻은 대가로 세속적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다. 소설이 출판되어 64년 전 저지른 범죄가 밝혀지면 관련자들은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법적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도 크다.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 안전해지려면 허구라는 장치 뒤에 숨어 모호하게 글을 쓰면 된다. 그러나 브리오니는 모호성으로의 도피라는 유혹을 견뎌 내고, “아무것도, 이름과 장소와 정확한 정황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료를 편찬하듯 그 모든 것을 원고 속에 집어넣었다.” (518쪽) 브리오니는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범죄’로 명명하고, 범죄를 저지른 주체의 ‘실명’을 하나하나 적시한다. 추상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단독적 개체(우리가 아닌 “롤라와 마셜과 내가”)로서 각자가 져야 책임의 몫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여섯 번의 시도 끝에 최종적으로 내놓은 소설(3부까지의 이야기)에서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무엇이라 보는가? 그가 평생에 걸친 노력 끝에 찾아낸 답은 소설가적 상상력이 안고 있는 위험과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소설가를 꿈꾸던 13살의 브리오니는 작가란 모든 것을 알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다. 소설가란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마음속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사건을 하나의 일관된 플롯 속으로 통합시키는 존재다. 그러려면 전지전능한 신처럼 인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그들을 이야기라는 질서정연한 틀 속으로 통제해 들여야 한다. 질서에 대한 애착, 지배와 통제에 대한 욕구, 타인의 삶을 자신의 도덕성 실현 수단으로 보는 나르시시즘, 소설가는 이런 위험을 안고 있는 존재다. 그 위험이 브리오니로 하여금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따라서 속죄가 일어나려면 그 위험을 인지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의 한 대목에서 소설가가 된 어른 브리오니는 소설이 지녀할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이나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66~67쪽)


소설은 타인의 삶에 폭력을 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공감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율적 인격을 지닌 개인이라는 관념만으로는 민주주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에서 타인의 자율성에 대한 인정과 그들과의 공감 능력 획득이 근대 인권 개념의 발명과 민주주의 정치제제의 수립에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눈 밝은 한 역사학자의 눈을 통해 공감의 장르인 소설이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에 기여한 역할을 배운다. 그러나 공감의 윤리를 실천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설이 지닌 위험성을 저지할 수 있는 내적 힘이다. 브리오니가 소설가적 상상력이 타인의 삶에 폭력을 저지른 원인이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바로 그 소설을 통해 속죄를 하려면, 새로운 소설문법과 윤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더욱이 브리오니가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죽은 언니와 로비를 다시 살려내 행복한 사랑을 선사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절대적 권력자로서 소설가의 권능을 다시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죄를 저지른 원인 그 자체로부터는 단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브리오니가 소설가로서 부딪친 물음이다.  


지난 50년간 나를 괴롭혀 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항상 불가능한 작업이었고, 이게 바로 핵심이다. 시도가 다였다. (521쪽, 번역은 필자가 부분 수정한 것임)   

         

소설가 스스로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와 조건’을 정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윤리이고 속죄의 윤리다. 물론 그 작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 “시도가 다였다”고 한계를 고백하면서도 시도를 멈추지 않는 정신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뻔뻔스럽게 부인하는 롤라와 마셜 같은 인간들이 활개치는 곳이다.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범법자로 만드는 일이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곳이 한국사회였다. 그 사건을 고발한 영화가 천만이 넘는 관객들을 끌어당기고 있지만, 가해자였던 사람들은 지금도 입을 다물고 있거나 사실을 적극 부인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작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단편 제목이다. 부끄러움이 실종된 사회에서 매큐언의 소설은 죄책감의 윤리가 도달한 한 정신의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내 마음을 움직인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