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6

기억의 소멸에 맞서는 사랑의 윤리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기억이 하나둘 꺼져 마침내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치매가 아내에게 덮쳐오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는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하고, 그 사랑을 위해 그녀 곁을 떠나야 한다. 오랜 세월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공유했던 사람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배반을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이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가 ‘모르는 사람’이 되는 일, 노화라는 자연의 명령 앞에서 ‘망각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 인생에서 이보다 더 쓸쓸한 일이 있을까. 시간을 이기는 자는 없다. 죽음이라는 절대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는 이 싸움에서 인간이 빼앗은 작은 전리품이 기억이다. 인간은 기억 속에서만은 무지막지한 시간의 힘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들과 맺은 관계의 침전물이라면, 이 관계의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원천이다. 시간의 풍화작용을 겪으면서도 의식의 지층 깊숙이 묻혀있는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시간과 벌인 전투에 참전한 전우戰友다. 그런 사람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생의 전장에서 패잔병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찌 쓸쓸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숙명을 거역할 수 없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사랑을 통해 기억의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랑은 기억의 소멸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다. 이 무기가 있는 한 인간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패자가 아니다. 사랑은 관능에 들뜬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랑은 생의 마지막 고비에 접어든 인간이 늙고 병들어가는 자신의 육체와 맞서 싸우며 힘겹게 피워낸 윤리적 결실이기도 하다. 노년의 사랑에는 젊음의 사랑에 존재하는 힘찬 박동 소리가 약해져 있지만, 생의 오욕과 인간의 한계를 겪어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캐나다 여성작가 앨리스 먼로의 중편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기억의 소멸에 맞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 그랜트는 대학 재직시절 북유럽 신화와 전설을 전공한 꽤 저명한 문학 교수였지만 현재는 학교에서 물러나 아내 피오나와 한적한 시골집에서 살고 있다. 그가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은 여학생들과 모종의 추문에 휘말려 사퇴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은퇴하여 시골에 물러나 있지만, 한때 그에게도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자기 것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랜트는 아이슬란드 송시 〈호푸오라우슨〉에 등장하는 위대한 영웅 에릭 브러드엑스 왕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로 “존재의 막대한 풍요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 시의 한 구절을 몰래 읊조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지혜와 힘이 모두 성장한 / 그는 신과 인간의 사랑을 함께 받았노라”(410쪽) 그랜트 자신은 이 불경스러운 구절에 당황하여 미신적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했지만, 작가는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판단을 내려줌으로써 그의 자신감에 근거가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시절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린다. 그가 불륜을 저질렀던 여학생에게 결별을 선언하자 그녀가 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했고, 대학 내 권력싸움에 골몰했던 동료들은 그를 난봉꾼으로 몰아 학교에서 쫓아내는 데 일조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골치 아픈 대학생활로부터 그를 빼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학교를 불명예스럽게 떠난 일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의식을 짓누르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사귀던 여학생이 자살 위협을 하고 모두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아내 피오나는 이 힘든 시절을 그와 함께 건너왔다. 광풍이 지나간 후 그랜트는 피오나에게 돌아갔고, 피오나는 그런 그를 받아주었다.

그런 아내가 1년 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피오나는 야채 냄비에 불을 켜거나 커피 메이커에 물 붓는 것을 깜박한다. 해야 할 일을 챙기기 위해 찬장에 하루 일과를 빼곡히 기록한 노란색 메모지를 붙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다소간 불편을 감수하면 수습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피오나가 시내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경찰을 불러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일이 있고난 후 피오나는 말을 꺼낸다. “나에게 해줄 일이 있는 거 알죠? 그렇죠? 이제 나를 거기 데려다주어야 해요”(397쪽) ‘거기’란 치매 요양원 메도레이크를 가리킨다. 피오나는 그랜트의 불편을 덜어주고 자신의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은 그랜트가 마지못해 피오나를 메도레이크에 데려다주러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메도레이크로 가는 차 속에서 그랜트는 눈 쌓인 늪에서 피오나와 함께 스키를 타며 들었던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를 기억한다. 상류 인텔리 집안 출신의 피오나가 하층계급 출신의 자신에게 청혼을 했을 때 그녀에게서 보았던 “삶의 불꽃”, 다른 여자들에겐 없고 오직 그녀만이 갖고 있던 그 “장난기 어린 우아함”, 나이 들어서도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유지하는” 예외적 여성다움, 이 모든 것들이 그랜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더욱이 피오나가 그의 불륜을 견뎌주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탕아처럼 돌아온 그를 받아주었던 일은 깊은 죄책감과 함께 묘한 애틋함으로 남아있다. 요컨대 그들 사이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부부만이 공유하는 기억들이 있다. 물론 그 기억 속에는 익숙한 옷이 주는 편안함만이 아니라 외투 주머니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옷핀처럼 살을 찌르는 아픔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든 미움이든 피오나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기억의 공동소유자다. 그런 아내를 요양원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380쪽)

요양원에는 입소 후 첫 한 달 동안 가족들의 면회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다. 입소자가 새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아내를 보지 못하는 그 시간이 그랜트의 일생에서 “가장 긴 한 달이었다”(382쪽). 그러나 한 달 뒤 그는 더 끔찍한 일에 직면한다. 그 사이 아내는 요양원에서 만난 다른 남자를 보살피는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오나는 오브리라는 이름의 멍청해 보이는 남자 옆에 다정하게 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 그랜트는 이 낯선 상황을 견디기 어렵지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멀찍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오래된 부부처럼 온실의 열대 식물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함박웃음을 짓는 소리를 듣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가 온실 안으로 뛰어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제심을 발휘해야 했다. 피오나가 다른 남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동안 그는 피오나와 50년을 살아온 남편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하는 손님”(396쪽)으로 전락한다. 요양원 간호사로부터 오브리와 피오나의 관계는 치매 환자들 사이에 종종 나타나는 애착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듣지만, 이성적 이해 아래에서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배신감을 억누를 수는 없다. 급기야 오브리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는 질투심에 몸을 떤다. 아무리 치매를 앓고 있다 해도 ‘내’ 아내에게 감히 ‘여보’라는 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는 온실 분수대 바닥에 던져진 동전을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노년의 그랜트는 젊은 시절 아내에게 주었던 배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돌려받아야 하는 인생의 역설에 직면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러나 곧 이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오브리의 아내가 남편을 집으로 데려가자 피오나가 깊은 상실감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것이다. 요양원에 들른 그랜트는 피오나의 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다. 오브리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자 피오나가 그를 달래며 말한다. “자, 가만, 여보. 괜찮아요. 우리는 계속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그럴 거예요. 나도 당신을 만나러 갈 테고, 당신도 나를 만나러 오면 돼요”(413쪽). 아내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사랑의 말을 건네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괴롭다. 작가는 “그 방을 나오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413쪽)는 말로 그의 아픔을 무심하게 전하지만, 그날 그랜트는 피오나를 다시 만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를 다시 만날 때 서운한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감정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발생한다. 오브리가 떠난 뒤 피오나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피오나는 식사를 거부하고 침대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지도 않은 채 흐느껴 울기만 한다. 담당 의사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그녀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 말한다. 결국 그랜트는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가 나서서 아내의 애인 오브리를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오브리의 집을 찾아간 그랜트는 그의 아내에게 말한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슬픔에 사로잡히죠. 사실 제 아내 피오나가 지금 그래요”(422쪽). 그랜트는 낯선 여인에게 아내가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고, 그 남자가 바로 당신 남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고백 끝에 그랜트는 당신 남편을 내 아내에게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오브리의 아내 메어리언은 남편을 다시 요양원에 보낼 돈이 없기 때문에 집에서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 부탁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랜트가 집으로 돌아와 확인한 전화응답기에는 은근한 유혹의 암시가 담긴 메어리언의 음성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다. 자신과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는 메어리언의 메시지를 들은 후 그랜트는 생각한다. “이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승리를 예상할 수 있는 도전. 그러나 이건 또한 누구에게도 고백 못 할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433쪽). 그의 예상처럼 그랜트는 메어리언의 마음을 바꿔 오브리를 요양원으로 데려오는 일에 성공한다. 작품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지만, 모종의 육체적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영화에서는 이들 사이의 섹스장면을 직접 보여준다). 이는 명백히 거래다. 그러나 작가는 두 사람의 거래를 부정한 일로 매도하지 않는다. 

오브리의 아내 메어리언에겐 삶의 고난을 온몸으로 겪어낸 계층의 여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단단함이 있다. 그녀는 “유혹적인 과육” 안에 “계산적인 씨앗”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자질은 상류 인텔리 집안 출신의 피오나에게선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랜트가 피오나와 사는 일은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메어리언에게는 “커다란 씨를 덮은 얇은 과육의, 기이하게도 인공적인 유혹이며 화학적인 맛과 향에 이끌려 한입 성큼 깨물었다가 돌 같은 씨를 만나 주춤하게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삶의 진실을 직시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들을 몽상할 자유가 있는”(429쪽) 사람들이 그녀의 이런 계산적 단단함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으로 메어리언은 힘겨운 삶을 버텨왔고, 가족을 건사하며 남편을 보살피는 아내의 도리를 성실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만일 피오나를 만나는 행운이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메어리언 같은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그의 삶도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메어리언을 만나면서 그랜트는 자신의 오만을 다시 한 번 내려놓는다. 그들의 육체적 교류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이 나누는 쓸쓸한 공감이자, 의식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배우자의 삶을 지켜주려는 절박한 선택이다. 작가는 이들의 관계를 깊고 서늘한 시선으로 응원한다.   

그랜트는 소중한 선물을 주듯 오브리를 아내에게 데려다준다. 그런데, ‘나의’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기억을 되찾은 것이다. 오브리를 요양원에 다시 데리고 간 날 기억이 돌아온 피오나는 실로 오랜만에 남편 그랜트를 알아보고 가슴에 감싸 안는다. 물속에 오래 담가둔 꽃줄기에서 나는 것 같은 살 냄새를 풍기며.  

“당신이 와서 기뻐요.” 그의 귓불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요. 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버려두고 간 줄 알았죠. 버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그녀가 말했다. 
그랜트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분홍빛 속살, 사랑스러운 두상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 적은 없어. 단 일 분도.” 그가 대답했다. (436-7쪽) 

작품의 마지막 대목이다. 여기엔 이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되찾을 수 있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이 곧 사라질 거라고 슬퍼하지는 말자. 어차피 시간 앞에서 인간은 패배자다. 그러나 ‘순간’을 ‘영원’으로 탈취해내는 기술이 있는 한 완전한 패배는 아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빼앗은 이 기술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의 사랑을 선사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기예技藝다. 이 기예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음의 오만과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삶과 사랑을 끌어안을 수 있는 지혜로운 노인만이 획득할 수 있다. (이 기예를 습득한 노인이 드물다는 것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지혜와는 거리가 먼 맹목적 아집의 인간은 현실에서 너무도 자주 목격하는 노년의 모습이다.) 


젊음이 예찬되는 나라에서 노인이 설 자리는 없다. 예이츠의 시 구절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이곳은 모두가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지성의 기념비를 소홀히 하는” 곳이다. 그러나 겨울나무의 지혜를 터득한 노인이 이 속화된 세계에 줄 수 있는 선물은 있다. 겨울나무는 여름날 무성했던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추운 바람에 흔들리지만 자연의 순환을 묵묵히 견뎌낸다. 육체의 소멸을 홀로 감내하면서 타자를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함, 겨울나무의 지혜를 터득한 노인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의 주인공 그랜트는 사랑하는 이의 기억이 소멸하는 과정을 온전히 견디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켜낸다. 우리는 그에게서 겨울나무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본다. 작품의 배경인 캐나다 온타리오 지방의 눈 덮인 겨울 숲과 호수는 그랜트의 내면을 드러내는 자연의 은유다. 그랜트가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고 난 뒤 노을이 타는 저녁 무렵 집 뒤 얼어붙은 들판에서 홀로 스키를 타는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작은 쇳조각에 몸을 맡긴 채 고요히 움직이는 그는 자연의 풍경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특히 영화에서 인상적인데, 소설은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한다. “해가 져 들판 위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고 얼음 들판의 파르스름한 지평선이 그 하늘과 맞닿을 때까지 그는 집 뒤쪽의 들판을 돌고 또 돌았다”(385쪽)

「곰이 산을 넘어오다」의 작가 앨리스 먼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날개에 실린 먼로의 모습은 지혜롭게 늙어가는 할머니 같다. 백발을 휘날리며 수줍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생의 비의를 들여다본 사람만이 터득한 서늘한 여유가 느껴진다. 먼로는 목청 높여 윤리와 도덕을 외치지 않으면서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슬기롭게 건너가는 한 인간을 우리 앞에서 선사한다. 기억의 소멸에 맞서 사랑의 윤리를 지켜낸 그에게서 우리는 인간이 도달한 한 높이를 본다. 책을 덮으며 우리는 흐트러진 옷깃을 다시 여미고 인간의 품위를 생각하게 된다.           

* 이 중편소설은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서정은 옮김, 뿔, 2007)에 들어있다. 이 소설은 2006년 사라 폴리 감독이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국내에서도 개봉되어 중장년층 사이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앨리스 먼로는 2014년 단편소설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