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은 얼마나 떳떳하냐”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력한 두 개의 패러다임이 있다. 그중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프로이트가 발전시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이다. 프로이트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오이디푸스’에서 찾아낸 아들의 형상은 어머니를 향한 욕망을 가로막는 아버지에게 살인의 위협으로 맞서는 자다. 물론 어머니를 갖고 싶은 욕망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욕망도 의식 아래 저 어딘가에서 일어나야 한다. 두 욕망 모두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 문명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살부殺父에 성공한 아들은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그 질서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다시 아들의 위협 앞에 선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부계 계승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질서는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표준을 따르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 프로이트는 낙오자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그의 눈에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은 뚜렷하지 않을 뿐 아니라(어떤 점에서 우리는 모두 비정상이다), 무엇보다 정상은 비정상으로 분류된 것들의 억압과 희생 위에 서있는 위태로운 구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아버지들은 잠재적으로 불안에 시달리는 강박증 환자다. 


아버지의 불안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부자관계는 구약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이다.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에 얻은 귀한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는다(나치의 손에 유대인들이 당한 희생을 가리키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산 생명을 구워 신의 제단에 바치는 이 번제燔祭 의식에서 생겨났다). 번민 끝에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아들의 몸을 밧줄로 묶는다. 히브리어로 ‘묶다’는 뜻을 지닌 ‘아케다’aqedah는 아브라함의 결박행위를 가리킨다. 창세기는 이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창세기 22장 18절). 인간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시키는 결심을 한 대가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위치를 인정받고 한 민족의 시조가 되는 권능을 부여받는다. 그는 아버지이기를 포기함으로써 아버지가 된다. 이로써 아버지의 무능은 능력의 원천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미수에 그친 이 존속살인은 부성父性의 한가운데 놓인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는 모순이다.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만들어주는 바로 그 물리적 증거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혈연을 희생시킴으로써 ‘상징적 부성’을 얻고, 그의 권력은 ‘사회적’ 힘을 획득한다. 히브리어 ‘아케다’는 이 모순을 압축하고 있는 낱말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제물로 ‘묶는’ 대가로 절대자 아버지의 권능에 ‘묶이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질서는 이 희생의 ‘결박’ 위에 서 있다. 가부장적 승계질서는 모순의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다.

  

서양문학에는 불길 속으로 타들어 간 희생자 아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이사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인간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트로이전쟁에서 프리엄 왕은 아들 헥토르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스웰의 시에는 “불길 속으로 타들어 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20세기 들어 ‘불타는 아들’의 이미지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기록한 어느 아버지의 꿈에 다시 등장한다. 아들의 시신이 놓인 옆방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아버지는 꿈속에서 아들의 외침을 듣는다. “아버지, 내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잠에서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의 불타는 몸을 본다. 침대 옆에 세워둔 촛불이 아들의 시신에 옮겨붙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꿈과 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다. 소망충족이라는 꿈의 목적을 위반하며 등장한 이 꿈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아버지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말해준다. 꿈 속 아들의 힐난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아버지는 죄책감에 짓눌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희생당하는 아들’과 ‘잠 못 드는 아버지’는 비단 서양문학에만 등장하는 커플이 아니다. 근자에 개봉되어 6백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이 문화적 판타지를 한국적 맥락에서 훌륭하게 재가동하고 있다.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지는 부자 삼대의 이야기보다 한국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는 소재가 있을까. 오이디푸스와 아브라함을 동시에 불러내는 이 기묘한 부자관계는 역사적 사실의 지원을 받으며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어떤 주제가 바이러스처럼 계속해서 복제 증식한다는 것은 협소한 역사적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간 보편의 주제와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무릇 뛰어난 작품은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보편적 문제를 건드리면서 그것을 당대적 맥락 속에 새롭게 기입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사도〉는 풍속의 재현이나 희극적 이완이라는 우회로를 경유하지 않고 부자갈등의 비극 속으로 곧장 직진한다. 영화는 긴장의 이완을 요구하는 관객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이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에 이르는 그 8일의 시간, 그리고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부자갈등의 궤적에 오롯이 집중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포스터에 실린 한 문장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시작되다”는 이 영화가 취하는 접근법을 정확히 지시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부자관계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왕위승계라는 권력질서와 깊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아들의 한 아버지가 아니라 만인의 아버지가 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만 백성의 아버지가 되려면 적통의 자손이라는 합법적 계보 위에 군왕으로서 합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영조는 적통이라는 확실한 신원보증을 갖지 못했다. 남은 길은 왕으로서 능력을 갖추는 일뿐이었다. 이는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는 온 힘을 다해 그 일에 매진했다. 





영조는 천한 무수리 출신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신분 결핍에 시달렸다. 거기에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도덕적 의혹이 덧붙여졌다. 이인좌의 역모는 정통성의 위협과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영조가 안고 있는 이 치명적 결핍과 불안은 그를 강박증으로 몰아넣었다. 강박증은 기존 질서가 정해준 기준에 자신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려는 행동패턴을 갖고 있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켜 훌륭한 왕이 되게 할 수도 있지만,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어긋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독단성을 낳기도 한다. 나쁜 소리를 들으면 물로 귀를 씻고 문지방을 지날 때는 이상한 걸음으로 뛰어넘는 그의 미신적 행동은 스스로 만든 기준에 갇혀버린 불안한 영혼의 증상이다. ‘공부’와 ‘예법’에 대한 영조의 집착은 불안이 빚어낸 강박이다. 그가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아버지가 되었던 것은 자기 불안을 아들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자에게 가하는 끝없는 ‘지적질’은 이 불안이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잘하자. 자식이 잘해야 애비가 산다.” 부자 사이가 아직 결정적으로 벌어지지 않았던 시절 영조가 세자에게 한 말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 자식은 아버지가 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이 말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잘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 아비를 살리지 못하는 아들은 용납할 수 없다는 무언의 경고가 그 뒷자리에 놓여있다. 영조와 사도의 관계는 ‘무언의 내침’이 ‘인간적 모멸’로, ‘가학적 공격’으로, 그리고 마침내 ‘뒤주 속 죽음’이라는 결말로 치닫는 과정을 밟고 있다. “네 존재 자체가 역모야.” 임금 아버지가 세자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발언이다. 왕조시대 역모란 말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금기어 중의 금기어이다. 그러나 이 금기어는 말해졌다.   




영조는 세자 나이 15살에 대리청정을 실시한 다음에도 세 번이나 더 양위선언을 했다. 봉건시대 건강한 왕의 양위선언은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정국 전환용 카드였다. 왕이 양위를 선언하면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 한다. 특히 세자는 석고대죄를 하고 왕의 선언을 번복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불충으로 간주되어 어떤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 영화는 권력을 흥정하는 영조의 기괴한 행동과 그럴 때마다 세자가 겪는 극심한 심적 불안과 고통을 화면 속에 옮겨놓는다. 장대비를 맞으며 휘령전 앞에 부복해 있다 급기야 혼절하고 마는 세자의 모습이 거친 빗소리의 효과음을 배경으로 화면 가득 잡힌다.

  

뒤주 속 죽음이라는 파국적 결말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세자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연기演技해왔다. 그는 무덤을 만들어 놓고 관 속으로 들어가 백안白眼의 광대와 비구니에게 장송곡을 부르게 했다. 눈동자 없는 광대는 스스로 눈을 찔러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려는 세자의 유폐된 마음이 불러낸 인물이다. 그가 연주하는 광란의 장송곡은 억눌린 이승의 삶에서 해방된 세계로 넘어가려는 세자의 욕망을 대리 표현한다. 세자는 죽음의 연기를 통해 죽음 같은 삶을 견디고 있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나라의 세자가 광대와 비구니와 어울린다는 것은 지배 이념을 거스르는 불온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필요했다. 공부보다는 무예에 이끌렸던 그는 몸의 에너지를 풀어낼 장이 필요했다. 길을 잃어버린 에너지가 뒤틀린 형태로 폭발할 때 그것은 광증으로, 살인으로, 자살로 나타난다. 아들 산이 태어났을 때 세자가 부채에 그린 승천하는 용의 형상은 그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생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뒤주에 갇혀 갈증에 시달리던 그가 이 부채로 오줌을 받아먹는 마지막 날들은 하늘로 나르지 못한 용의 처참한 운명을 보여준다. 갈증을 견디지 못해 뒤주를 뚫고 나간 그를 다시 잡아들여 뒤주에 가두고 그 위에 잔디를 덮을 때, 관객들은 이곳이 그의 무덤이 될 것임을 안다.   




    

세자가 아버지의 억압적 요구에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리청정 시 그가 보여준 개혁정책은 노론의 힘을 얻어 왕위에 올랐던 아버지의 노선에 반하는 것이었다. 세자의 생모였지만 빈이기 때문에 궁궐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던 어머니의 환갑잔치에 그가 중전에게만 허용되는 사배四拜를 올렸던 것은 궁중의 예법을 거스르는 행위다. 저 노인네와 한 곳에 살 수 없다고 소리치며 친위 무사들을 이끌고 왕의 처소로 쳐들어갈 때 세자의 반역은 절정에 이른다. 그의 손에 쥐어진 칼은 아비를 죽이는 일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그는 뒤주에 갇히는 비극적 결말에 처한다.     


그는 왜 살부에 실패했는가? 부계 승계사회에서 제도적이든 상징적이든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독립된 개체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선친 라이우스왕을 죽여야 했다. 살인에 실패하면 그는 이사악처럼 애비의 밧줄에 묶이는 희생 제물이 된다. 영화는 영조와 세자가 처한 당시 조정 내 권력구도를 빠뜨리지 않지만, 초점은 부자관계에 맞추고 있다. 영화는 세자가 아버지에게 겨누었던 칼을 내려놓는 요인을 ‘아비의 눈물’에서 찾는다. 여기서 아비의 눈물이란 아버지 영조의 눈물이 아니라 세자가 그 자신 아비로서 흘리는 눈물이다. 세자가 친위 무사들과 함께 왕의 처소로 쳐들어갔을 때 영조는 방 안에서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방 밖에서 세자는 조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환갑잔치에서 할마마마에게 사배를 올린 것은 궁중의 예법에 어긋난 것이 아니더냐.”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손은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아비의 마음’을 언급하는 순간 세자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세자가 흘린 눈물은 영조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 아들은 칼을 내려놓지만 아버지는 끝내 칼을 거두지 않는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뒤주에서 죽게 만드는 그 잔혹한 결정을 철회하지 않는다. 애지중지하는 손자의 호소도 그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치달은 세자의 비행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려는 현실적 선택이기도 하다. 영조는 아들을 역모로 죽이지 않고 광인으로 죽인다. 세자가 역모로 죽게 되면 그 아비도 자식도 역모의 죄에 걸리는 연좌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것이 현실적 선택임을 영화는 부인하지 않는다.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나 부인 혜경궁 홍씨 모두 영조의 결정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불가피한 것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생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가 세손의 뺨을 때리며 “네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아비의 한을 풀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는 장면은 거대한 철벽으로 존재하는 궁중의 질서를 암시한다. 결국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하고 궁중의 질서에 순응하고서야 왕이 될 수 있었다. 왕이 된 후 그가 어머니의 환갑잔치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이 담긴 부채로 추는 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픈 애도의 몸짓이자 자신의 현재가 그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죄책감의 표현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잔혹한 ‘현실’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세자가 죽고 난 뒤 영조가 풍악을 울리며 행차를 할 때 그의 가마행렬은 세자의 환영을 짓밟고 지나간다. 가마 행렬 아래 투명한 존재로 밟히고 있는 세자의 모습은 영조가 그토록 지키려는 왕조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희생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아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왕권을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그는 그 일에 충실했다. 영조는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하여 적통을 세우고, 그를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시켜 후일 발생할 정치적 논란을 해소했다. 이로써 왕권은 안전하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 신속한 승계절차는 희생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완성되는 희생제의祭儀이다. 아버지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아들은 희생되어야 한다. 물론 아버지도 대가를 치른다. 자신이 주관했던 이 제의가 고통스러웠던지 영조는 세자가 죽고 난 후 ‘사도’라는 이름을 내린다. ‘思悼’. ‘애달프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살아생전 아들에게 주지 않았던 ‘애달픈 마음’을 죽고 난 뒤에야 준다. 그를 통해서라도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은 얼마나 떳떳하냐?” 죽기 전 세자가 활쏘기 연습을 하며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궤도에서 이탈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세자가 던지는 이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존재야말로 부계승계에 기초한 왕조시스템의 토대임을 암시한다.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면 시스템을 지배하는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법칙이 정의롭지 못한 것일 때 떳떳한 자는 시스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화 〈사도〉는 의로운 존재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한다. 감독은 이 희생 시스템의 문제가 몇백 년 전 왕가의 일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핵심 모순임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 대한 젊은 층의 공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들은 영화에서 청년세대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는 우리 사회 지배 시스템을 보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에게서 그들 자신의 미래를 본다. 포기가 일상이 된 젊은 세대의 절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희생의 질서를 바꿀 생각이 없다. 아래 세대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수많은 ‘사도들’의 양산을 막을 수는 없다. 사르트르는, 인류가 증오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은 희생양 콤플렉스를 포기할 줄 아는 날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하는 분열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 곳곳에 흘러넘치는 오늘날, 이 희생의 질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영화 〈사도〉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아픈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