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2

정의의 요청과 사랑의 윤리

저자소개

이명호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줘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강의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죽도록 책만 읽는』, 『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여행자의 서재』,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고전 한 책 깊이 읽기』,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살아 보니, 진화』(공저), 『살아 보니, 시간』(공저), 『살아 보니, 지능』(공저) 등을 펴냈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서양문학사에서 비극적 주체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행위의 결과가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때 스스로 눈을 찌르고 국가에서 추방되는 길을 선택한다. 신탁이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힘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를 공동체의 잉여로 분리해 내는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주체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비극적 윤리성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다. 살부殺父의 ‘불경’과 근친상간의 ‘부정’不淨이 밝혀진 뒤 오이디푸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비극적 주체의 전형이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오 / 하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  내 손으로 직접 찔렀소.”1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발견한 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또 다른 고통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제발 어서 나를 나라 밖 어디에다 숨기든지 / 아니면 죽이든지 아니면 바닷속에 던져 버리도록 하시오. / (…)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들으시오. 내 고통으로 말하면 / 나 말고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2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시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소포클레스 비극 속 주인공의 성격을 절반밖에 드러내지 못한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초과하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정치적 ·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오이디푸스이다. 이 주체의 행위가 살아있는 한 비극은 세계의 파괴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생성할 계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오카스테는 이런 비극적 주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끔찍한 진실이 드러날 때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진실을 대면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더 이상 은폐가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자살로 도피함으로써 주체적 선택을 포기한다. 이오카스테는 자식을 낳자마자 운명에 빼앗기고 그 아들과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비운의’ 어머니이지만 ‘비극적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그녀는 자식을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고, 살아 돌아온 자식과 몸을 섞어 세상에 오염의 씨를 뿌린 저주받은 어머니이다. 그녀가 자식을 잃어야 했던 어머니로서 겪었을 지극한 고통은 작품에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와 결과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오염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찾으려고 할 때 그의 진실 추구를 가로막는다. 오이디푸스의 출생과 유기遺棄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목자가 등장하여 그의 두 발에 뚫린 구멍을 증언하자 이오카스테는 그들이 찾고 있는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이디푸스의 진실 추구를 말린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의 정체가 드러날 때 그가 겪을 극심한 고통과 국가에 닥칠 파국을 막기 위해 이오카스테가 기울이는 노력을 이해하지만, 비극적 인식과 행위에 미달하는 그녀의 처신에 공감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자살은 극적 사건을 개방시키지 못한다. 그녀의 옷에 꽂힌 브로치만이 오이디푸스의 주체적 행위의 도구로 쓰일 뿐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 그녀가 겪었을 슬픔과 분노, 그녀가 지독한 운명에 휩쓸려 들어가 홀로 감당해야 했을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이야기는 작품 어디에도 없다. 

진실을 대면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련의 어머니, 아들의 죽음에 흘리는 눈물이 진실에 입각한 정의의 구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가슴 속 지하묘지에 갇혀있는 슬픔의 어머니, 이런 어머니 형상을 넘어설 ‘모성적 애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드니 빌뵈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을린 사랑〉은 그리스 비극의 공간에서 표현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오카스테를 다시 살려내 그녀의 유언을 실현하는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내전에 시달리는 중동지역이다. 정확한 사실은 지워졌지만 기독교와 무슬림, 원주민과 난민이 총부리를 거두고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있는 1970, 80년대 레바논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이오카스테가 아들의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어야 했던 운명은 〈그을린 사랑〉에서도 반복된다. 그 운명을 추동하는 세력이 신의 힘에서 역사의 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을린 사랑〉의 주인공은 죽은 어머니(나왈 마르완)이다. 그녀가 어긋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쌍둥이 자식(딸 잔느와 아들 시몽)에게 남긴 유언을 실행하는 것이 영화의 중심 서사를 구성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유언은 끔찍하고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무덤에 관도, 비석도, 비문도 필요 없다며, 죽은 줄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말한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는 그때 비석을 세워라.” “그때까지는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시신을 옆으로 엎어 놓아라.” 등진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야 하고, 어긋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면 침묵을 깨고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세상의 질서를 바르게 만드는 것making things right’,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죽은 자에게 건네는 기도도 시신을 감싸는 수의도 거부한 채 벌거벗은 몸으로 견디겠다고 죽은 어머니는 선언한다.  

자식들이 어머니를 망자의 세계로 보내드리는 ‘애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바로잡히지 못한 세상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실의 발견과 정의의 실현은 자식들이 지켜야 할 어머니와의 약속이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키려면 자식들은 그들 나름으로 트라우마적 상황을 겪어야 한다. 진리와의 만남은 지금껏 환상으로 유지되어오던 일상의 삶을 천둥소리처럼 갈라놓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가난하고 고단한 이민자로 살아왔지만 그들은 합리적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캐나다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공증인 사무실의 직원으로, 쌍둥이 남매는 고등교육을 받은 어엿한 캐나다 시민으로 흔히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 나왈은 결코 따뜻하고 친절한 어머니였던 것은 아니지만 쌍둥이 자식들이 이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캐나다로 건너오기 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해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은 과거의 억압 위에 위태롭게 유지되어왔던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이제 그들은 종교적 · 민족적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중동으로 건너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트라우마적 진실을 만나야 한다. 공간의 이동은 진실과의 대면을 통해 존재 전환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어머니 나왈이 유언 집행을 맡겼던 공증인 르벨은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유언을 듣고 당황해하는 쌍둥이 남매에게 망자의 유언은 함부로 깨뜨려서는 안 되는 신성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공증인의 임무 중 하나는 고인의 유지와 그의 성스러운 비밀을 돌보는 것이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매개자이다. 나왈은 르벨을 통해 살아있고, 그를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정리할 법적 집행자를 얻는다. 쌍둥이 남매는 르벨을 통해 트라우마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견뎌낼 든든한 조력자를 얻는다.     

영화에서 어긋난 관계는 이론수학의 난제와 연결된다. 딸 잔느의 전공은 이론수학이다. 그의 지도교수는 말한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지. 영혼이 평화롭지 못하면 이론 수학은 끝장이야.”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잔느는 젋은 시절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을 떼지 못한다. 낡은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풀리지 않는 난제를 던진다. 잔느는 어머니의 얼굴이 함축하고 있는 난제, 그 미지의 변수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캐나다, 데옴, 다레쉬, 남부 지역, 데레사, 크파르 리얏 감옥, 테레사, 캐나다로 이어지는 여정은 어머니의 삶 속에 놓여있는 난제와 맞닥뜨려 그것을 푸는 과정이다. 마침내 잔느는 쌍둥이 형제 시몽과 함께 ‘1+1=2여야 하는데, 1이 될 수 있는가’라는 불가능한 공식을 마주한다. 이 공식은 그들의 출생의 비밀이자, 어머니의 삶의 비밀이며, 해답을 너무 늦게 알게 된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된 이유다. 어머니의 유언을 집행하려면 어머니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만들어 세상 속에 실현시켜야 한다. 아버지와 형제를 찾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담은 두 통의 편지의 수신인은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동시에 형제이기 때문이다. 두 남매는 불가능성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이었음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수신인에게 전달한다. 이로써 전달의 약속은 지켜졌다. 하지만 약속이 온전히 지켜지기 위해서는 수신자가 유언에 담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 속 진실이 그를 일깨워 자신의 어긋난 삶을 직면하기 전까지는 유언의 집행은 완수되지 않으며, 어머니에 대한 애도도 완료될 수가 없다. 


영화는 어머니의 삶이 왜 이런 불가능한 난제였는지 자식들이 발견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죽은 어머니는 스크린 속에 다시 등장해야 한다. 처녀 시절 난민 청년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한 나왈은 오빠들의 총부리에 연인을 잃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들을 낳지만, 이방의 오염을 끌어들인 죄로 출산과 동시에 핏덩어리 아들을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발 뒤꿈치에 찍힌 점 세 개로만 기억되는 아들이 회교도와 기독교도, 민족주의자와 난민 사이의 갈등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던 그녀가 급기야 기독교 민병대 대표를 암살하는 테러범이 되고, 얼굴도 모르는 그 아들에게 강간당해 쌍둥이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 역사의 모순에 휩싸인 그녀의 운명이다. 자신을 강간한 원수(아부다렉)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니하드)이고, 그 아들과 쌍둥이 자식들은 아버지이자 형제가 되는 근친상간적 관계가 그녀가 휩쓸려 들어간 잔인한 역사다. 그녀의 가족사는 운명보다 더 무자비한 역사의 힘에 지배당한다. 그녀가 이 오염의 가족사를 발견한 것은 15년의 고통스럽고 긴 수감 기간을 보내고 캐나다로 건너온 후에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이다. 딸과 함께 찾은 수영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점 세 개가 찍힌 발의 소유자가 감방에서 자신을 강간하여 쌍둥이 남매를 임신시킨 바로 그 고문 기술자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나왈은 트라우마적 진실과 조우한다. 카메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강간범의 무심한 얼굴을 보고 넋을 잃어버린 나왈의 얼굴을 길게 비춘다. 이 순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즉 ‘무지’에서 ‘앎’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 발견의 충격으로 나왈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나왈은 소포클레스 비극 속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달리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회피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끌어들인 오염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느 현명한 인물은 어머니의 비밀을 풀기 위해 찾아온 잔느에게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은 법이 있지요.”라고 말한다. 삶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실을 희생하는 선택을 내릴 수도 있다. 나왈은 자식들이 근친상간의 진실을 알게 될 때 겪게 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배려의 윤리를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의 은폐 위에서 얻어지는 안식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녀가 15년의 수감 기간 동안 강간을 비롯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듯,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는 배려라는 이름의 여성적(?) 선택을 내리지 않는다. 그녀는 크레온의 국법에 다소곳하게 순종하는 이스메네가 아니라 국법에 맞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안티고네다. 감옥에서 나왈은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 72번 수감자였던 그녀는 정신의 수감을 거부하기 위해 강간을 당하고 나서도 절규하듯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정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저항의 수단이자 불의에 맞서는 분노의 표현이다. 자신의 삶의 불가능성에 또다시 직면한 그녀가 죽음의 순간 남긴 유언은 이 노래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감정적 배려나 거짓 위로 없이 진실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해야만 “분노의 흐름을 끊게 하는 약속”이 일어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정면통과’working through가 트라우마를 온전히 견뎌내는 힘든 정신적 · 육체적 과정을 가리킨다면, 어머니 나왈은 자식들에게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거쳐 갈 것을 요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 통과제의를 온전히 치러 내야만 어긋난 질서가 회복되고 미래가 열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죽은 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단순 처벌이 아니라 어긋난 질서를 회복하는 정의다. 회복적 정의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래를 개방시킨다. 영화에서 정의는 현재 실현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구현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어머니의 정의를 추동하는 것은 금지와 억제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다. 어머니는 아부다렉/니하드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증오를 사랑으로 전환한다. 아부다렉에게 그녀는 72번 수감자이다. 세상의 불의를 온 몸으로 겪어낸 수인으로서 그녀는 고문기술자이자 강간범인 아부다렉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하드에게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자신이 버린 자식을 반드시 찾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고, 그 아들에게 이승에서 건네지 못한 사랑을 선사한다. 나왈의 삶은, 그리고 죽음은 이 사랑에 대한 충실성fidelity에 헌신되어 있다. 여기서 충실성이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사랑을 가리켜 말했던바, 즉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하는 것”3을 의미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거나 둘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에 균열과 절단을 도입하는 치명적 열정이다. 이 균열과 절단이 주는 고통을 피하지 않을 때 사랑이라는 ‘사건event’은 일어날 수 있고,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다. 사랑은 삶의 질서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불가능성에 응답하는 행위, 영화의 원제가 암시하듯 역사의 ‘화염’에 그을리면서도 그 검은 연기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구축하고 새로운 삶과 세계를 건설하는 행위이다.    

사랑은 어머니 나왈이 아들 니하드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죽은 자는 자신이 준 것을 돌려받을 수 없다. 어떤 보상의 기대도 없이 그녀는 아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선사한다. 한나 아렌트는 용서야말로 “불가역성不可逆成의 곤경”으로부터 헤쳐 나오게 해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렌트에게도 용서와 정의는 대립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바른 ‘판단’과 ‘실천’(정의)은 용서의 전제조건이다. 아렌트가 말한 용서를 사랑으로 바꿔 쓴다면, 우리는 죽은 어머니가 수행하는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역사의 ‘시작’을 개방시키는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족사라는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죽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정의와 사랑의 증여 행위를 통해 “분노의 흐름을 끊게 하는 약속의 시작”이다. 그녀가 유언을 통해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진실의 발견을 통한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의를 향한 열정이 원한의 기획으로 변질되지 않고 더 공정하고 평등한 인간적 삶을 위한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애도의 작업은 정의의 실현이 사랑에 의해 감싸여진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자식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뿐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애도를 주재하는 어머니 형상을 영화공간에서 만나는 것은 행복이다. 2015년 한국사회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애도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정신 상태에 빠져 상실의 슬픔과 분노를 사랑과 정의로 승화시킬 정치공간을 찾지 못한 채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있다. 아니 애도 작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힘든 숙제를 끝내고 어머니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새겨진 비석을 세울 수 있었던 쌍둥이 남매처럼,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선 불행한 아들처럼, 우리도 세월호의 침몰로 죽어간 아이들의 이름을 역사의 비석에 새겨 넣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온전한 비문이 새겨진 비석을 세워주려면 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지만, 우리는 아직 진실 규명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진실 규명의 힘든 싸움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진도 앞바다에 수장된 아이들은 영화 속 어머니처럼 정의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비극』,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 출판부, 78쪽. (번역은 필자가 조금 수정한 것임)
2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비극』,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 출판부, 81쪽.
3   『사랑예찬』, 조재룡 옮김, 길,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