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7

색으로 난민을 구하는 여행



『난센여권』은 난민과 활동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저자의 인터뷰는 단순히 일반적인 질문-답변 형식이 아니라, 인터뷰 대상자에게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색으로 표현하게 하는 ‘컬러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컬러 인터뷰와 같이 우리도 각자의 색을 찾아보았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한강진역 거리는 매우 한적했다. 근처에 위치한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1)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전시관과 카페의 성격을 겸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작가님의 털털한 성격 덕분에 인터뷰는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됐다. 작가님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난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동행 이야기로, 나아가 이 모든 것은 ‘나스러움’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  *  *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쑥스럽네요. (웃음) 책의 내용을 보면 난민인권센터로부터 온 연락이 계기가 되어 ‘난센여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셨어요. 혹시 평소에도 난민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계셨나요?


2008년쯤부터 한국인권재단하고 제주인권회의를 같이 했어요. 기획에 초대를 받아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100명이 2박 3일 동안 제주라는 섬에 감금되어 (웃음) 함께 인권을 주제로 고민하는 학회예요. 학회에 예술가인 저를 초대했을 땐, 저에게 학자들과는 다른 것을 기대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런 주제를 어떻게 문화·예술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학회가 꼭 우리가 많이 보는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겠다.’, ‘이러한 학회에 예술가들이 초대되면 어떨까?’ 다른 영역에서 예술이 상상력을 불러오도록 해보는 시도가 저 자신에게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어요. 예술이라는 세상에서 작품을 발표할 때랑 다른 전문 영역과 예술이 부딪칠 때 나오는 반응이 달랐던 것 같아요. 


학회에서 많은 분들을 새로 알게 되었고, 곳곳에서 함께 작업하자며 연락이 왔어요. 난민센터에서 온 연락도 그중 하나죠. 이상하게 난민인권센터에서 온 연락에 눈길이 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가리봉동에 위치하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이전에 지역 연구를 많이 했거든요.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학생들하고 그런 프로젝트들을 했고요. 그런데 가리봉동은 가본 적이 없어요. '가리봉동'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재밌기도 하고 해서 그 지역과 난민인권센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죠.


인권을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들은 특별한 사명감에서 시작될 것 같았는데, 흥미롭네요. 아주 사소한 우연(?), 인연에서 시작되었잖아요.


자발적인 감성을 믿고 자신의 선택으로 어떤 일을 진행했을 때 최상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느낌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하고 있는데 누가 ‘난민을 연구해주세요.’ 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제가 인터뷰를 한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처음부터 인터뷰를 안 했어요. 어떤 프로젝트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없어서 한동안 난민인권센터에 가서 계속 점심만 먹었어요. 그런데 그곳 풍경이 저에겐 놀라웠어요. 아무 약속이 없어도 난민들은 센터에 와서 어울리고, 활동가들은 자기 활동을 해요. 활동가 한 명당 열 명 정도의 난민을 담당하거든요? 그분들이 어떤 지위를 부여받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몇 년씩 그 공간에서 일을 해요. ‘도대체 난민이 어떤 존재이기에 이분들이 하루 종일 몇 달씩 몇 년씩 함께 하고 있을까?’ 더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계속 같이 밥 먹고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제 주변엔 예술가들이 많이 있으니까 작업에 대한 구상을 하겠다는 분들도 있고 해서 같이 갔죠. 그때는 몇 달을 그렇게 몰입해 있었던 것 같아요. 한동안은 아예 작업실을 거기로 옮겼어요. 그러면서 활동가들을 만나고, 한 분 한 분 인터뷰하고, 난민들 얘기도 듣고. 인터뷰 중에 국장이 ‘A라는 사람을 만나보면 좋겠다.’ 그러면 노트에 적었다가 인터뷰 하러 가고, 그렇게 시작했죠.


스스로의 감성을 믿을 줄도 알아야겠어요. 그러면 색깔 인터뷰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거예요?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를 시도했어요. 처음에 인터뷰할 때는 아무런 도구가 없었거든요. 저는 예술가니까 좀 예술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잠깐 만날지라도 형식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예술가랑 인터뷰를 해보니까 뭔가 다르더라는 인식을 줄 수 있게요. 처음에는 질문카드를 만들어서, 인터뷰이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직접 쓰게 했어요. 묻고 답하는 형태가 아니라 활동할 거리를 만든 거죠. 그러다보니 질문의 범위가 구체화되고, 점점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됐어요. 색도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저는 인터뷰하는 사람이었지만 조금 물러서서 인터뷰이가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지 집중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테이블 위에 색종이를 쫙 놓으면 몰입해서 보게 돼요. “어떤 계기 때문에 일을 하셨나요? 말씀으로 답변하지 말고 카드 중에 하나를 선택해주세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각자의 색을 고르죠. 너무 다양해요. 그리고 자신이 이 색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다 보면, 그 색에 의지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요. 저는 그 순간이 예술인 것 같아요. 찰나의 순간에 기억과 형용사를 모두 종합해서 색을 표현할 때, 그 색깔에다 감각을 보태거나 기억을 더하면서 오감이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나요. 


인터뷰가 끝날 때쯤엔, 처음엔 낯설어하던 분들이 주저 없이 표현을 해요. 이 색은 어떤 색이다, 색은 예술이다, 예술은 무엇이다 등등이요. 그래서 기분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이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구나. 다음 인터뷰를 할 원동력이 됐죠.



인터뷰 방식 역시 감성을 따르신 거네요. 사실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색은 만물의 어머니라던가, 이렇게 특별한 의미부여요.2)     


‘인터뷰 자체를 예술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저는 예술가니까요. 인터뷰를 1년 정도 진행했는데 그 순간이 예술인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까 기억력이 좋지 않아요. (웃음) 기억하거나 다시 떠올리거나 할 때에 어려움이 많아서 노트에 많이 적거든요. 인터뷰하고서 그 사람을 색깔로 기억하게 되면 인터뷰하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요. 색은 굉장히 좋은 도구인 것 같아요. 펜도 도구고 지우개도 도구도 물감도 도구이듯이 저에게는 컬러가 그런 도구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인터뷰를 준비한 방식과 매우 상반되네요. (웃음)


어제도 두 개의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또 엄청난 컬러가 나왔죠. 공감이라는 변호사 단체에 계신 분인데, ‘소나기 같은 블루’라고 색을 표현하셨어요. 


'소나기 같은 블루'라, 무슨 뜻인가요?


최근에 소송을 진행했는데, 판결이 매우 이례적이었대요. 사실 난민 관련 재판3)은 대부분 패소해요. 이들에게 패소는 곧 추방이죠. 추방된 난민들은 본국으로 송환돼요. 그들이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번 재판은 송환을 취소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판결문에 인권 관련 얘기가 담겨있었어요. 서울중앙법원에 계신 판사님께서 내리신 판결이에요. 판결문은 예술일 수밖에 없는 게 항상 다른 판결에 인용이 돼요. 판례라는 게 역사를 만들어가잖아요. 그래서 판결은 그 자체로 작품이에요. 


아무튼 그분은 이번 재판을 소나기 같은 푸른색이라고 써주셨어요. 그럴 때 답변하시는 분 스스로도 감동 하는 것 같아요. 컬러캠프는 길게 진행 안하거든요. 찰나에 스스로를 포착하게 만드는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색을 함께 나열한 것도 있네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주말마다 라티프라는 난민 친구를 만나 종종 어울려요. 라티프는 공장에 취업을 했는데 가보시면 알겠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해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악해요. 그런데 라티프가 어느 날 제게 감옥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많은 기대를 하고 한국에 온 지 8개월이 되었지만 나는 감옥에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하는데 제 몸이 축 늘어졌어요. 감옥에 있다는 소리가 맘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한 변호사께서 난민들을 ‘비에 젖은 회색’ ‘웅크린 회색’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셨어요. 사건을 진행하면서 하도 많이 패소하다 보니 너무 절망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싶어서 인권 활동을 하는 변호사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가능성을 발견하신 거죠. 이 가능성을 ‘굉장히 맑은 블루’로 표현 하셔서, ‘아! 라티프와 이 변호사님의 컬러를 서로 만나게 해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4년의 난센여권4)은 난민에게서 발견한 색과 같은 어려움을 가진 한국인을 배치하는 거예요. 같이 동행하는 여권이요. 다른 예로 로넬이라는 난민의 방글라데시 산악지대 얘기가 있어요. 댐이 개발되어 물 아래로 가라앉은 고향 산의 얘기와 산행을 좋아하는 활동가의 공룡 그린 컬러와 만나게 하는 거죠. 심리적인 동행일 뿐이지만, 마음을 함께하는 것이 그들의 난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이 난민들에게 우호적인 나라는 아니네요. 망명신청도 대부분 거절하고, 처우도 열악하고. 그런데도 한국으로 오는 이유가 있나요?


난민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에요.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탈출할 때는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가는 게 아니라 갈 수 있는 데를 가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장소나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장소, 더 중요한 건 비자가 나오는 장소이죠. 물론 정확한 경로로 오신 분들도 계시지만, 기독교 행사에 참여한다고 위장 비자를 받아서 온 사람들도 있고, 한마디로 전쟁 상황이라고 보면 돼요.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너무 위험한 그런 상황. 그때, 우연히 택한 곳이 한국밖에 없었던 거죠. 

  

난민들의 세계는 민주화 시스템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우리나라의 과거예요. 그래서 콩고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기도 하고, 공감하려고 음악도 들어보고 영화도 보고, 그분들이 추천해준 책을 읽었어요. 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마치 무슨 게임인 것처럼 임산부 배를 갈라요.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상황을 탈출하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조금씩 공감하게 되면 내 일은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사용하는 보석이나 마시는 커피 같은 것들도 아프리카에 있는 그들을 착취해서 얻은 불공정 교역의 결과이고,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불러온 거예요. 그러니까 같이 동행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거죠.

  

중·고등학교 때 어떤 친구가 맞는 것을 본 적 있어요? 그런 기억이 사실 불편하잖아요. “때리지 마!”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불편함. 그렇듯이 누군가가 이 난민에 대해서 부당하게 하고 있다는 목격담을 자꾸 들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해결할 능력이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하면 저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시위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예술을 통해서 그들의 얘기를 공유하자!’ 했어요. 그나마 저는 예술가니까 책이라는 것이 일종의 캔버스였던 것 같아요.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는 없지만 일단 출판하면 책이 전국의 도서관에 비치되고, 일반 전시보다는 여러분 같은 시민을 만나는 빈도수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으로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느꼈죠. 다행히 그 취지에 공감해주는 북노마드5)라는 출판사를 만났고요. 


그런 캔버스를 계속 찾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관람하는 예술품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책이 예술품이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한국의 난민 수는 6,000명 정도뿐이에요. 서울대학교 한 학년 학생 수가 3,000명 정도이죠?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학년의 학생들만 동행하면 난민 문제를 풀 수 있어요.



“때리지 마!” 라고 말할 수 없었던 불편함… 매우 공감되네요. 아직도 종종 느끼는 감정이에요. 그나저나 난민들과 단순히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니 놀라워요.  


난민이 처음 입국하면 인천공항에 가서 심사를 받아야 돼요. 무려 아홉 시간 동안 진행돼요. 그 인터뷰 시간 동안 뭘 먹었냐고 물어봤더니 아무것도 안 먹었대요. 어딘지도 모를 장소로 가는 것조차 너무 두려운 그들이에요.


후속 인터뷰가 있다기에 같이 따라가 보았어요. 업무 담당관을 만났는데 ‘어떻게 난민이 한국인을 알 수 있지?’ 하고 엄청 의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명함도 드리고 함께 온 이유를 설명했죠. 정중하게 인터뷰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더니 모른대요.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인터뷰요? 긴 시간 동안 진행될 인터뷰가 단 세 시간 만에 끝났어요. 이렇게 같이 동행만 해주었을 뿐인데 변화가 생겨요. 뿐만 아니라 누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민에게는 위로가 되죠.

  

우리가 생각하는 난센여권은 그거에요. 따라가고, 목격하자.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들은 기록하고. 이 모든 것이 나중에 소송을 할 때 도움이 돼요. 처음 사장하고 계약서를 쓸 때 옆에 누가 있어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여권으로 동행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단순히 동행만 했을 뿐인데 그런 변화가 일어나니까. 그 친구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부딪힐 1,000가지 문제 중 열 가지만 공유하는데도 이렇게 달라져요. 

  

우리가 하는 일들은 사소한 거죠. NGO 센터에는 활동가가 배정되어있고 법률상담이나, 심리상담 서비스를 지원해주지만 난민들의 일상에는 개입 못 해요. 이건 친구가 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걸 저는 시민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그냥 난민들 옆에서 같이 있어주면 그들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달라져요. “어, 이 사람이 한국 사람을 아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 작가님 얘기를 들으며 느끼는 것이 매우 달라요. 책을 볼 때는 으레 힘들려니, 열악하려니 정도였어요. 그런데 작가님께 직접 애기를 들으니 ‘아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 하고 와 닿아서 자꾸 소름이 돋아요. 직접 현장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회6)가 더욱 기대되네요.


전시의 이름은 ‘컬러캠프’예요. 이 주제를 어디에 전시 하는 것이 나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책을 쓸 때 책이 캔버스였던 것처럼, 전시 장소 그 자체도 예술이잖아요. 난민들을 만났던 장소, 그들이 일하는 공장, 난민을 연구하는 학자의 사무실, 난민을 지원해주는 법률사무소… 그런 곳들 열다섯 곳을 찾았어요.


전시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난민을 연구하는 학자의 장소에 가는 것이 중요한 거죠. 바로 그 단체가 작품이고, 판사의 판결문이 작품이고, 연구소가 작품인 거예요. 그 공간에 가면 브로슈어인 우리 여권을 가져가서 도장을 받고, 그 방의 주인교수님하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어요. 




대단해요. 교수님께서 자신의 공간을 개방하시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박찬운 교수님은 우리나라의 난민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에요. 원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활동하셨고 난민위원회를 만드신 분이기도 하죠. 그분의 방을 살펴보다가 메르샴7)의 소송문을 발견했어요. 먼지가 쌓인 누런 봉투에 들어있었는데, 이 판결로 메르샴은 한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획득했어요. 이런 게 작품이자 보물이죠! 그래서 교수님을 마구 설득했어요. “교수님, 이건 보물이에요! 전시해야 해요!” (웃음)


박 교수님께서 처음엔 당황하셨죠. 이런 문서가 어떻게 예술이냐고. 이해가 안 갈 뿐더러 쑥스럽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취지를 쭉 설명해 드렸어요. 이런 기록과 현실 그 자체가 어떤 박물관에 있는 예술 작품보다 위대하잖아요?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도 공감하시고 승낙해주셨어요. 승낙 정도가 아니라 ‘그럼 이것도 예술이 될 수 있나요?’ 하고 다른 물건들도 꺼내주셨어요. 예를 들면 메르샴이 봉제공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만들어 교수님께 선물했던 점퍼 같은 거요. 이 점퍼까지 모두 교수님 방에 전시됩니다. 보러 오세요. (웃음)




그럼 전시 홍보는 어떻게 하세요?


홍보는 계획이나 대책이 없어요. 저희가 이 카페를 운영할 때도 그랬어요. 특별한 계획이 없었죠. 우리 카페의 메뉴들은 전시 작가들이 기획한 거예요. 그래서 당연히 처음엔 실패도 많이 했고요. 작가들은 카페에서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체류하면서 여러 이야기들 중 하나를 건져와 메뉴로 만들어요. 메뉴자체가 캔버스죠. 손님들은 음료를 고르면서, 이 맛있는 음료에 담긴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기억해주세요. 우리는 이렇게 작가들이 표현하고 싶은 바를 알려요.


예를 들면, 새로 나온 개나리 요거트요. 메뉴판의 설명을 보시면 아하메드의 사연이 담겨 있잖아요. 개나리 하면 봄, 희망 이런 것들이 떠오르지만 사실은 아하메드가 한국에 와서 배운 욕이거든요. 난민 친구들은 욕부터 배울 일이 많죠. “이런 개나리 같은!” 


기발하고 재밌어요. 이렇게 예쁜 음료가 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니! (웃음)


이건 음료에서 끝나지 않아요. 맛있고, 스토리도 있는 것 같고, 재밌잖아요. 카페에 오셨던 손님들이 친구들이랑 수다 떨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이런 식으로 퍼져요. 전시도 마찬가지예요. 우연히 전시를 보러 오셨던 관객들이, 찍어서 SNS에 올리고, 입으로 전하고요. 이런 방법들 외에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요. 우리는 어떤 기업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런 문제는 좀 더 공론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본이 있는 기업의 후원을 받아 광고를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 구상의 결론을 찾아보세요. 우리는 각자가 어떤 예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기업이 떠오르나요? 어떤 기업의 후원을 받으면 될까요? ‘누군가 하겠지’라는 순종적인 태도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해요. 


아, 저희는 이 점을 오해했어요. 아무래도 후원을 받으면 전시의 성격이 좀 변질될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음료마다 그 회사의 로고를 붙여야 한다든가. 그래서 일부러 그런 후원을 거절하시는 건 아닐까 했거든요.


저도 현대사회에 사는 평범한 시민이에요. 누가 후원을 한다고 하면 왜 마다하겠어요. 사실 올해 전시를 기획하면서, UN이라던가 다른 단체들에 제안을 많이 했어요. 많은 예산과 힘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예산을 지원해주겠다는 곳은 없었죠. 우선 전시의 결과가 어떤지 지켜보고 차후에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예산도, 지원하는 재단도 없지만 시민의 힘을 믿어보고 싶기는 해요. 예를 들면, 컬러캠프에서 여권을 발행할 때 수수료를 내는 식이요. 우리 카페는 자가발전을 좋아해요. 손님들이 정당한 금액을 내고 사 먹고, 그 돈이 예술가들에게 지원금으로 돌아가죠. 전시도 같은 시스템이에요. 관객들이 전시를 관람하는 수수료를 내고, 여행을 떠나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이기 때문에, 수수료가 아까워서라도 전시를 다 관람해요. 그냥 선의에 의해서 이런 전시를 준비했으니 관람하세요, 하면 몇 명이나 따라올까요. 받은 관람료를 통해 다시 전시를 기획하고, 난민을 돕고. 우리만의 방법이랄까요?


저는 저만의 방법을 찾고 싶어요. 누군가가 전시를 통해 감동을 받으면 그분에 의해서 알려지지 않을까요? 혹은 인터뷰하는 여러분들에 의해서!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희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준비했던 질문들이 형식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제일 궁금했던 건 ‘왜 난민이어야 할까?’였거든요. 탈북자, 독거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등 한국에서 주목해야 할 인권 문제는 많잖아요. 그런데 작가님께선 어떤 생각 끝에 난민을 돕기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우연히 마주한 문제에 예술가다운 해결책을 찾으신 거군요. 마음으로요. 이 점이 참 감동적이에요. 


각자 자기가 마주하는 상황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다르잖아요.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면, 장애인 관련 문제를 만났을 때 더 마음이 쏠리겠죠. 저는 우연히 난민들을 만난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이 화내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응원이 되죠. 어렵지 않아요. 친구와 차를 마시며 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 한 시간을 난민과 동행하는데 쓴다면, 그들의 삶이 달라져요. 내 노트가 그 산 증거고요. (웃음) 이게 무슨 큰 시민운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변화가 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난센여권을 문화운동이라고 해요. 


난민들과 함께하다 보면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어요.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들이 부딪히는 상황은 우리의 거울이에요.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죠. 우리들 스스로는 굉장히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비인간적인 일들이 여전히 만연하거든요.


난민들의 삶을 관찰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지, 연대해야 하는지 알려줘요. 저는 그들을 돕는 단체들을 좀 더 빛나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프로젝트 팀에서 선택한 키워드는 ‘빛’이에요. 색은 섞일수록 혼탁해지지만, 빛은 섞일수록 환해지죠. 우리가 연대해서 탄생한 그 빛이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정을 비추는 동행자 역할을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매순간 선택을 할 때마다 ‘무엇이 공정한 선택인가?’를 염두한다면 세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어요. 여러분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물론 시스템 그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자발적인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사소한 변화로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조금만 시간을 투자해도 스스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요. 


작은 일부터 시작하세요. 모든 사람에게는 ‘나스러움’이 있죠. 어떤 상황에서든 ‘나스러움’으로 살아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나스러움’은 예술이에요. 예술가의 삶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가고 있어요.


20대에는 20대만의 힘이 있어요. 매번 ‘자기스러운 것’을 찾아가세요. 물건을 살 때도, 가격비교 사이트를 켜서 주르륵 비교하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 말고, 내가 무엇이 끌리는지 귀 기울여 보세요. 본인의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을 때, 결과도 굉장히 즐거운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난민 친구들에게도 그런 조언을 많이 하죠. 여러분은 어때요? 여러분의 ‘나스러움’은 무엇인가요?



*  *  *



작가님께서 우리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작가님은 이 질문 역시 사소한 것에서부터 답을 찾아보라고 조언해주셨다. 예를 들면, 마트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 어떤 순서로, 혹은 무엇을 사느냐 역시 나를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이 질문에 세원이는 그동안 구매한 적이 없었던 걸 산다 하였고, 경제학과 선영이는 효용이 높은 쌀을 사겠다고 하였다. 다른 두 학생은 미처 답을 하지 못했다.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난민 이야기는 이렇게 '나다움'을 찾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작가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같은 고민이 남았다. 이 고민을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다. 당신의 ‘나스러움’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