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아픔

저자소개

유용주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 등단. 작품으로 시집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 『은근살짝』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어머이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젊었을 때』, 시선집 『낙엽』,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쏘주 한잔 합시다』 『아름다운 얼굴들』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소설집 『죽음에 대하여』, 장편소설 『마린을 찾아서』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 등이 있다.


서문


많이 아팠다.


길을 더럽히는 족속들은, 길은, 한번 지나가버리면 종적이 묘연하다느니, 자취가 없다느니,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길을 함부로 대한다. 그러나 길처럼 뚜렷한 흔적은 이 세상에 없다. 사진 판독기보다 더 극사실로 길은 지나간 사람들의 자취를 기억한다. 길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발자국 정도는 우습다. 지나가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 들이쉬고 내뱉는 숨소리에서 몸 냄새까지 오래도록 저장하고 있다. 길을 함부로 대하면 다시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길가에는 아무렇지 않게 있다가 결정적일 때 증언하는 나무와 풀이 무수하게 살아 눈 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함부로 내디뎌 신발 밑에서 깔려 죽은 뭇 생명들의 원혼이 수천 년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삶이라는 고행 앞에 다시 추운 겨울이 서 있다. 이 정도 아픔은 견뎌야지, 아픔이 없으면 견디는 힘도 사라진다.


순한 암소처럼 평생 엎드려 일만 하시다가 결국 일터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쉰이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누님을 대신하여 동터오는 새벽, 눈물로 씻은 쌀을 안치고 불을 지핍니다. 이 땅에 태어난 죄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뼈빠지게 일하고도 늘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어렵고 서러운 이웃들에게 (저 북녘 땅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조촐한 밥 한 상 차려 올립니다. 뜨끈할 때, 천천히, 많이많이 드십시오.


2002년 가을 초입 서산에서



― 유용주,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솔출판사2002,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