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1

사랑의 발명

저자소개

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아무튼, 메모』, 『앞으로 올 사랑』,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 등이 있다. 기후위기시대 예술창작집단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 일원이다.


유족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렇게 슬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게 너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의 슬퍼하는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 그들은 비극이 자꾸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기이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었지만 그 일을 재료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타인이 살아가는 힘을 뺏기는 일이 없는 데 힘이 되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믿어지지 않게도 희망 때문이다. 


희망은 정말 묘한 것이라서 희망을 가진다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족들은 차마 겪어내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슬픈 자아의 일부분은 눈물겨운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이 슬픈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유족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만 말한다. “유족이 되면 그렇게 돼버려요.” 


나로서는 그 답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곳을 바라는 열망이다. 희망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차마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변화뿐인데. 더 나은 곳으로의 변화만이 시간과 이야기 밖으로 떨어져 나간 가족들을 다시 시간과 이야기 속으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 한이라서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


나는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지 못했지만 그 사랑하는 가족이 살았을 수도 있는 세상의 많은 생명을 이미 구했고 또 구하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누구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누가 우리를 더 살아 있게 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충분히 존중받지도, 충분히 위로받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지금은 인간 정신을 극도로 왜소하게 만드는 목소리들이 힘을 얻는 시대다. 적응의 동물이 극도로 왜소하게 만드는 목소리들이 힘을 얻는 시대다. 적응의 동물인 우리는 이런 분위기에도 익숙해져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 보면 우리가 영영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불행, 슬픔과 상실,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인 희망과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법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 적응하느니 최선의 것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을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이런 정도의 정신적 붕괴를 감당할 수 없다. 유족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자신도 사랑과 이해를 원한다. 그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 정혜윤, 『삶의 발명』, 위고2023, 88~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