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6

그림책의 예술성과 완성도

류영선 평론가.


2003년, 한국 북스타트는 서울의 한 보건소에서 책꾸러미를 나누어주며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20년이 흐른 지금 북스타트는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북스타트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림책 작가, 평론가, 양육자를 만났습니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류영선 평론가입니다. 류영선 평론가는 작가이자 그림책 평론가로 여러 해 동안 북스타트 도서 선정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작가를 양성하는 워크숍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아기 그림책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림책의 예술성과 완성도를 강조하고 있어요. 그림책의 예술성은 북스타트 도서를 선정하면서 가장 자주 나누었던 주제예요. 국내에서는 영유아 컨텐츠를 교육서라고 생각하고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정보전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림에 대한 퀄리티가 떨어지기 쉬워요. 그림책의 구성과 주제의식 등에 대해서는 편집부에서 전문화 된지 오랜 것 같은데 그림책의 미적 가치를 해석하는 부분은 아직 미흡합니다. 


판형이나 지류 등 책의 만듦새 또한 중요한데요. 5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본다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작품을 손안에 넣는 행위가 되거든요. 어른들은 책의 내용이 뭔지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먼저인데, 아기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손에 쥐고 입으로 물고 오감을 총동원해서 감상하죠. 그래서 북스타트 도서 선정을 할 때도 글과 그림뿐만 아니라 책의 완성도를 종합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글, 그림과 잘 어우러지는 서체를 선택했는지, 책과 맞는 판형을 사용했는지, 어떤 지류를 사용했는지, 바인딩 기법은 어떻게 했는지… 특히 바인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인데요. 도서관에 가면 그림책이 다 떨어져서 테이핑한 것들이 많잖아요. 해외 도서판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책들을 보면, 하드커버 에디션Hardcover Edition 옆에 라이브러리 에디션Library Edition이라고 표기가 붙어 있곤 해요. 페이퍼백이 7~8천 원 정도 할 때 하드커버는 2만 3천 원에서, 많게는 3만 원으로 가격 책정이 될 정도로 바인딩과 지류 선택에 많은 제작비를 투자합니다. 그 책은 수만 번 펼쳐 봐도 찢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거죠. 


우리나라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 그림책 작가들을 탄생시켰고, 글과 그림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이루어 냈지요. 출판사가 책의 만듦새를 신경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인식이 중요한 거 같아요. 지금은 일만 원대 중후반을 넘기는 그림책을 만들기 쉽지 않거든요. 그림책을 소장하며 평생 본다는 인식이 생기면, 가격이 오르더라도 아깝지 않겠죠.


― 그림책의 예술성과 완성도를 느낄 수 있는 북스타트 아기 그림책을 한 권 소개해 주세요.  


우선 류재수 작가의 『하양 까망』보림, 2011을 소개하고 싶어요. 이 책은 흑백으로 된 자그마한 보드북인데, 제작비가 정말 많이 들어간 책입니다. 보통 책에 색을 많이 넣거나 화려한 색채를 살리기 위해서 별색 인쇄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이 책은 블랙과 화이트를 모두 별색으로 만들었어요. 블랙은 표현하기가 어려운 색채인데요. 작가가 인세를 낮춰서 받아도 되니 아기들이 ‘진짜 까망true black’을 볼 수 있도록 책값을 높이지 말고 보급해 달라고 요구한 책이에요. 


류재수의 『하양 까망』


흔히 어른들은 아기나 어린이를 아직 미완의 존재라고 생각하죠.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양육자분들이 백화점에서 자녀 물건을 고를 때 “애들 것이 왜 이렇게 비싸?”라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그 말이 참 오류가 큰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들 중에도 아기 그림책은 연습용, 포트폴리오용으로 만들어 본다는 분들이 있어요. 아이들 것일수록 더 투자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직도 전집이 아닌, 그림책 낱권을 사는 문화가 약하기 때문에 출판사 입장에서 부담스럽게 여기는 부분도 있고요. 우리 어린이들이 더 좋은 그림책을 볼 수 있게 하려면 영유아 그림책 운동을 지원하거나 좋은 영유아 그림책을 시상하는 등 영유아 그림책을 안정적으로 출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그림책의 미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림책을 더 소개해 주신다면요?


『누가 먹었지?』비룡소, 2002와 『누가 숨겼지?』 비룡소, 2002 같은 고미 타로 작가의 그림책이 생각나네요. 일본을 대표하는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고미 타로 작가는 왜 이렇게 아기들이 즐길 수 있는 책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했을까요? 작가 본인의 흥미도 컸겠지만, 일본 출판 시장에서는 아기 그림책을 잘 만들어서 보급해야 한다는 문화적 인식이 우리나라보다 좀 더 일찍 안정적으로 잡혀 있었던 덕분이기도 해요.  


고미 타로의 『누가 먹었지?』


보림출판사에서 나온 마리옹 바타유의 『ABC 3D』2014와 『10』2014도 소개하고 싶어요. 사실 『ABC 3D』는 인문예술서로 어른들을 위한 책인데, 아기들이 봐도 조형적인 감각을 학습할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여행을 간다고 해보면, 바르셀로나에 가서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을 보면서 인간이 종교를 위해 만든 공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고 인간이 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고민한 천재 건축가와 교감을 나누거든요. 그게 바로 예술가의 조형감을 학습하는 거예요. 『ABC 3D』 책을 펼쳤을 때 보이는 문자를 보면, 독자가 건축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죠. 한글이 우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조형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거든요. 알파벳 또한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죠. 이 책 속에서 ‘A’와 ‘L’과 같은 알파벳의 조형 감각을 효율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했어요. 텍스트도 따로 없어요. 마치 유럽에서 건축 견학을 하듯이, 아기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권해드리고 싶어요. 혹시 아기가 책을 끄집어내서 다 부셨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교육비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 북스타트를 하는 20년 동안 많은 환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신간 그림책에도 그런 변화가 담겨 있을까요?


조수진 작가의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글로연, 2023가 떠오릅니다. 위아래로 펼치는 파노라마북인데, 넘기면서 봐도 되고 족자처럼 걸어서 봐도 되죠. 책의 형식이나 제작의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그림책인데, 내용적인 부분도 흥미로워요. 취향이 갈릴 수 있는 책인데요, 그림적인 부분을 보면 과거에는 출간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에게 그래픽 노블이나 인디 코믹북 시장에 가보라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숀 탠Shaun Tan 작가가 『도착』사계절, 2008이라는 작품으로 인기를 끈 뒤부터는 영화적 구성이나 애니메이션적인 발상의 그림, 만화책에서 볼 수 있었던 프레임을 나누는 페이지 구성 같은 것들이 일종의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그림책을 소비하는 세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요. 예전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적인 것들이 문학성이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었죠. 사실은 그 이미지의 질이 중요한 건데요.


2023년 「북스타트 보물상자」 도서로 선정된 박은정 작가의 『책상 왈츠』보림, 2022라는 책도 떠오르네요. 책 내용은 간단해서 구성이나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미니멀리즘 미술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미니멀리즘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을 보며 치유의 미술이라고 하거든요. 이 책도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피식, 미소가 나고 힐링을 받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동물적인 감각은 어른보다 아기나 어린이가 더 노련하고 정확하게 느끼기도 하거든요. 보드북도 아니고 큰 판형이지만 큰 판형이 주는 스케일을 아기와 함께 감상해도 좋지 않을까요? 


― 20주년을 맞이한 북스타트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저는 기적의도서관 사업 초기에 감동을 받았는데요. 그때는 어린이도서관을 보급하는 일이 시급하니 건물 자체는 기능적인 면만 고려하여 지을 수도 있었는데 건축가를 섭외해서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도서관을 지으려고 노력했지요. 당시에는 그것을 사치스럽게 생각한 분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 지역사회에 아름다운 건축물 하나가 지어졌을 때, 그곳을 매일 오고 가는 아이들의 정서적 측면에서의 값어치는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북스타트를 운영해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북스타트는 다른 곳들보다 더 일찍이 도서 선정 심사에 그림의 퀄리티와 가치를 반영하고 고민해 주셨거든요. 


북스타트 운동이 앞으로 더 많은 가정과 독자를 만나 20주년이 100주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마치 맛집을 발견하면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싶어서 친구를 데려 가는 것처럼 독자들이 북스타트 그림책을 믿고 보고 나누어 볼 수 있도록, 북스타트 도서 선정을 통해 그림책 전문가로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담겨 있는 그림책 목록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김현빈·박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