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9

민주주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5권의 책

저자소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보기에 따라 위기라고 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전성기라고 할 수도 있다. 베를루스코니나 트럼프처럼 수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이 통치자로 뽑히는 경우도 있다. 금융위기나 테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하기도 하며 영국의 브렉시트에서처럼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불합리한 결정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최첨단 기술 발전과 고부가가치를 가능케 하는 신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층 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로 절망에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규모는 너무 커진 것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안들이다. 달리 보면, 이런저런 여러 도전과 혼란 속에서도 새롭게 길을 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대단해 보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는 한국의 촛불집회도 당당하게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숫자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는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는 나라는 10개 안팎에 불과했다. 2000년을 기준으로 볼 때도 중단 없이 민주주의를 해왔던 나라 역시 30개 정도였다. 그 숫자는 계속 늘었고, 현재 기준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불릴 수 있는 나라는 110개를 훌쩍 넘어섰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거의 절대적인 시간을 소수에 의한 과두정이나 군주정이 채워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민주주의 내지 민주정은 이상적인 최선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정치철학자 가운데 누구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전하고 노력하는 일에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일 뿐, 그것이 어떤 정치의 모양과 사회 내지 경제적 삶 나아가 문화적 양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는 끊임없이 갈등과 혼란 속에서 해당 사회 구성원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남겨진 체제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군주정의 군주화’, ‘귀족정의 귀족화’라는 말을 쓸 수 없는 데 반해,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말은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갖는 특징 내지 운명을 가리키는 핵심 개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를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더욱 더 민주화’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으로 지금의 민주주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심화 발전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민주주의의 고전 5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달이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는 민주주의론”을 목표로 쓴 책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민주주의자와 민주주의 비판자 사이의 논쟁, 나아가 학문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연구 전반을 조망해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에 있어, 필자는 로버트 달의 이 책보다 더 좋은 내용의 가진 책을 본 적이 없다. 민주주의의 귀결은 중우정일 수밖에 없다는 플라톤의 논변에 대한 가장 멋진 대응 논리를 보려 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들 사이의 비권력적 결사체를 꿈꾸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가장 뛰어난 반론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국가나 정부를 포함해 모든 인위적 규제나 강제를 없앤다고 해도 타인에 대해 강제나 폭력을 행사할 인간 집단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자는 모든 강제의 폐지가 아니라 강제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혹은 공적 강제에 책임성을 부과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다. 제약 없는 절대적 자유는 없다. 자유와 자율성이란, 인간사회의 불가피한 한계 내에서 최대화 할 어떤 속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유 내지 자율성을 최대화할 가능성은 국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보다 민주적 국가에서 더 크다. 그렇기에 우리의 선택은 현실 가능한 최선의 국가로서 민주적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다. 로버트 달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특별함 가운데 다른 하나는 이른바 제도론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들 모두에 맞는 최선의 제도적 대안이 왜 존재할 수 없는지를, 실증적으로만이 아닌 이론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분명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를 그 중심 원리로 삼는다. 그런데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논증할 수 없고, 실제에서도 특정 제도 대안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의 선택이 수렴될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도 그랬고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다양한 제도 형식으로 실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늘 제도와 시스템을 앞세우며 최선의 제도 내지 최선의 헌법이 있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이 책 읽기를 권하고 싶다.
 


존 던은 영국 캠브리지 학파를 대표하는 정치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수수께끼를 다룬다. 2천 5백 년 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에서 거의 200년 가깝게 민주주의를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 등 이 시기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이었다. 왜 고대 민주주의자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또 다른 수수께끼를 말하라면 이렇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정치 체제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체제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때는 직업 정치가는 물론 관료제도 없었고 정당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민주주의라는 말을 같이 쓰게 되었을까? 덧붙여 이런 수수께끼도 이야기할 수 있다. 고대 민주주의로부터 2천년이 지나 인류가 다시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을 때 그 과정에서 어느 철학자도 민주주의를 지지하거나 이론적 기획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존 로크,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제임스 매디슨 등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의 사상적 정초자로 알고 있는 철학자들 누구도 민주주의를 인류가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해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도 모두 공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자라고 말하긴 어렵다. 분명 이들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이 현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지만, 당시 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자 내지 회의론자였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일 수 있는 수수께끼는 이밖에도 많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제도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른바 보수파 정치인들에 의해 도입되고 정당화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된 데에는 왕정복고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노력도 컸다. 가난한 보통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군주정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예상을 한 사람도 있었고, 선거권 개혁을 통해서라도 확산되고 있는 사회 갈등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려 깊은 보수파도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른바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상과 의도에서 비롯된 바도 크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들로 가득하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을 흥미롭게 여긴다면 존 던의 책을 직접 읽어야 할 텐데,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그보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민주주의는 이를 지지하고 옹호하고 또 내걸고 싸웠던 사람들만의 일관된 논리와 체계 위에서 형성,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면한 여러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한, 때론 창의적이고 때론 오해를 동반한, 단편적 대응들의 긴 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온 특정의 사상적 혼합물이자 제도적 복합체라는 사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답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럴 수 없고, 오히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빈 여백은 오늘 이곳에 사는 우리들이 개척하고 채워가야 할 ‘정치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보비오는 이탈리아 출신의 법철학자이지만, 결코 그렇게만 한정지을 수 없는 대사상가의 한 명이다. 자유주의 없이 현대 민주주의는 이해도, 설명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자유주의를 한국의 현실에서는 다루기가 너무 어렵다. 진보파 가운데 자유주의를 반공주의의 유사어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근대 유럽의 상업부르주아지처럼 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사회 세력이 한국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오히려 국가에 의존해 정책적 혜택을 최대한 얻고자 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에 반하는 측면이 크다. 학생운동이 자유주의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전망은 어떠한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자유주의를 이해해야 할 이유가 꼭 있는가? 혹시 이런 의문을 갖는다면, 먼저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이론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보비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유주의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철학 내지 사상이다. 여기까지는 쉽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수용하는 과정이 얼마나 엄청난 희생과 피를 불렀는가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처음으로 지배자의 관점이 아닌 관점 혹은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 공적 권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따진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통치자들이나 지배자들이 과연 이런 관점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한 헌법적 명령으로 생각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유주의의 “도덕적 절대 명제” 위에서 가능했다. 자유주의가 곧바로 민주주의인 것은 절대 아니지만,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기본권에 기초를 둔 입헌주의 없이 민주주의가 설 수는 없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자유주의”를 생각해야 한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렇다. 하나의 자유주의는 “정부 내지 국가의 존재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증진하는 목적”을 갖기에 필요하다면 재분배와 복지 기능을 확대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다른 자유주의는, 국가나 정부란 “어떤 경우에도 필요악”에 불과하기에 가능한 그 기능을 최소화하고 시장경제와 법치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본다. 전자의 자유주의를 절대국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제한 정부론”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자유주의는 사회복지국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최소 정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말해 전자의 제한 정부론은 정부나 국가도 언제나 나빠질 수 있기에 책임성의 범위 안에 묶어두면서도 개개인의 자율적 의지를 증진하기 위해서도 좀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정부 기능은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중첩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크다. 반면 후자의 최소 정부론은 사회를 보호하려는 정부의 복지 및 재분배 기능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협한다고 보면서 정치나 입법의 기능이 커지는 것을 반대하기에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지점이 넓고 크다. 어떤 자유주의여야 하는가? 탈규제, 민영화, 시장자율화, 정부축소와 긴축재정 등을 앞세운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정부의 역할을 둘러싼 갈등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자기 삶의 저자author로서 개인”과 “특정 종류의 공동체 내지 특정 기능의 정부를 지지하는 개인” 사이의 조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보비오 책을 통해 우리는 1) 개인 권리 중심의 자유주의에 기초를 두면서도 2) 평등과 사회정의를 진작하기 위한 입법 및 적극적 정부 역할을 지지하고 3) 국가관료제행정권력과 자본주의경제권력가 만들어내는 부자유 혹은 불평등 효과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미래랄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중첩하는 범위와 영역은 얼마든지 넓고 깊게 개척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게 되리라, 필자는 믿는다.


 
콜린 크라우치는 영국의 사회학자로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 위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는 2차대전 이후 약 25년 동안 유럽 사회가 경험한 ‘민주적 전환democratic moment'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때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과 자본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 위에서 일종의 계급 타협을 이끌어 갔다. 정당 정치 역시 뚜렷한 이념적, 계층적 차이 위에서 사회보호 기능을 확대해 갔다. 한마디로 말해 노사관계와 정당체계라는 두 축이 잘 기능했던 시기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살펴본 전후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지난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한다. 주기적인 선거와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등 형식과 절차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분명한데, 그것의 내용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과 배치되는 사회경제적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 또한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선거는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냉소 가운데 치러지는 정치 계급들 사이의 쇼 비즈니스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정당 간의 정책이나 이념적 차별성은 모호해졌고, 후보자 개인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실상 마케팅과 광고 기법이 중시되는, 일종의 “통제된 스펙터클”에 불과한 선거가 된 것이다. 정부는 어떤가? 기업들의 로비를 수용해 공공 부문을 팔아치우거나 민간 위탁을 주는 일에 열심이었다. 교육, 의료, 보건 등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되던 공공 서비스가 사적 사업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은 모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법과 절차는 지켜지지만 그것의 실제 내용은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폭넓게 대변하기보다는 기업 엘리트나 특수 이익집단의 요구가 더 잘 관철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포스트 민주주의의 여러 문제들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 전에 노동과 정당의 쇠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콜린 크라우치는 포스트 민주주의가 심화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면, 정치의 적극적 역할이 살아나야 하고 이를 통해 노사관계도 변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가 주문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정부 정책은 기업의 압도적 지배력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공공사업에 대한 통제권이 기업에게 넘어가면 정부는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부패하게 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둘째는, 정당이다. 정당은 사회적 요구에 민감한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정당의 대중운동적 기반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정당도 조직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 시민과 사회운동 역시 정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정당을 버리고 사회운동을 택할 수는 없다. 사회운동에 의한 정치 행동은 개별 법안과 정책, 개별 이슈에 따라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부자와 권력 있는 자에게 훨씬 크고 체계적인 이점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당을 버리고 사회 운동을 택하는 것은 포스트민주주의의 승리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로부터의 대중적 요구와 참여를 결집하지 못하는 정당은 기업 권력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며, 반대로 강한 정당을 만드는 목적을 도외시한 사회 운동 역시 기업 권력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없다. 다시금 강한 정당을 만들고 당의 대중적 기반을 활성화하는 것, 시민들도 정당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 이것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도 핵심이라는 것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을 꼽으라면, 민주주의를 일종의 ‘사회구성체’로 다룬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단순히 정치의 영역을 구성하는 제도와 체계로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민주주의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앞서 살펴본 콜린 크라우치와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콜린 크라우치가 기업 권력 내지 경제 권력에 주목하는 점이 컸다면, 최장집은 정당 정치의 약화가 가져온 결과로서 ‘강한 국가의 귀환’에 좀 더 주목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기업 권력의 영향력에서 오기보다는, IMF로 대표되는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왔고, 이 과정과 결과를 주도한 것은 국가 관료제였다. 한마디로 말해 “약한 정당과 배제된 노동에 기초를 둔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는 재벌과 주류 언론으로 대표되는 경제 권력의 강화는 물론, 국가 관료제로 대표되는 행정 권력의 강화를 낳았고, 이것의 사회적 결과가 중앙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의 소외, 불평등한 엘리트 구조의 동심원적 심화, 빈곤과 사회 해체 등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을 꼽으라면, 민주화 이전에 형성된 여러 구조적 제약 조건이 민주화 이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해방 이후 국가형성기의 여러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 권위주의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낳은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고 그 기초 위에서 민주화로의 전환과 그 이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다룬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한국 민주주의가 변화시켜 가야할 구조 개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민주화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제약 조건 때문에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런 제약 조건을 개선해 가는 데 무능력했던 민주정치에 더 많은 인과적 비중을 둔다. 요컨대 그런 구조적 제약 조건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이 민주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렇기에 정치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더 넓게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을 포함한 다양한 결사체가 활동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만들고, 냉전 반공주의의 이념적 제약을 완화해갈 수 있도록 자유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강한 국가 중심성을 다원화할 수 있는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특수한 경험을 보편적인 민주주의 이론으로 더 깊고 넓게 조망하면서 변화의 계기를 찾고자 한다면, 단연 이 책을 집어들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잘 실천한 나라? 그런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운영되는지’를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는 정치 학습의 시간도 필요하고, 이견과 평화적으로 논쟁할 수 있는 정치 문화가 성숙해질 시간도 필요하다. 단지 정치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주권자인 일반 시민도 학습과 적응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도 정치도 배워야 하고 그것도 잘 배워야 한다. 우리도 이제 29년째 민주주의를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혼란, 갈등을 경험해왔다.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민주적 지향이랄까 가치에 맞게 사회를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답을 곧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의 고전을 읽으면서 좀 더 깊은 이해와 넓은 상상력을 키워갈 수는 있다. 위에서 소개한 책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아주 좋은 내용을 가진 우리시대 민주주의의 고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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