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8

혐오의 시대, 혐오의 언어

저자소개

이택광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이자 대중문화 비평가. 영국 워릭대학교와 셰필드대학교에서 각각 철학과 문화 이론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 영역은 현대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마녀 프레임』,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이택광 │ 대중문화 비평가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이자 대중문화 비평가. 영국 워릭대학교와 셰필드대학교에서 각각 철학과 문화 이론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 영역은 현대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마녀 프레임』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2016년 한해를 풍미한 단어들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지는 단어는 혐오일 것이다. 여성혐오로부터 동성애혐오, 그리고 민주주의 혐오까지 혐오라는 단어가 포괄하는 영역은 다양했다. 혐오는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혐오는 일종의 감정 작용이다. 물론 혐오라고 해서 다 같은 감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 또는 외국인 혐오는 동일한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기본적으로 민족국가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기동의 결과물이라면, 외국인 혐오는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선 국제화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국처럼 여성 혐오자나 동성애 혐오자이면서 외국인에 대해 관대하거나, 반대로 여성과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이들이 외국인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도 감정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여성 혐오가 다분히 상대방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경멸의 감정에 기초한다면, 동성애 혐오는 역겨운 감정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미국의 법철학자인 윌리엄 이언 밀러가 집필한 『혐오의 해부The Anatomy of Disgust』는 혐오 감정에 대한 명쾌한 정리를 보여주는 저서이다. 밀러는 혐오의 정서 중에서도 경멸과 역겨움을 정치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정 작용으로 본다. 경멸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한다면, 역겨움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관용에 대한 저항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경멸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개인의 자격에 대한 비난에 동의하지만, 역겨움은 관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감정기제인 셈이다. 따라서 여성 혐오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일정하게 소멸할 수 있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그 자체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나치가 동성애 혐오를 정치적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올해에 쟁점이 되었던 문제 중 하나가 퀴어퍼레이드였다. 퀴어퍼레이드를 금지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동성애자들은 ‘공연음란행위’를 하는 범법자들이었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그 무엇도 아닌 ‘시민의 권리’였다. 시민의 재산인 서울광장을 동성애자들에게 대여해 공연음란행위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시장이 “범법행위”를 방조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유는 간단하다. 범법자들로 규정하는 순간, 효과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범법이라는 것은 시민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는 행위이고, 따라서 시민의 자격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결코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원한 것은 동성애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범법자는 역겨움의 대상이지 깔보고 업신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이 원한 것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조직해내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에서 김진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반공이라는 대의가 사라진 조건에서 동성애 반대는 기독교 극우세력을 다시 결집하게 만드는 정치적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전복시키기 위한 ‘역겨움의 정치’를 전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공격 대상이 동성애자들이지만,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경멸의 대상이 점점 사라질수록 ‘역겨움의 정치’는 훨씬 다양한 양상으로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역겨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면, 누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극우정치는 이런 강요된 침묵에서 움트는 것일 터이다.

‘인간 자본’의 범주는 이런 의미에서 손쉽게 시장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을 내포한다. ‘인간 자본’이 전제하는 ‘완전한 자기’는 ‘즐겨라’라는 무의식의 명령에 충실한 ‘소비자 주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완전한 자기’는 시장과 소비에 대한 비판적 또는 냉소적 태도를 보여주는 주체이다. 이 ‘완전한 자기’는 시장의 등가성을 혐오한다. 



앞서 혐오의 감정이 크게 경멸과 역겨움으로 나뉜다고 언급했는데, 경멸이 자기보다 능력을 덜 갖췄으면서도 평등의 원리에 따라 공평하게 몫을 나눠가지는 이들에 대한 수동적인 감정이라면, 역겨움은 아예 처음부터 그 평등의 원리에서 배제시켜 버려야 하는 이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감정으로서 작동하는 혐오는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와 관련 있다. 알랭 바디우가 『우리의 병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에서도 언급하듯이, 지금 목도하는 한국 사회의 혐오 정서는 많은 부분 시장주의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 전제하는 등가성은 관용의 원칙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관용의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시장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특정한 상품만을 독점 판매하는 구조가 시장을 파괴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진실이다. 따라서 관용은 시장주의의 미덕이다. 그러나 이런 관용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시장주의가 표방하는 관용은 극단주의의 저항에 부딪힌다.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관용』에서 지적하듯이 관용은 일상의 차원과 정치의 차원으로 나뉘는데, 결과적으로 후자가 전자를 질식시키려는 것이 최근에 두드러진 양상이다. 정치의 차원에서 관용이라는 것은 시장주의의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을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정치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관용의 이중성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혐오 감정 중 하나인 바로 역겨움이다. 역겨움은 어떤 대상을 원초적으로 제거해 버리려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무엇인가를 역겨움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순간, 관용의 원칙은 정지한다. 역겨움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눠서 후자를 박멸해야 한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민주주의가 작동할수록 강해지는 역겨움의 감정 정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역겨움의 감정 정치가 글로벌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쾌락의 평등주의를 전복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소비주의는 욕망의 좌절을 겪는 허무주의적 주체를 압박한다.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이런 이데올로기는 시기심과 역겨움을 쉽사리 결합하게 만든다. 아우렐 콜나이가 『역겨움On Disgust』에서 지적하듯이, ‘역겨움’은 생래적인 거부반응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 거부반응은 대상에 대한 사유를 정지시킨다. ‘그냥 싫다’는 말만큼 절대적인 표현도 없다. 

최근 불거진 ‘메갈 현상’은 ‘일베 현상’의 ‘미러링’이라고 정의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이런 혐오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베 현상’이 사실상 혐오 표현이라는 사실을 ‘메갈 현상’이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이 둘은 서로 닮아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지양해야한다는 모순에 처한다. 이 문제를 나는 ‘관용에 대한 시험’이라고 보는데, 결국 관용은 혐오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인 경험이다. 자유 시장의 ‘정의’는 결코 혐오를 해결하지 못한다. 마녀사냥을 멈추게 만든 것이 사법제도의 ‘입증주의’였다는 역사적 진실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혐오 문제는 법적 논쟁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법 자체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법은 모든 것을 ‘정의’의 저울에 올려 균형을 맞추려고 하지만, 혐오는 처음부터 불균형의 산물이다. 

따라서 ‘여혐’과 ‘남혐’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정의’의 오류인 것이다. 진정한 ‘정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조건에서 균형을 잡도록 만드는 정치적 작업이다. 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법은 내재적이라는 점에서 전체를 모두 재현할 수 없다. 혐오는 법에 따라 계속 다시 정의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혐오를 ‘역겨움’으로 폐색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공론에 부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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