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처음 듣는 이야기

저자소개

저자 ·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거리의 사상가’로 불리는 일본의 철학 연구가, 윤리학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무도가.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발견해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프랑스 문학과 사상을 공부했다. 도쿄도립대를 거쳐 고베여학원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11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고 현재는 교토 세이카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현재까지 공저와 번역을 포함해 10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주요 저서로 『망설임의 윤리학』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아저씨스러운 사고』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사가판 유대문화론』(고바야시 히데오 상 수상) 『하류 지향』 『로컬로 턴』 등이 있고 정신적 스승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 『초월, 외상, 신곡-존재론을 넘어서』 『폭력과 영성』 『모리스 블랑쇼』 등을 번역했다.

들어가는 말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연차 총회에서 도서관의 역할에 관한 제언을 듣고 싶다고 요청해 주셔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규슈의 어느 시립도서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도서관은 민간업자에게 업무를 위탁한 곳이라, 업자는 제일 먼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향토사 자료를 폐기하고 본인 소유 회사의 불량 재고였던 쓰레기 같은 고서를 구입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의 학술적인 분위기를 해쳤음에도 도서관에 카페를 들이는 등 세상의 유행을 따르다 보니 고객 만족도가 높아져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민간 위탁을 추진한 시장은 “봐라, 내 말대로 됐지?” 하고 의기양양했고요.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을 방문자 수나 대출 도서 권수 등의 수치로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수요와 공급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시장 원리주의자의 발상으로 보입니다.


그때 문득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라는 말이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정말로 문득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정말로 그렇네. 왜 도서관은 사람이 별로 없어야 도서관다울까?” 하는 생각에 잠겨서 강연 내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서관 열람실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입구 밖까지 긴 줄이 늘어서는 것은 도서관을 즐겨 찾는 사람에게도, 도서관 사서에게도 그다지 반가운 풍경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밤낮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한 도서관이 이상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단 도서관 관계자 중에는 없을 겁니다.


도서관은 보통의 ‘점포’와는 다른 공간입니다. ‘도서관 방문자 수가 두 배 늘었으니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이 두 배가 되었다’는 단순한 추론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도서관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가 그동안 방문한 도서관이나 도서실 가운데 지금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은 모두 사람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제가 가기 전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한 고문서를 노트에 필기하며 읽던, 어스레하고 고요한 파리 국립도서관 열람실. 오래된 문서를 장시간 심취해서 읽었던, 석양이 들이비친 로잔 올림픽 박물관 도서실. 문헌을 찾느라 몇 시간이나 보냈던 도쿄 도립대학도서관의 싸늘한 폐가 서고. 저에게 ‘정겨운 도서관’은 모두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 없고 조용한 공간이 아니면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테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면 제가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의 거의 모든 책을 저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책의 99.999999퍼센트를 저는 아직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집니다. 제가 모르는 세계가, 그리고 자칫하면 제가 죽을 때까지 모르고 끝날 세계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서 종교적이기까지 한 감동을 느낍니다.


이 많은 책 가운데서 제가 평생 읽는 책은 정말로 한정된 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연이 있는 책인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서가 사이를 배회하다가 문득 어떤 책에 손이 갑니다. 저자 이름 정도만 겨우 알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을 썼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그런 책. 높은 확률로 그 책에는 제가 꼭 알고 싶었던 지식, 그때 제가 꼭 읽고 싶었던 말이 쓰여 있습니다. 정말 높은 확률로 그렇습니다.


사람 없는 도서관 안을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한 경험이 있는 이라면 저의 이러한 경험적 확신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활성화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도서관에 사람이 없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하루 중 반 이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365일 24시간 열린 도서관이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추구하는 곳은 실은 도서관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꿈꾸는 시설은 디지털 아카이브로 대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컨대 ‘지금 찾아보고 싶은 것이 있다’, ‘리포트를 완성하려면 내일까지 읽어야 할 책이 있다’ 같은 수요를 가진 사람들은 장서가 모두 디지털화되어 집에서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만으로 필요한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도서관에 가지 않겠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서관이란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이 드는 장소입니다. 세계는 미지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에 압도당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 점에서 기독교의 예배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 불교의 사원 혹은 신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런 곳들에는 사람들이 때때로 와서 기도를 하고 떠나갑니다. 특별한 종교 행사가 없는 한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비어 있고요.


아름답게 정돈된 넓은 공간이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아무도 없이 방치된 상태를 ‘공간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교회 예배당을 ‘노래 교실’이라든지 ‘자산 운용 설명회’라든지 ‘재고 상품 세일 장터’로 빌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이용자들이 떠나고 난 뒤 기도를 하러 예배당에 온 사람들은 “이게 뭐지? 뭔가 공기가 흐트러져 있어” 하고 느낄 것입니다. 무조건 느낄 겁니다. 그 정도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신에게 기도를 올리러 자발적으로 예배당에 오지 않을 테니까요.


이 공기의 흐트러짐은 많은 사람이 거기서 기도 이외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발생합니다. 공기가 진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아마도 꼬박 하루쯤 그 장소를 비워 놓지 않으면 공기의 흐트러짐이 치유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느냐 물어 봤자 제게 특별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초월적인 것, 외부적인 것, 미지의 것을 어떤 장소에 불러오려면 그곳을 비워 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천장까지 빽빽이 가구와 집기로 채워져 있고 24시간 내내 사람들이 오가는 예배당이 기도에 걸맞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곳이어야 합니다. 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자택 1층을 도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도장에 내려가 짧은 독경을 하는 것이 저의 일과입니다. 신도의 축사와 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전날 수련이 끝난 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도장의 문을 열면, 싸늘한 공기가 들어오며 공기의 입자가 잘게 쪼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물게 이틀간 도장에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때는 문을 열면서 조금 두근두근합니다. 도장의 수련 준비가 제대로 됐다는 느낌 때문이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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