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30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장일순의 생명사상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8강: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장일순의 생명사상
   

함석헌: 씨알 철학과 동양 철학



이번에는 유영모의 오산학교 시절 제자였던 함석咸錫憲(1901~1989, 날수로 3만 2,105일)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오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이후 1960년대까지 한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 함석헌이 퀘이커교도가 되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서로 관계가 멀어집니다. 


이는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실천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함석헌을 통해 널리 알려진 씨알이라는 말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영모의 우리말 창조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또 ‘얼’을 강조한 것도 유영모가 ‘얼나’를 강조했던 맥락을 함석헌이 계승한 부분입니다. 함석헌 사상의 30장 함석헌 씨알 철학과 동양 철학 많은 부분은 유영모에게 빚지고 있는데, 사유의 폭에서는 함석헌이 더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씨알이 ‘참나’, ‘얼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유영모가 개인적 실천을 통해 그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함석헌은 사회적 실천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 하면 우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떠오릅니다. 좁게는 자유당 독재를 비판한 글이지만, 실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는 한국인 모두를 향한 외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서도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외침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지는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보면 쉽게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했고, 분단 이후 자유당 정권 시기에는 자유당 독재를 비판했으며,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박정희의 군사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고, 1945년에는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어 50일간 구금되었고,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때문에 자유당 정권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20일간 구금되었습니다. 이러니 평생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자신이 읽은 고전을 가지고 시대를 재해석하고 권력과 불화합니다. 고전을 그냥 글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고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논어』나 『맹자』 같은 유가 문헌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 도피나 은둔으로 읽기 쉬운 『도덕경』이나 『장자』를 읽을 때도 저항의 철학, 저항의 문학으로 읽어 냅니다. 심지어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처럼 지배자의 편에서 쓴 글을 읽을 때도 그 내용을 인용하여 군사 독재를 비판합니다. 1963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글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토황소격문」을 인용하여 “최치원이 신라 때만 있고 지금은 없는 줄 아느냐. 지금도 세상을 망가뜨리는 놈은 ‘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온 천하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너를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이미 몰래 죽일 것을 의논했을 것이다]’라 한다”라고 하여 5・16쿠데타를 반란이라고 대놓고 비판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쿠데타 세력을 반란 세력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고전 읽기는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도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고전을 읽다


함석헌의 모든 글에는 동아시아 고전이 녹아 있습니다. 먼저 그가 노자와 장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성서를 읽으면서 버텼고, 군사 독재 시절에는 『도덕경』과 『장자』를 읽으면서 견뎠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노자·장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숲속에 깃들인 뱁새’같이 ‘시냇가에서 물 마시는 두더지’같이 날마다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 나는 일제 시대에 구약 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 마찬가지로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 「노장을 말한다」, 『함석헌 저작집 24』(한길사, 2009)에서


함석헌은 여기서 자신은 노자, 장자를 그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흔히 고전을 읽기만 하고 삶을 돌아보지 않을 때 ‘책 따로 나 따로[書自我自]’라고 하는데, 함석헌의 경우는 노자, 장자가 저기 높은 곳에 있고, 나는 여기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자, 장자가 곧 내 삶이라는 식입니다. 고전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전이 된 삶’이라고 해야 할 수준인데, 이런 식의 고전 읽기는 스승 유영모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일상적으로 고전을 읽으면서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제의 압박 아래에서 성서를 읽으며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몇십 년 동안에는 노자, 장자와 대화한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했으니까요.


우리가 고전을 읽는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지식을 쌓아서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아니면 지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함석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살기 위해서 고전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고전을 읽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흔한 고전 해설가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지금까지의 고전 해석을 두고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권위주의인데,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면 된다고 간단히 이야기하죠. 석가나 예수는 기존의 경전이나 율법서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았죠. 그러니 우리도 당연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우치는 방식’으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어서 그들은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었다”라고 했는데, 결국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위에 얽매여 현재의 삶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탈권위의 고전 읽기는 함석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장자』는 그저 단순히 시원한 문학만이 아니다. 피눈물이 결정된 저항의 문학이요, 삶의 부르짖음이다. …… 그렇게 볼 때 평화주의란 결코 평안에서 오는 한가한 말이 아니요,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비폭력의 부르짖음임을 알 수 있다.

—함석헌, 「노장을 말한다」, 『함석헌 저작집 24』(한길사, 2009)에서


『장자』를 저항의 문학으로 보고 비폭력 사상으로 읽어 낸 건 탁월한 견해예요. 저도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장자』를 저항의 문학으로 읽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장자』를 현실 도피의 텍스트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중국 학자들 중에서도 장자를 무기력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요. 아무 힘도 없고 실천도 못 하는 지식인이어서 역동적이지 못하다고 봅니다. 장자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낮잠이나 자겠다고 했는데, 낮잠 자는 게 어떻게 저항인가 싶겠지만 낮잠 안 자는 사람들이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는 상황에서는 낮잠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낮잠이나 자는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 게으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살았던 시대에 성실하고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이 한 일이 전쟁에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성공하면 남을 죽이고 실패하면 자기가 죽죠.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데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요? 


지금까지 우리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뜻보다는 그 뵈는 일과 물건을 가지고 서로 자랑을 목적으로 삼는 역사였지만, 이제부터는 뜻이 주장하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이 도리어 자랑이 되게 됐습니다. 세계의 양심 앞에 우리가 지고 있는 고난의 짐에서 더한 발언권이 어디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 바로 우리 자신을 알기만 하면 정말 우리 몫을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함석헌, 「우리 민족의 이상」, 『함석헌 저작집 13』(한길사, 2009)에서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는데, 나중에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비참과 부끄러움의 연속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대로 가르쳤다가는 학생들이 비참해 할 것 같고, 그렇다고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도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있다”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의 역사에 적용한 셈인데, 이후 함석헌은 한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모든 사건을 해석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로 규정했지만 여기서 그것이 곧 평화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의 세계가 정의의 시대가 아니라 불의의 시대였기 때문이며, 앞으로 정의의 시대가 오면 우리 민족의 역사, 곧 평화의 역사가 세계에서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함석헌은 다른 글에서도 한국의 역사가 하찮게 보이는 것은 침략이 정의로 되어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함석헌의 이런 역사관에는 성서의 영향이 크지만 동아시아 고전과 함께 36세 때 번역했던 「서풍의 노래」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서풍의 노래」 또한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시기에 번역했으므로,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은 것이 자연의 법칙이듯 고난 끝에 영광이 오는 것도 역사의 필연이라는 희망을 실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세상을 떠난 지 4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평화의 시대는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