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5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세계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7강: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세계



삶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시를 쓰다



해탈한 자의 글씨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봉은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화엄경華嚴經》을 비롯한 불경 목판 3,000여 장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를 알리는 현판이 ‘판전版殿’이다. 1856년에 제작된 이 현판의 글씨는, 얼핏 보면 그어진 획마다 삐뚠데다 글자의 모양이나 크기 또한 제각각이라 마치 글씨를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가 서툴게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글씨는 필법이라면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다. 그것도 왼쪽 낙관부에 ‘일흔 하나 된 노인이 병중에 썼다[七十一果病中作]’고 쓰인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그러니 이 글씨는, 이제는 무거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붓의 무게마저 내려놓은 노인의 마음이 담긴, ‘해탈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글씨’다.


김정희는 글과 그림, 그리고 고금을 관통하는 학문으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문자 그대로 학예일치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그저 눈으로만 봐서는 품은 뜻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삶을 통한 체험의 무게와 더불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곁들이지 않고서는 그의 글도 그림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희의 예술은 눈에 보이는 단편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정신을 꿰뚫어 보라고 요구한다. 우리가 감각기관인 눈에만 의지할 때 그 정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물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눈이 필요한 까닭이다. 김정희는 그런 눈 가운데 하나로 문자를 제시한다. 선현의 글에 담긴 정신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눈을 뜨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정희가 그림을 그리는 화인들에게 늘 요구했던 ‘문자와 책의 향기’였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껏 전혀 다른 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과 글을 함께 만난다. 그림은 글이 되고 글은 그림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보아서는 보이지 않고 잘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시련 속에서 탄생한 걸작





1844년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온 지도 어언 다섯 해가 흘렀다. 한 때 생사를 같이하던 벗들도 이젠 소식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또 다시 육지에서 보내 온 거질의 책이 바다를 건너 그에게 전해졌다.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만 리 바깥, 북경에서 여러 해를 두고 구해서 보내준 귀중한 책이다. 모든 사람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데 이상적만은 옛정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해준 것이다. 김정희는 그를 칭찬하는 뜻에서 갈라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발문을 썼다. 조선 문인화의 최고걸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판전’ 글씨가 서툴러 보이는 만큼이나 ‘세한도’ 또한 제대로 그려진 사물을 찾기 어렵다. 단지 네 그루의 나무와 집 한 채만 그려져 있으니 여백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먹도 충분치 않고 붓도 온전하지 못한 듯 여기 저기 갈라진 붓 자국이 화인이 마주한 힘겨운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무슨 나무인지 형태를 분명하게 알아보기 힘든 왼 쪽의 두 그루 나무, 그리고 세부 묘사가 전혀 없는 한가운데의 집을 보면 기우뚱하기도 하고 대칭이 맞지 않아 허술하기도 하여 도대체가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고 그린 것 같지 않다. 마치 앞으로 더 가필해서 완성해야 할 그림이거나 아예 그리다가 흥취가 사라져 붓을 던져버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림을 처음 들여다보면 그림보다 오히려 오른쪽 위에 단정하게 쓰여진 ‘歲寒圖세한도’라는 세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제목이다. 그림에서 이런 식의 제목은 감상을 도와주기보다는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뜻이 분명한 글은 때로 보는 이의 예술적 상상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희는 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고 사의寫意를 중시했다. 이런 태도 때문일까, 김정희의 글자체는 그림 같다. 그럴 만큼 김정희는 글씨를 그림처럼 쓰고 그림에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세한도’의 경우는 더 그렇다. ‘세한도’라는 제목에는 “이 그림은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김정희의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정희로 하여금 ‘세한도’라는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 제자 이상적은 자가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이다. 그의 가문은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譯科 합격자를 배출한 우봉이씨牛峯李氏 집안으로 그 자신도 청나라에 열두 차례 갔다 온 역관이었다. 사대부가 아닌 중인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일찍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금석학과 서화를 익혀 청나라 문인 지식인들과 교유한 당대의 명사였을 뿐 아니라 홍세태洪世泰, 이언전李彦瑱, 정지윤鄭芝潤과 함께 이른바 ‘역관사가譯官四家’로 불렸을 만큼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일찍이 헌종이 그의 시를 애송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문집 이름을 임금의 애송을 은혜롭게 여긴다는 뜻에서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 짓기도 했다.


이상적이 처음 김정희를 만난 것이 언제인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1831년김정희 46세, 이상적 28세에 청나라로 가는 이상적 편에 유희해劉喜海에게 보내는 탁본을 부탁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김정희가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자 이상적은 여러 차례 청나라에서 구한 서적과 금석문을 보내 스승을 위로했고 그로 인해 ‘세한도’가 그려진 것이다.







(본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