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1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4강: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



말과 행실이 일치한 시대의 스승, 이황



이황은 혼란기였던 연산군 시대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오대에 걸친 정치적 격동기에 활동합니다.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1498, 4세가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1504가 일어났죠. 특히 19세 되던 해에는 정암 조광조가 희생당한 기묘사화1519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45세 때 일어난 을사사화1545에는 자신의 형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삭탈관직당합니다. 형제가 사화에 희생된 셈입니다.


이황의 형제애는 남달랐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둘째형이 손가락을 베었는데 이황이 울었대요. 어머니가 형은 안 우는데 너는 왜 우느냐고 하니, 손가락을 베었는데 어찌 안 아플 수 있겠냐고 했답니다. 그 형이 사화에 희생을 당해 그때부터 출사를 완전히 단념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 때문에 출사하지 않는다고 써 놓은 글은 없습니다만,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대는 조선 사회가 흔들릴 정도의 혼란기였습니다. 실제 이황, 조식,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 사회가 막대한 타격을 입습니다. 이이는 틀림없이 화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측을 했고 불행히도 그 예측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조식은 그런 일을 미리 대비했다고 할 수 있고요. 예언을 한 게 아니에요. 유학자는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나라 꼴을 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예측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던 겁니다.


이황은 평생 동안 도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합니다. 치열한 학문적 열정은 동시대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 자신이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황의 학문적 축적은 저술뿐만 아니라 당시 학자들과 교환한 편지글에 남아 있습니다. 그중 정유일鄭惟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자학에 대한 그의 치열한 탐구심을 엿볼 수 있는데 잠깐 보겠습니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다. 그 말 중에 간절하고 통렬하여 읽는 사람에게 절실하게 도움이 되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세 번 반복해서 살피고 읽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如針箚身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如寐得醒


─ 『퇴계집退溪集』, 「정자중에게 보내는 편지與鄭子中


이황이 주자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 독서가 이 정도 되어야지 글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겠죠. 바늘로 찌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은 사진을 이야기할 때 푼크툼punctum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푼크툼은 사진을 볼 때 화살에 맞은 듯한 전율을 느끼는 것인데 이황은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봅니다. 또 글을 읽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은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이황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동시대의 젊은 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고 이것이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四端七情論爭입니다. 줄여서 사칠 논쟁이라고 하는 이 논쟁은 조선 주자학의 역사적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철학적 전환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한국 철학사에서 아주 중대한 사건의 하나입니다.


논쟁 자체가 상당히 극적으로 시작됩니다. 1558년에 시작된 논쟁 당시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였습니다. 지금 58세면 젊은 편에 속하지만 그 당시에는 오십이 넘어 부모상을 당하면 나라에서 지팡이를 줄 정도로 원로로 대우받았습니다.


성균관의 기록을 보면 이황이 젊은 시절 두 차례 학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한 적이 있고 출사한 뒤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기도 했습니다.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 격이지만 그 당시에는 국립대가 성균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황이 대사성을 하고 있을 때 기대승은 막 성균관에 들어온 학생이었는데 이 두 사람이 논쟁을 한 겁니다. 굉장하죠. 지금 같으면 만나 주기나 하겠습니까? 이때 처음 이황과 기대승이 만났지만 바로 논쟁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이듬해에 이황이 안동으로 내려가고 기대승은 광주 월봉서원 쪽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에 기대승이 이황이 수정한 〈천명도〉를 보고 편지를 보내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황이 편지를 쓰면 서울에 있는 제자 정자중에게 보내고 거기서 다시 호남의 기대승에게 갑니다. 그런 식으로 편지가 전국을 돕니다. 이언적의 ‘무극태극 논쟁’도 외삼촌이었던 손숙돈과 망기당 조한보 사이에 오간 편지글을 보고 이언적이 개입하면서 삼자 간의 논쟁으로 발전했죠. 마찬가지로 이황과 고봉이 주고받은 서신을 주변의 학자들이 다 보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글은 200통이 넘습니다. 물론 논쟁과 관련된 것들은 각각 열 통이 채 안 됩니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주고받은 편지는 200통이 넘습니다. 조선 시대 주자학자들은 편지를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퇴계집』의 경우도 절반 정도가 서간문입니다.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도 편지글이 전체의 절반이 넘습니다. 그 정도로 편지가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편지로 논쟁을 하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편지가 전국을 돌면 당대 학자들이 거기에 자기 견해를 반영해서 새로운 견해가 나오고 하는 겁니다. 8년간의 논쟁을 통해 두 사람은 각자의 학문적 견해를 정리하는 성취를 보여 주었지만 서로의 견해를 일치시키는 데 이르지는 못합니다. 이황이 기대승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일부 조정하지만 견해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기대승이 이황의 견해에 승복하는 것처럼 모양새를 갖춥니다. 하지만 그저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는 정도로 물러섰지 실제로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당시에도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한쪽은 임금이 불러도 안 가는 사람으로 온 나라 사림의 명망을 한 몸에 입고 있었고 한쪽은 과거에 막 급제한 신참 학자였거든요. 이황은 한참 어린 후배가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는데 한 치의 권위도 내세우지 않고 기대승에게 극존칭을 쓰면서 겸허한 태도로 논쟁을 펼칩니다.


사칠 논쟁은 본격적으로 주자학이 수입되어 연구된 결과, 기존 주자학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난점이 노출되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개한 측면이 큽니다. 그 때문에 조선 주자학의 전개 양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퇴계가 서울에 있을 때 이웃집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라는 학자가 살았어요. 정지운이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천명도天命圖〉를 작성합니다. 본래 정지운은 〈천명도〉를 그리면서 이렇게 해설을 붙였습니다.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 그런데 이황이 읽어 보고는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도록 합니다. 정지운이 ‘발어리發於理’라고 표현한 것을 이황이 ‘이지발理之發’로 고친 것인데, 사실 의미는 다를 게 없고 구문상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중요해집니다. ‘발어리發於理’라고 하면 ‘이에서 발한다’는 뜻이니까 ‘이’가 주체가 되지 않는데, ‘이지발理之發’이라고 하면 ‘이가 발한다’는 뜻이 되므로 이가 주체가 됩니다. 곧 ‘~에서 움직인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이가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고, ‘~가 움직인다’고 하면 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되는 거죠.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대승이 이황이 수정한 표현을 보고 편지를 보내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가 어떻게 발하느냐고요.


그 편지에 이황이 답신을 보내면서 사단칠정 논쟁이 전개됩니다. 사단칠정 논쟁은 이황과 기대승 두 학자의 개인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학계에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해석 방식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다 같이 정이므로 사단이 칠정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주자학의 인성론에 따르면 사단과 칠정은 당연히 둘 다 정입니다. 인의예지는 성이고 인의예지의 실마리인 사단四端은 정이에요. 마음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칠정도 구체적인 심리 현상에 해당하니까 정입니다. 그러니 기대승이 사단의 정과 칠정의 정은 따로 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이황과 같이 사단과 칠정을 이의 발동과 기의 발동으로 나누면 이와 기를 두 가지로 나누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이황처럼 사단은 이가 움직인 것理之發, 칠정은 기가 움직인 것氣之發이라고 나누면 가르치기 쉬울지 모르지만 범주를 착각한 것이라는 말이죠.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된 것이므로 사단과 칠정을 상대적 개념으로 대응하여 논의할 수 없다,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마음만 가린 것이다,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기대승의 주장입니다. 곧 범주 오류라는 말이죠.


기대승은 이어서 현상 세계에서는 이와 기를 나눌 수 없다는 주자학의 기본 원칙을 제시합니다. 현상에서 이와 기를 뗄 수 있다고 하면 현상과 본질의 관계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설명력이 떨어지겠죠. 또 이는 약하고 실질적인 모습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기에 내재된 원인 정도로 봅니다. 만약 기대승이 이 입장을 그대로 지킨다면 이의 무작용성을 근거로 이황의 전제가 오류라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황은 기대승의 주장을 일부 수긍하는 한편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을 반박합니다. 사단과 칠정이 다 같은 정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 같은 정이라 하더라도 나아가서 말하는 바가 다르니 당연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어 사단칠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자가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고 각각 이와 기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하면서, 성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면 정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문제가 되는데요, 좀 까다롭습니다. 본연지성은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성은 이와 같은 것인데, 성이라는 명칭은 이가 기 속에 들어와 있을 때만 성립합니다. 원래는 천리天理예요. 천리는 우주 전체의 이입니다. 그런데 이가 개별 기에 들어가면 그걸 성이라고 합니다. 개별 기가 개라면 개의 성이 되고, 소라면 소의 성이 되고, 사람이라면 사람의 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 성이 본연의 천리에서 왔다고 하여 그걸 기준으로 부르는 명칭이 ‘본연지성’이고, 성이 기질 속에 놓여 있는 것을 기준으로 부르는 명칭이 ‘기질지성’입니다. 같은 성인데도 나눠서 이야기한 거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같은 ‘정’인데도 선한 쪽을 기준으로 사단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쪽을 칠정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상대화하는 겁니다.


이황의 이 같은 주장은 일관성 면에서는 설명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고봉식으로 보면, 감정이 있다면 그 속에 선한 감정, 혹은 선도 악도 아닌 상태도 있다고 보니까 설명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하는 게 더 쉽죠. 이황은 그걸 상대화해서, 이원화해서 봅니다. 나누어서 설명을 하려면 선이 있고 악이 있다고 상대화해야 하죠. 그런데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상대화하는 게 좀 더 간편하고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도덕을 위협하는 긴장이 없는 상태에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보다 도덕적인 행위를 위협하는 대상이 있는 상태에서 올바른 행동을 요구하는 편이 더 쉬울 수 있잖아요. 이황은 자기 시대를 그렇게 본 거죠. 그래서 상대화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사칠 논쟁에서 누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을 펼쳤느냐고 묻는다면 기대승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의 도덕적 실천을 촉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같이 고려한다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자학의 이념적 지향을 포괄적으로 적용하면 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을 나누는 방식이 제한적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선행과 악행은 모두 인간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악행을 상대화하는 것이 선행의 실천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하니까요. 


기대승의 주장은 주자학의 이기론과 사단칠정을 개념적 차원에서 정확하게 이해했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했기에 나중에 이이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기론의 기본 명제인 이기의 불가분리성을 만족시켰거든요. 이기가 떨어질 수 없다는 거죠. 사단과 칠정의 범주에 대한 분석도 주희의 심성론 체계와 일치합니다.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명쾌하고 설명력도 강합니다. 따라서 주자학의 논리적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심성론에 적용하면 기대승의 입론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황의 경우는 주자학의 이념적 지향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자학에서 격물의 대상은 물리적 법칙이 아니라 당연지리當然之理입니다. 물에 나아가서 이치를 궁구한다고 해서 격물궁리格物窮理라고 하는데, 물은 물리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도 물리物理만이 아니라 ‘사리事理’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주희는 물리보다 사리를 더 우선적으로 추구했습니다. 사물당연지리事物當然之理, 곧 당위입니다. 필연지리必然之理와 당연지리當然之理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자학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쉽게 필연지리와 당연지리는 다르다고 판단하지만 주자학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라고 하면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를 말하는데, 이때의 연은 현상입니다. 어떤 현상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까닭, 이치, 원인이 소이연지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현상이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기계적인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학에서는 그런 필연과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을 연결시킵니다. 소당연지칙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규칙, 소당연지리所當然之理입니다. 칙은 법칙, 규칙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규칙(원칙)인데 이것이 소이연지칙과 같다고 보는 겁니다. 결국 필연과 당연을 같다고 파악하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황의 견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표준을 객관적 현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거죠.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계에서 그와 동일한 사례를 찾아서 입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화론에서 사회진화론을 끌어내는 경우도 비슷하죠. 또 동물계에서 일어나는 특정 현상을 가지고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는, 진화론을 왜곡한 거지만, 적자생존을 가지고 인간 사회의 경쟁이나 약육강식 같은 비인간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와 반대로 진화론이나 자연계의 어떤 현상을 근거로 인간이 이타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타적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도 있고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도 있죠. 문제는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의 경우, 이타심도 이기적 동기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타와 이기의 개념 차이가 불분명해진다는 점입니다.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결국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면 애초에 이기와 이타의 차이가 없어지겠죠.


어쨌든 주자학자들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객관적 사물 세계에서도 엄연하게 드러나는 이치라는 식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 명제를 충실하게 따르고자 한 사람이 이황입니다. 이렇듯 이황은 이를 강화하는 쪽으로 주자학을 전개한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결국 이황이 마주했던 당시 조선의 사회적 혼란상을 주자학 이론을 재구성함으로써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황에게 당시 조선 사회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중앙의 권력자들은 악행의 대표자로 보였고, 이황은 그런 권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심성론을 재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기대승의 논리에 따르면 사단이 칠정에 포함되므로 상대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황은 이 둘을 상대화함으로써 오히려 도덕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고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을 촉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황의 생각은 기대승처럼 기를 중심으로 사유하게 되면 결국 도덕이 우연에 떨어지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도덕은 필연이지 우연이 아니라는 게 이황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끝내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강의 내용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