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8

정몽주의 성리학과 정도전의 왕도사상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3강: 정몽주의 성리학과 정도전의 왕도사상


정몽주, 혁명과 절의 사이에서


절의로써 성리학자의 실천을 보여 주다

제목을 ‘혁명과 절의節義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혁명을 일으킨 쪽은 신진 세력이에요. 신진 세력에는 정몽주1337∼1392와 이색도 포함됩니다. 고려 시대의 구세력이라고 하면 불교를 중심으로 왕실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원나라를 중심에 둔 세력이죠. 이색이든 정몽주든 원나라가 이미 중국에서 물러나는 상황인 걸 알고 친명親明을 주장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이성계, 조준, 남은, 정도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른 점은 이색과 정몽주는 고려 왕실의 체제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성계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조를 세우려 했다는 점이죠.

정도전과 정몽주는 다섯 살 차이예요.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젊은 시절 정몽주가 정도전을 만났을 때 정도전에게 『맹자』를 읽으라고 던져 주는데 이 책이 정도전이 추구한 역성혁명론의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결국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혁명파가 되었고 정몽주는 고려의 멸망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절의파가 되었죠. 당시에 이색이나 정몽주의 실천을 둘러싼 조선 시대의 평가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왜냐하면 혁명 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새 시대를 가로막는 방해 세력이죠. 어떻게든 제거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조를 세워 놓고 보니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해집니다. 왜?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죠. 이런 이중적 필요 탓에 평가가 극과 극으로 왔다 갔다 해요. 정도전이 조선 왕조를 개창하고 주도 세력으로 활약할 당시, 정몽주는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신진 세력에게 정몽주는 구왕조 세력에 붙어 있는 간신배로 보인 거죠.

그런데 조선 태종대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반전이 뒤집히지 않고 조선조 500년간 이어집니다. 정몽주는 56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목숨을 바쳐 보여 준 절의는 500년을 관통해서 빛났다고 하겠습니다.


1392년 개성에서 일어난 일

1392년 공양왕 4년 4월 4일, 정몽주가 하인 한 명을 데리고 고려의 수도 개경 선지교善池橋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몽주가 세력을 규합해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하던 차에 이성계가 낙마해서 다리를 다쳐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자 사정을 살피기 위해 이성계를 찾았던 겁니다. 그러고는 돌아오는 길에 선지교를 지나다가 살해당합니다.

정몽주가 이방원을 만났을 때 이방원이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의 뜻을 묻습니다. 정몽주를 정말로 죽일지 말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단심가丹心歌」였죠.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공양왕 4년 4월 4일 개경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결국 그로부터 석 달 보름 정도 뒤인 1392년 7월 17일에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태조 이단李旦의 즉위식이 거행됩니다. 이때 정도전이 즉위교서卽位敎書를 쓰는데 요지는 왕도를 표방하는 내용입니다. 혁명을 일으키는 입장에서 볼 때 정몽주같이 끈질긴 방해자는 용납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제거합니다. 그런데 정도전의 왕도론과 역성혁명론은 『맹자』에 기반하고 있고 정도전에게 『맹자』를 읽으라고 권한 사람은 정몽주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밖에요.


정몽주의 삶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전기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입니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입니다. 정몽주의 과거 시험과 관련된 기록은 화려합니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됩니다. 당시 고려에 전해진 『주자집주』를 사람들이 많이 읽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났다고 합니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송나라 때 유학자인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정몽주의 생각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했다고 합니다.

동시대 인물인 이색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학은 성리학을 가리킵니다. 이가 뭐냐? 선지교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피살되었는데 말하자면 목숨을 바친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목숨을 바쳤냐 하면 ‘절의節義’에 목숨을 바쳤어요. 절의가 바로 이입니다. 이 자는 왼쪽에 임금 왕 자가 있는데 원래는 구슬 옥 자였어요. 그래서 이玉+里는 구슬의 결을 의미합니다. 그 앞에 다른 말을 붙여서, 예컨대 ‘주리腠理’라고 하면 살결을 말합니다.

만물에는 다 이가 있어요. 나뭇잎에 잎맥이 있듯이 다 결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 피부에는 살결이 있고 자연에는 천리天理가 있습니다. 『장자』에 포정庖丁이라는 백정이 나옵니다. 포정은 천리에 따라 소를 잡은 덕분에 19년 동안 칼을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죠. ‘이’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로 포정의 칼이 지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칼날이 손상되지 않아요. 그런 맥락입니다. 

또 옥에는 옥의 ‘이’가 있습니다. 옥은 보물이죠. 예를 들어 박옥璞玉이 있다고 하죠. 박 자를 쓰면 가공하지 않은 통나무를 가리키고 나무 목 대신 구슬 옥을 넣으면 박, 가공하지 않은 옥, 곧 돌 속에 있는 옥을 말합니다. 돌하고 섞여 있는 옥은 쪼아 내서 다듬어야 하는데 결을 알아야 다듬을 수 있겠죠. 옥인玉人은 그 결을 봅니다. 우리는 못 봅니다. 옥의 결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듬으면 옥이 깨져 버리죠. 그런데 이 옥은 나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를 아는 현자의 모델이 필요해요. 그리고 거기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다 보니까 정몽주가 있었죠.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자기가 정몽주를 죽였지만 다시 복권시킵니다. 연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런 과정이 보입니다.


문과 무를 겸비하다

정몽주는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고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됩니다. 정몽주는 외교 수행력이 탁월했습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자주 출몰해서 경상도뿐 아니라 내륙까지 쳐들어오는 일이 잦아집니다. 고려 말기인 1300년 초에 일본은 어느 정도 통일이 되어 막부가 들어섭니다. 막부 쪽에서는 중국, 고려와 정식 수교를 해서 세련된 외교를 맺고 협력하기를 원했어요. 걸핏하면 쳐들어가서 빼앗아 오는 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구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라 해적이거든요. 이렇게 왜구가 마음대로 움직이니 막부로서는 곤란한 상황이었죠. 고려로서도 손 놓고 마냥 있을 수 없어 화친을 도모하고자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감금을 당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생깁니다. 그랬는데 정몽주가 외교 사절로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키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둡니다. 사실 아무도 안 가려고 하는 상황에다가 반대파가 죽으라고 보낸 셈인데, 가서 사명을 다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또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가서 전장을 누비기도 합니다. 그러니 문무를 겸비했다고 할 만합니다.

중국에 명나라가 들어서고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은 초기, 상황이 가장 어려울 때 정몽주가 사신으로 갑니다. 고려 말에 고려의 신진 세력인 친명파들의 세력이 강해지지만 고려 조정은 이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려와 명나라 간에 때로 문제가 생깁니다. 고려 쪽에서는 주원장이 사신으로 보낸 사람을 곤장을 때려 주검을 만들어서 돌려보내는 일도 있었고, 명나라 쪽에서는 고려의 세공歲貢을 증액하거나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며 고려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국교 관계가 몹시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도 안 가려고 합니다. 주원장이 고려의 사신을 그 자리에서 처형한 적이 있었거든요. 결국 정몽주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게 됩니다. 가서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늘린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옵니다. 일부러 사지로 몰아넣은 거나 다름없었는데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겁니다. 대단한 역량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맞이해서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지나 1392년(공양왕 4)에 이성계의 권력이 날로 커지고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정몽주가 그런 사정을 알고 기회를 보아 이들을 제거하려던 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세자 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벽란도에 드러눕는 일이 생기죠. 이 기회에 정몽주는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급히 이성계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밉니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에게 문병을 갑니다. 그런데 문병 후 귀가하던 도중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죠. 이것이 바로 정몽주를 조선 시대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한 사건입니다.


역신에서 충신으로

정몽주는 1405년(태종 5) 권근의 요청에 의하여 복권됩니다. 역신, 간신이었다가 충신으로 바뀐 거죠. 정몽주를 죽인 태종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절의란 폄훼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라고 하면 곤란하겠죠.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서 정몽주가 한 역할은 그 가치가 높지만 조선 왕조에서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로 활용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충신은 많았지만 정몽주를 넘어서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선 정몽주는 무인 이성계에게 굴복하지 않았죠. 그런데 조선의 수많은 공신들은 무인에게 굴복한 자들이 대부분이니 애초에 비교가 안 됩니다.

정몽주는 중종 연간1517에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에 따라 문묘에 배향되는데 묘비석에 고려의 벼슬만 기록하고 시호를 적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실 태종이 이미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죠. 문 자는 문과 급제하면 붙일 수 있어요.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문과 급제자가 아니면 못 붙입니다. 충 자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내릴 수 있는데 태종이 이 글자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충자를 내린 태종이 바로 충신을 죽인 이방원이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정몽주의 시

이제 정몽주의 시 두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봄의 흥취春興
봄비 가늘어 물방울을 이루지 못하고 春雨細不滴
한밤중에 조금씩 소리가 난다 夜中微有聲
눈이 다 녹아 남쪽 시내 넘쳐나면 雪盡南溪漲
풀싹이 부쩍 자라나리라 草芽多少生

두보의 시 중에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게 있습니다. 그 시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이 첫 구절부터 확 몰아치는 게 있어요. 호우好雨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예요. “좋은 비는 때를 알아 봄이 되면 내리네.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왔다가 아무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두보의 「춘야희우」의 비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정몽주의 「봄의 흥취」에 내리는 비는 아주 약간 소리가 납니다. 물방울을 이루지 못하는 가는 봄비가 내리는데 아주 희미한 소리가 나는 거죠.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초목이 자라는 모습을 상상하는 정몽주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와 비슷한 정서를 맹호연의 시 「춘효春曉」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봄잠에 취해 새벽인 줄 몰랐더니 곳곳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 들리네. 밤사이 비바람이 몰아쳤으니 꽃이 얼마나 떨어졌을까[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역시 시인이 눈을 감고 소리를 들으며 자연 사물의 변화를 노래한 점에서 비슷합니다. 정몽주의 시를 한 수 더 읽어 보겠습니다.

「음주飮酒
나그넷길 봄바람에 미친 듯 흥이 나니 客路春風發興狂
좋은 길을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인다 每逢佳處卽傾觴
집으로 돌아가 돈 다 썼다 부끄러워 마라 還家莫愧黃金盡
그래도 새로운 시 비단 주머니에 가득하다네 剩得新詩滿錦囊
   
「봄의 흥취」와는 사뭇 다른 정서가 느껴지시죠? 술을 거나하게 마신 선비가 술값으로 가진 돈을 다 썼지만 시를 지었으니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글이 쉽지요. 어려운 글자도 없고 이제현처럼 고사를 많이 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두보나 맹호연의 시가 연상될 만큼 시인의 정서가 잘 전달됩니다.


후세의 평가

정몽주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대체로 그를 ‘동방 이학의 비조’로 꼽는 내용이 많습니다. 

공의 강설講說은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했는데 뒤에 운봉雲峯 호씨胡氏의 학설을 얻어 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부합하므로 모든 학자들이 탄복했다. 이색이 일컫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여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조라 추대하였다.(이긍익,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우고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는데 종직의 학문은 그의 부친인 숙자叔滋에게 받은 것이다. 숙자는 길재吉再에게 배웠는데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에게서 받은 것이니 몽주는 참으로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시조다.(이덕무,『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문충공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문장과 충렬은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지금 사우를 세우고 서원을 설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명종실록』)

기대승이 아뢰기를,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차례를 말하자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조로, 길재가 정몽주에게서 배우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서 배우고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서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서 배우고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서 배웠으니, 본래 학문에 연원이 있습니다.(『선조실록』)

이처럼 정몽주를 동방 이학의 비조로 보는 평가는 조선 왕조 전체를 관통해서 정몽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줍니다.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특징으로 볼 때, 이 평가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강의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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