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7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저자소개

김상욱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춘천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하나》,《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다시 쓰는 문학에세이》,《소설교육의 방법 연구》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코페르니, 작은철학자》,《문학이론과 문학교육》등이 있다.

2016년 5월 2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강의실에서  김상욱의 〈어린이문학 속으로, 어린이문학을 위해〉 1강이 진행되었습니다. 〈김상욱 교수의 어린이문학 강좌〉는 그림책과 동화책 읽기에서, 서평쓰기까지, 어린이문학 전반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매주 월요일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어린이문학 속으로, 어린이문학을 위해



1강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주제는 열두 차례 이어지는 강의의 첫 번째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문학 강의의 첫 자리는 언제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이 우리가 문학과 함께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 아닌가 싶습니다. 이 질문은 ‘문학’이라는 것의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지,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규정을 함께 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뿐, 우리가 가까이하고 싶은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질문인 거죠. 게다가 이 질문은 ‘문학이란 무엇이다’라고 답의 형식을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들어가는 것은 고정되어 있고 머물러 있는, 정의에 해당하는 명사들입니다. 


우리는 첫 수업의 질문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같은 철학자도 문제의 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철학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이고, 질문 속에 이미 대답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존재론과 이어진다고 한다면, ‘이 세계를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이 인식론과 이어지고, 이렇게 분화되고 발전되어 온 질문의 역사가 곧 철학의 진전된 역사라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문제의 틀을 조금 바꾸면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해답이 달라지는 거죠. 


이를테면 ‘내가 결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여자들은 결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지금도 이 강의를 듣는 남학생은 다섯 분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분입니다. 여자들만 정진하려고 하는 겁니다. 남자의 성염색체는 XY이고, 여자의 성염색체는 XX라고 하는데요. 이 Y 염색체가 원숭이 염색체라고 합니다. 진화가 덜 된 거죠. 남자들이 이렇게 앉아서 강의를 듣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심지어 강의를 하기도 하고요. (웃음) 가부장적인 오랜 역사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는 것들, 그리고 여러 현실적 문제로 말미암아 여자들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결혼 그 자체는 결코 바람직한 제도는 아닌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요. 그런데 질문의 틀을 바꿔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이 질문은 아주 다른 것이에요. 그 질문은 할 수도 있고, 어쩌면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번번이 실패한 군상들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질문을 바꾸는 순간 다른 생각의 씨앗들이 그 질문에 담겨 있게 되는 것이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의 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정작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필요한 건 본질에 대한 질문, 개념에 대한 질문보다는 기능에 대한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우리에게 더 적합하고, 우리가 거듭 갱신하며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내게 문학은 무엇인가?’도 있겠죠. 이 질문 역시 쓸모의 질문입니다. 그 쓸모를 가장 잘 충족시킬 때 좋은 문학이라는 의미까지 함께 담아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내게 문학은 무엇인가?’ 하는 문학의 기능에 대한 질문을 저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번째는 총체성totality입니다. 실제로 고등학교까지 문학교육의 목표를 ‘삶의 총체성을 갖는다’로 하고 있습니다. 총체성이라는 말은 본래 토탈리테트totalität라고 하는 독일어였는데요. 영어로 토탈리티totality라고 하면 전체적인 합이잖아요? 여기서는 양적인 범주로서의 전체를 뜻하는 건 아니고요. 누군가 얘기했지만 유한한 삶이 무한한 생을 알 수는 없는 것이고, 삶의 전체적 면모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총체성이라고 하면 양적 범주라기보다는 질적 범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할까요? 다른 말로 진정성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이 너무 훼손되어 쓰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죠. 약간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말이긴 합니다만. 삶의 본질적 의미를 문학이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거죠. 정확한 개념으로는 예술이 그걸 알게 해준다는 겁니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라는 예술사회학자는 인간이 삶의 총체성, 혹은 삶의 진정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뭔고 하면 경험입니다. 인간이 삶이 무언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력한 방도는 경험일 겁니다. 우리 마누라도 나를 겪어 보고서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았다고 합니다. (웃음) 삶이란 그런 거죠. 살아보는 게 가장 확실하고 유력한 방도입니다. 원소기호와 성분이 어떤지 아무리 알아봐야 물맛을 알 수 없죠. 밤새 술 마시다 아침에 깨서 목이 말라 2리터짜리 생수병을 들고 마실 때 (웃음) 그때의 물맛이 진짜 물맛인 거죠. 사랑은 해봐야 알죠. 책을 읽는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라는 양희은의 노래가 있는데 그건 사랑을 해봐야 알 수 있죠.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서른이 돼봐야, 아니 마흔 즈음이 되어야 비로소 그 노래의 울림과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습니다. 경험이 우리를 세상에 대해 알게 해주는 거죠.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은 버린 쓰레기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대요.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만 쓰레기를 버릴 때 봉투 위까지 쓰레기를 쌓아올려서 청테이프로 척척척 샐 틈 없이 막아서 내놓으시는데 저는 청테이프 값이 더 들 것 같아요. (웃음) 그 쓰레기봉투에는 우리 어머니가 살았던 삶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죠. 경험이 정말 소중한 거죠.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삶의 총체성에 이를 수 있는데, 경험은 일정한 한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하는 건 언제나 파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각나 하나의 주제로 엮여있지 않은 거죠. 지금 문학에 대한 강의를 열심히 듣더라도 끝나는 순간 ‘오늘 점심 뭐 먹지?’로 순식간에 우리의 관심이 옮겨갑니다. 강의의 경험은 뒤로 팽개쳐두고요. 다음 주에 와서야 지난주 강의의 경험을 다시 되새겨 한 번쯤 이어지는 거죠. 그리고 또 팽개쳐두고요. 왜 내 사랑은 영화 같지 않을까요? 당연히 사랑이 영화 같으면 안 되죠. 영화 속에서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오직 사랑만 하는데 내 삶이 영화 같지 않다는 건 다행스러운 거죠. 고밀도의 긴장을 유지한 채 한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속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 미칠 노릇일 거예요. 조각조각 나 있는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조각을 이어 붙여야 해요. 진주알을 끈으로 잇는 것처럼 경험을 일정한 주제 아래 묶어내야 합니다. 게다가 경험은 조각나 있을 뿐 아니라 경험 그 자체일 뿐, 경험의 어떤 주제를 부각시킬 것인지, 어떤 초점 속에서 재구성해야 할지는 경험을 하는 주체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험은 의미를 건네주지 않죠. 이 강좌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수다스러움에 질렸어.’(웃음)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각자 다른 의미로 주체가 경험을 건져 올리는 거죠. 의미를 연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경험은 삶의 총체성에 도달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뿐이에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삶의 본질을 알 수 있긴 합니다만 그 자체가 삶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데 멈춰서 뒤돌아본다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에요. 어떤 화두를 꺼내 손에 쥐고 계속 사유한다는 것은 면벽수행 하는 것도 아니고요. 평범한 우리에게는 목전에 할 일들이 있는데 과제를 밀쳐두고 멈춰서 숙고하고 성찰하고 그로부터 의미를 끌어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있는데 그게 뭔고 하면 바로 예술입니다. 

 


(강의 내용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