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26

지눌의 선불교와 이규보의 문학사상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2강: 지눌의 선불교와 이규보의 문학사상


지눌의 깨달음


부처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다

지눌知訥, 1158~1210은 흔히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지만 사실상 한국 선문禪門의 개조開祖라 할 정도로 선불교의 대표자입니다. 지눌이 활동할 당시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처음으로 선불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통합했기 때문입니다.

지눌은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입니다. 흔히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라고 하죠. 보조普照는 ‘온 누리를 비추다’, 불일佛日은 ‘부처의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춘다는 뜻이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눌은 한국 선문의 실질적인 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중생의 본성은 부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굳이 중생이 인도로 가지 않아도 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경전을 통해 읽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같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선의 종지宗旨입니다. 본성을 어떻게 드러내고 어떻게 자성自性을 깨닫고 수양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선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지눌은 보조국사라는 시호도 있지만 스스로 목우자牧牛子: 소 치는 사람라는 별칭을 썼습니다. 이른바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로 널리 알려진 『수심결修心訣』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도 역시 선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수행법을 이야기합니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우선 세상이 고해苦海, 곧 고통의 바다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석가모니불이 초전법륜初轉法輪,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 준 가르침이라고 해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전할 때 고집멸도苦集滅道, ‘고’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집’은 ‘고’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모임, ‘멸’은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계, ‘도’는 그 깨달음의 경계에 도달한 수행. 사제四諦라고도 함를 이야기하면서 삶이 고라고 했죠. 우선 이 생각에 공감할 수 있어야 불교의 가르침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지눌은 30년 수행을 끝내고 나서도 자신이 마치 원수와 함께 사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미움을 없애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수십 년의 수행으로도 미움을 없애지 못할 만큼 삶이 고통스럽다는 거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발버둥을 쳐야 하는데 그 방법은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겁니다. 부처는 깨달은 자인데 깨달았다는 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편안해지는 것이죠.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 중국이나 인도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거죠. 굉장히 관념적으로 들립니다만 맞는 말입니다. 결국 미움은 미워하는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을 깨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선불교의 종지

지눌을 이해하려면 우선 선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선종은 그 유래가 불분명합니다. 한국 불교가 거의 다 선종인데 이게 불분명하다니 무슨 소리냐 싶겠죠. 흔히 선은 달마대사達磨大師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달마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문에는 부처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대까지 계보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꿰맞춘 거죠. 따라서 이 계보를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선문에서는 이런 걸 따지는 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식의 가르침을 넘어서려는 것이 선이니까요. 논의의 수준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겠지요.

선불교의 종지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마음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입니다. 교과서에서 선에 대해 설명할 때 ‘염화미소拈花微笑’,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가르침이라고 하죠. ‘염화시중’에 관한 내용은 다 아실 거예요.

어느 날 범왕이 영취산에 올라 석가세존에게 꽃을 바치고 가르침을 여쭈었다. 석가세존은 사자좌에 올라 꽃을 들고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존자尊者 마하가섭만이 미소로 답했다. 세존이 이르시길 “이제 정법正法을 너에게 부탁하겠다. 가섭아, 이를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게 선의 시작입니다. 석가세존이 웃기만 하고 전해 준 것이 없죠. 그러니까 교외별전, 가르침 없이 따로 전해 주는 것이 선이에요. 불립문자, 언어문자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인용한 이야기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경전에 전하는데 불교학자들은 이 경전이 후세에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선불교는 시작부터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종지를 이해하고서 본다면 그것이 위경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 진짜든 가짜든 거기서 말하는 불립문자, 곧 가장 중요한 진리는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만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냐 가짜냐는 이 이야기가 전해 주는 맥락을 파악하고 나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깨닫는 자는 거짓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고, 못 깨닫는 자는 진실로도 미망에 빠져듭니다. 그게 선입니다.


육조 혜능의 가르침

모든 경 및 문자와 소승, 대승과 십이 부의 경전十二部經, 불경의 내용이나 기술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은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니 지혜의 본성에 연유한 까닭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없다면 지혜로운 사람과 일체 만법이 본래 없어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도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일체의 경서 및 문자는 소승불교니 대승불교니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타고 가면 소승, 여럿이 함께 가면 대승이라고 하죠. 그런데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기도 못 건너가는데 어떻게 남을 데려가겠습니까? 그러니 대승이 무조건 옳고 소승이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이어지는 대목에 나옵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 아시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에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의 마음을 따라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드러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청정하다”라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이룰 것이니 바로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을 것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 「견성見性

부처와 중생의 구분은 깨달음 여부죠. 그런데 깨달음의 주체가 되는 마음은 부처나 나나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는 자기의 몸과 마음에 달린 것이니 따로 부처에게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래 청정한 자성이 나에게 있으므로 그것을 깨치는 순간 바로 부처가 되는 겁니다. 만약 부처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부처도 중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의 종지는 부처나 나나 똑같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강의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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