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4

원효와 의상의 화엄철학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2016년 3월 28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6년 시민인문강좌가 전호근의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로 문을 열었습니다. 전호근 교수의 〈한국철학사〉 강의는 삼국시대 원효에서 현대의 장일순까지,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좌는 총 8강으로 구성되어 3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회씩 진행될 예정이며 웹진 〈나비〉 '오늘의 공부'에 강의의 한 대목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게재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철학, 1300년을 관통하는 사유의 거장들



1강: 원효와 의상의 화엄철학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원효元曉, 617~686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빛나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같은 명저를 남긴 불교 철학자입니다. 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화쟁 사상이 통일신라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들 평가하기에, 지금도 사회 통합이 필요할 때나 지식인의 책임을 논할 때 ‘화쟁’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원효의 원은 으뜸, 효는 새벽입니다. ‘첫새벽’이라는 말이죠.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효는 누가 알아줄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만큼 그 파급력,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던 사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원효는 한국 사상사 전체에서 한국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철학의 첫새벽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입니다.


화쟁 사상은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그 양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이 『대승기신론소』에 등장합니다. 본래 불경을 주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한 글자 한 글자, 한 단어 한 단어를 풀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는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대승기신론』이라는 불경을, 글 쓴 사람의 종지宗旨를 꿰뚫는 방식으로 해석해 나갑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움직일 때 생멸상生滅相을 떠나지 않으며 생멸하는 상도 참된 마음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생멸상 또한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심생멸문心生滅門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는 화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파도도 물이고 바다도 물이죠. 둘이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물을 직접 볼 수 없고 파도를 보든가 고요한 바다를 보든가 푸른 바다를 보든가 하는 식으로 물의 여러 가지 응용 형태를 보는 것뿐입니다. 응용 형태가 다른 것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싸우죠.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싸우고 옳고 그른 것을 나누어 싸우는데 그게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는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걸 따로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고 그걸 다시 사유합니다. 엄청나게 투철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라 한 가지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견해로 보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일심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진여眞如: 범어로는 ‘타타타(tathāā)’. 진실한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하면 깨달음인데 참된 모습,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무명無明: 범어로는 ‘아비드야(Avidyāi)’. 명지(明知)가 없는 상태은 명이 없는 상태, 알지 못하는 상태, 무식한 상태입니다. 이 둘이 상반된 것 같지만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상生滅相을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생멸심은 진리이고 생멸상은 비진리라는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그 둘이 서로 떠날 수 없으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일 뿐이라는 게 원효의 견해입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어』 강의할 때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성인 공자, 만세사표로서의 공자가 있는가 하면 도둑 공자, 기생충 공자, 멍청한 공자도 있어요. 별별 공자가 다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람을 보는 것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사실일지라도 전부 같은 데서 나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타협점을 모색하고 결국에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원효의 ‘화쟁론’입니다.


‘화쟁和諍’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화’는 화합, 통합의 논리입니다. ‘쟁’은 ‘말씀 언’에 ‘다툴 쟁’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말로 다투는 것, 싸움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쟁론은 온갖 쟁을 화해시키는 논리, 곧 쟁을 화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가 하면 화쟁의 화와 쟁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죠. 그래서 화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화쟁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원효의 화쟁론은 이후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습니다.


요즘도 사회 분열이 심각해지면 원효의 화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여러 매체에서 원효의 화쟁을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화합’을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화합이 어렵습니다. 서로 이익을 다투잖아요.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 간에 어떻게 몫을 나누는 것이 합당한지, 그에 대한 합의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다”로 시작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꾼을 모집해서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킵니다. 오후에 또 거리에 나가 보니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왜 놀고 있소” 하니까 아무도 일거리를 안 주어서 그렇다고 해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럼 우리 포도밭에 와서 일해요” 하고서 데려와, 저녁나절에 일을 끝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일하기로 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고, 오후부터 일한 사람한테도 1데나리온을 줘요. 당연히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겠죠. 왜 우리한테 1데나리온만 주냐고요.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했고, 나는 계약대로 당신에게 그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을 지불했다고 해서 당신이 항의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얘기해요. 이상하죠.


만약 세 시간짜리 강의에 처음부터 와 있던 학생도 출석을 인정하고 끝날 즈음에 온 학생도 출석을 인정한다면 불만이 생기겠죠? 그런데 그 불만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 이야기가 왜 성서에 들어가 있는지, 왜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식의 분배가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해 봐야겠죠. 왜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분배를 하는가 하는 비교를 넘어서야 비로소 화합이 됩니다. 타인의 처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내가 더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화합이 안 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는데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일을 더해서 정규직입니까? 자동차 생산 라인만 봐도 숙련이고 비숙련이고 할 것 없이 똑같은 노동 시간,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는데 한쪽은 파견 근로자고 한쪽은 본사 직원입니다. 이들의 급여 차가 두 배가 넘습니다. 그게 정당합니까? 또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고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럼 실업자는 게을러서 그런가? 자질이 떨어져서 그런가?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게으른 자에게는 돈을 줄 수 없다는 논리를 들이댄다면 설명이 안 됩니다. 그걸 뛰어넘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화쟁이 됩니다. 원효를 얘기하면서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가나 마나입니다. 아무것도 나눠 주지 않으면서 화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요컨대 특정한 교설을 주장하지 않고 상반되는 주장을 잘 살피고 상대가 왜 불만을 제기하는지, 왜 저 사람에게 돈급여을 줘야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차병직의 『상식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어떤 한국인이 헝가리에 갔다가 거기서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과 장수 할머니가 사과를 팔고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과를 사 가는데 그 할머니가 하나는 좋은 것, 하나는 나쁜 것 이런 식으로 섞어서 팔아요. 한국 사람이 할머니에게 “돈을 더 줄 테니 좋은 것만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너한테는 안 팔아” 했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까요? 어리석어서? 왜 한국 사람은 모두 다 좋은 것만을 원할까요? 다 나름의 입장이 있죠. 할머니 얘기는, 먼저 온 사람이 좋은 것 다 가져가면 뒤에 온 사람은 뭘 가지고 가느냐는 거고, 한국 사람은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났으니까 좋은 걸 가져갈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니까 한국인은 잠을 편안하게 못 잡니다. 먼저 일어나서 좋은 사과를 차지해야 하니까 피곤하게 삽니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늦게 오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정의로운 사회가 맞나요?


화쟁이란 것이 말은 하기 쉽지만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또 상대를 포용해야 됩니다. 그런데 포용이 힘들죠. 꼴도 보기 싫은데 어떻게 포용합니까? 그런데 포용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면 원효의 화쟁론은 의미가 없어요. 대립을 넘어서 상위의 가치를 지향하는 게 화쟁이니까요. 그래서 화쟁이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강의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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