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맹자, 사랑을 이야기하다

저자소개

전호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한국철학사』,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 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6강: 맹자, 사랑을 이야기하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어느 날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더러 명당明堂을 허물라고 하는데 허물어 버릴까요? 그냥 둘까요?”


제나라의 명당은 본래 주나라 천자가 동쪽으로 순행巡行할 때 제후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그런데 이미 망해가는 주나라의 천자가 다시 순행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선왕 같은 제후가 의당 머물 수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숴버리라고 한 모양이다.


맹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명당은 왕자王者가 머무는 곳입니다. 왕께서 만약 왕도정치를 펼칠 생각이 있다면 허물지 마십시오.”


선왕은 솔깃했다. 자기더러 천자가 되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왕도정치가 뭔지 알고 싶어졌다.


“왕도정치에 대해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늙어서 아내 없는 것을 ‘홀아비[鰥]’라 하고, 늙어서 남편 없는 것을 ‘과부[寡]’라 하고, 늙어서 자식 없는 것을 ‘홀로 사는 사람[獨]’이라 하고, 어려서 부모 없는 것을 ‘고아[孤]’라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서 가장 가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왕께서 왕도정치를 펴실 때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보살폈습니다. 시경에도 그때의 일을 ‘부자들은 괜찮지만 이 외로운 사람들이 가엾다.’고 기록했습니다. 문왕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왕도입니다.”


맹자가 말한 네 부류의 사람들이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이다. 여기서 ‘환’은 본디 물고기의 일종으로 홀아비는 걱정 근심 때문에 밤에도 눈을 감고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것이 마치 물고기와 같다는 뜻에서 이름이 그리 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하의 세 부류, 곧 과부, 독거노인, 고아가 편히 잠든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홀아비가 그렇듯 이들도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일 터이고 오히려 홀아비는 그중 사정이 가장 나은 편일 것이다.


선왕의 사랑, 태왕의 사랑


아무튼 이야기를 들은 선왕은 왕도정치가 무슨 자기 재산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퍼주는 것쯤으로 여겼는지 바로 꼬리를 내린다.


“저도 왕도정치를 하고 싶긴 합니다만 제게는 병이 있어서…….”


“무슨 병인지요?”


“저는 재물 욕심이 많습니다.”


선왕의 생각에 자신은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물을 흩어서 백성들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런데 맹자의 대답은 이랬다.


“재물 욕심이요? 그거 좋은 겁니다. 옛날 주나라의 공유도 재물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착한 사람들은 창고에 곡식을 쌓아 두고 마음 놓고 지내게 했고, 먼 길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양식을 주어서 가져가게 했습니다. 공유는 자기가 재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재물도 늘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왕도정치를 베푸는데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선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또 다른 핑계를 댄다.


“저에게는 또 다른 병이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요?”


“저… 저는 여자를 밝힙니다.”


선왕의 말인즉 자신은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을 사랑할 겨를이 없다는 거다. 곧 여색을 밝히는 자는 왕도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제후로서 체면까지 구기면서 못할 만한 이유를 댄 셈이니 왕도정치 하기가 정말 싫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맹자의 대답은 이랬다.


“그것도 좋습니다! 옛날 주나라의 태왕도 여자를 밝혔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지요. 시경에도 실려 있습니다. ‘고공단보(태왕)께서 아침에 말을 달려왔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岐山 아래에 오셨지. 마침내 아내 강녀姜女를 데려와 함께 집짓고 행복하게 살았지.’ 태왕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안에는 시집 못 가 원망하는 여자가 없었고 밖으로는 옆구리 시린 남자가 없었답니다. 왕께서 만약 여자를 밝히신다면 백성들과 함께 하십시오. 여자를 밝히는 것이 왕도를 펴는 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


맹자의 말에 따르면 주나라의 태왕은 자신이 여자를 밝히는 마음을 백성에게 미루어갔기 때문에 아예 홀아비와 과부가 생기게 하지 않았다는 거다. 여자를 밝히는 마음은 똑같았지만 한 사람은 칭송받고 또 한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 족했다.


주지육림과 유상곡수


어찌 재물과 여색의 경우만 그러하겠는가. 놀고 즐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여 나라를 망쳤던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질탕하게 즐겼다. 사마천은 이때의 일을 ‘술로 못을 만들고 육고기로 숲을 만들었다[以酒爲池 以肉爲林]’고 기록했는데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은 여기서 비롯된 고사이다.


그런데 나이 어린 성왕을 보좌하여 주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아 유가의 성인으로 칭송받고 공자가 꿈에서 자주 만났던 주공 희단姬旦도 비슷한 일을 했다. 이른바 주나라의 동쪽 근거지 낙양을 경영하고 나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어 놓고 연회를 베풀며 즐긴 것이다. 유상곡수란 굽이진 물가에 앉아서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물가에 닿으면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식으로 노는 거다.


이게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인지는 후세에 왕희지가 난정에서 노닐 때 유상곡수에서 술 마시고 시를 지은 데서도 알 수 있고, 신라의 귀족들이 포석정을 만들어 놓고 논 데서도 알 수 있다.


한술 더 떠 조선의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공작관孔雀舘을 짓고 나서 거기에다 물길을 끌어들여 구비진 물길[曲水]을 만들고 연잎을 따서 술잔을 실어 보내면서 놀았으니[摘蓮葉以承杯 以泛以流] 그야말로 유상곡수의 최종 버전이라고 할 만한데 지금은 곡수유상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작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아무튼 주공이 즐겼다는 유상곡수도 술로 연못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술을 즐겁게 마시기 위해 흐르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구불구불하게 만든 것이니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또한 주지육림 못지않게 성대한 연회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유상곡수라고 하면 세련된 문화적 행위로 인정받아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이 앞다투며 따르려 하고, 주지육림이라고 하면 폭정의 상징으로 여겨 한결같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비난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임금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임금이 백성들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긴다[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사랑과 무식은 감출 수가 없다고 한다. 부모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결국에는 자기 자식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그런데 맹자는 무슨 이야기에서든 결국 백성들에게로 마음이 가닿는다. 맹자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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