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6

《88》2009년 11월 19일

저자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

11월 19일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쾰른 근방의 본에서 태어났다.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문예출판사, 1972)는 베토벤의 아버지를 “본디 총명하지 못한데다가 술주정뱅이 테너 가수”였다면서, 어린 아들의 음악적 재질에 ‘신동’이란 간판을 붙여 푼돈이나 벌어 먹으려 했던 염치없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런 과장된 소문은 베토벤에 관한 일련의 고정된 연쇄 이미지를 만드는데, 그 이미지들은 하나같이 ‘고뇌하는 인간’ 혹은 ‘의지의 인간’이란 깔때기를 거쳐 ‘악성樂聖 베토벤’에 당도한다. 하지만 티아 데노라의 『베토벤 천재 만들기』(경성대학교 출판부, 2009)는 베토벤의 성공이 그 혼자만의 고뇌와 의지의 산물이라는 신화를 거부한다.

대개의 서양 음악사가들은 서양 음악이 오늘날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진지한 음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과 ‘음악 천재’의 등장을 이런 가설로 설명한다. 즉 18세기 말, 귀족들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운영하던 숱한 가내악단이 사라지면서, 고용으로부터 해방된 자유 음악가들의 개성 경쟁과 음악적 탐구가 전례 없이 복잡하고 진지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티아 데노라는 그런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1796년 무렵,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운영하던 가내악단이 거의 해체된 것은 맞지만, 빈 귀족들의 경제적 몰락이 가내악단 쇠퇴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귀족들의 가내악단은 왕실의 궁정악단을 흉내 낸 것으로, “궁정에서 세워진 예를 먼저 최상위 귀족이 따르고 그다음 계급의 귀족이 따라 한 것”이다. 그 시대의 귀족들이 너도나도 가내악단을 만들어 음악을 후원한 까닭은, 음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이해 탓이라기보다 “관습의 준수, 의무, 유행, 경쟁심”에 기인한다. 음악이라는 도구는 궁정이나 최상위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한 필요 불가결의 도구였고, 그러한 도구를 통해서 지위와 명성을 증명하고 또 얻거나 잃을 수도 있었다. 가내악단을 소유한다는 것은 궁정을 상향 모방하는 당대의 문화적·신분적 인증절차였으므로 귀족들의 가내악단은 점점 경쟁을 향해 치달으며 융성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귀족들의 가내악단이 고급화되자, 오히려 궁정은 궁정악단을 심드렁하게 여기면서 궁정악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그것은 “한 사회적 특권계급이 어떤 특권을 갖게 되면 그 바로 위 계급 사이에서 그 특권은 더 이상 특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원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예를 들어 부유층이 사용하는 명품을 ‘개나 소나’ 쓰게 되는 순간, 명품 사용자로서의 부유층의 광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궁정이 음악 후원 경쟁에서 물러나자 귀족들 역시 음악을 후원할 최우선적인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가내악단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유용한 관습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궁정악단이 해체되면서 귀족들 또한 가내악단을 따라 해체 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족들의 음악 후원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상설 악단보다는, 그때그때 음악가를 초대하는 살롱 연주회 방식으로 음악 후원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상류 귀족들은 음악 시장에 하류 귀족들과 상류 중산층 계급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을 위기로 느끼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취향을 그들과 구분하고자 했다. 이제 음악은 양적 소비에서 질적 소비로 차별되어야 했고, 하류 귀족과 상류 중산층의 취향과 구별되고자 하는 상층 귀족의 욕망은 ‘진지한 음악’이란 기준과 그것을 담보해 줄 ‘음악 천재’를 후원하게 된다.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음악의 수도인 빈 땅을 밟은 것은 스물한 살이 막 지났을 1792년 무렵이다. 이때는 가내악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지만, 베토벤은 가내악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대신 지리학적인 의미에서 외국인임에 분명했던 베토벤은 본에 있을 때 알게 된 발트슈타인 백작 인맥을 통해 곧바로 빈의 상층 귀족과 만날 수 있었고, 베토벤은 그들의 개인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후 베토벤의 빛나는 음악적 성공은 대중이나 대중음악 시장과 단절된 채, 상층 귀족의 보호 아래 이루어진다. ‘진지한 음악’이라는 기준을 통해 자신들의 음악 취향을 드높이고 ‘음악 천재’에 대한 후원을 통해 음악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상층 귀족들에게 베토벤은 안성맞춤이었다.

한 예술가의 성공을 개인의 카리스마나 재능으로 설명하는 것은 예술가와 사회 사이의 복잡한 공조 과정을 묵살하는 빈궁한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 책은, 베토벤과 유사한 음악적 스타일과 이력을 가진 베토벤의 경쟁자 J. L. 두섹을 들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한다. 총명하지 못한 술주정뱅이였다는 로맹 롤랑의 날조와 달리 베토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궁정음악인이었던 반면, 베토벤보다 10년 연상의 작곡가인 두섹의 아버지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로 “아들이 집중된 관심을 받도록 해줄 만한 직책에 있지 않았다.” 또 “궁정과의 유대가 없었던 어린 두섹은 베토벤이 경험했던 보다 큰 편성의 기악 앙상블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었다.” 두섹이 잠재적 후원자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기 위해 하찮은 공식 교육을 연장하고 있을 때, 베토벤은 후원자들을 찾을 시간과 에너지를 “창조적인 작품을 위해 사용했다.”

오늘날 베토벤은 ‘천재’로 추앙받지만, 두섹의 이름을 아는 음악 애호가는 거의 없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가른 것은, 베토벤과 두섹이 활동했던 오스트리아 빈과 영국 런던을 지배한 음악 생산의 구조다. 음악이 상층 귀족의 명예와 위신을 나타내 주는 수단이었던 빈에서는 상층 귀족들이 작곡가를 후원했다면, 런던에서는 상층 귀족들로 이루어진 심미적인 후원층보다 시장이 더 발달해 있었고 작곡가들은 대중의 변덕에 내맡겨져 있었다. 평이한 베토벤의 제목에 비해 두섹의 작품 제목인 긴 이유, 베토벤이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작곡한 데 비해 두섹의 레퍼토리가 주로 피아노에 한정된 이유, 또 베토벤은 귀족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으나 두섹이 헌정을 한 데는 평범한 사람들 일색이라는 것은, 음악을 둘러싼 빈과 런던의 구조가 얼마만큼 달랐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베토벤의 성공과 재능의 출연을 단순히 집안 내력으로 축소”시켰다고 말할 오독가도 없지 않을 테지만, “여기서 특별히 천착했던 물음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적 재능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왜 베토벤이 당시의 동료음악가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지의 문제였다. 그 대답은 빈 음악 세계의 구조 내에서 베토벤이 처한 상황에 있으며, 특히 위대한 음악의 ‘이상’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강력한 음악 후원자들과의 인맥 속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자유 음악가로서의 베토벤의 자존심은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으나, 『베토벤 천재 만들기』는 그에 대한 퍽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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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