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2

《81》2009년 10월 21일

저자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

10월 21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이레, 2004)를 읽다. - 사람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소설보다는 영화로 더 많은 예찬자를 확보한 다음(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원작 소설로 인기가 번진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가 그런 작품이다. 모두들 좋다는데, 나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불일치에 대해 나는 ‘입 다물기’를 택했다. 혼자 배배 꼬인 인간이 되기 싫어서다.

우선 이 작품이 좋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외설 문학’에 대한 일관성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열다섯 살짜리 여중생과 서른여섯 살 먹은 마을버스 운전사가 만난 지 두 번 만에 섹스에 돌입했다면, 그리고 ‘주구장창’ 그 일만 되풀이 한다면(물론 그 사이 사이에 무시무시한 고전을 읽는다), 당신은 뭐라고 말할 텐가? 열다섯 살짜리 남자 중학생과 서른여섯 살 먹은 전차 여차장의 성애性愛가 흥건한 『더 리더』는, 어쩌면 지금껏 당신이 지탄해왔을 게 뻔한, 대부분의 ‘미성년자 약취’ 사건의 성별만 뒤집어진 형태다. 미성년 십 대 소녀가 보호받아야 한다면, 미성년 소년도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 뭐가 다른데? 변태들!



내 의견을 솔직히 밝히라면, 나는 『더 리더』의 저런 설정이 특별히 외설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딱한 것은, 이 소설의 예찬자들이 마치 음란문서를 제조한 소설가를 심판하는 법관이나 된 듯이 ‘예술’과 ‘외설’을 나누고, 『더 리더』엔 ‘외설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애처롭게 자위하는 경우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성년 약취가 그 자체로 불법이고 악행이지, 그 사례 가운데 ‘예술적’인 것과 ‘외설적’인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의 독자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짚지 않는다.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소설을 놓고 종종 법정이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려고 시도하는 이유는, 소설도 현실에 통용되는 법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 때문이다. 미성년 약취가 현실 세계에서 처벌되어야 하는 불법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성년 약취도 따라서 불법이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얄짤없는’ 그 법을 가상 세계인 소설에 적용하는 게 무리라는 저항도 있어서, 교활한 법정은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판단할 너그러운 재심 기회를 남겨 놓았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대 교수이자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헌법재판소 재판관이기도 한 작가는 이 부분을 검토했던 게 분명하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채 “탈진”하도록 “사랑 행위”(37쪽)에 열중한 지 7일인가 8일째 되는 날, 두 사람은 뒤늦게 이름을 교환한다. 이때 작가는 ‘도덕적 독자’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처방을 쓴다: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 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나는 그녀가 내게 덧붙여준 두 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일곱 살이고 이 다음엔 커서 유명한…”

위의 대목은, 열다섯 살짜리 미하엘 베르크가 열일곱 살 먹은 것처럼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면, 서른여섯 살 난 한나 슈미츠가 절대 ‘미성년 약취’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란 최소한의 ‘도덕적 방어’를 위해 설정된 것이다. 열일곱 살도 미성년이긴 마찬가지지만, 열다섯 살이 주는 충격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독자 제위들은 자신을 도덕적으로 책망하지 마시오! 하지만 나는 작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다. 건강한 소년의 육체가 제 나이보다 더 성숙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미하일 베르크는 산보조차 힘겨워 구토를 일으키던 약골이 아닌가? 그러니 병고에 찌들었던 열다섯짜리 미하엘 베르크가 열일곱 살로 오인될 개연성이 어디 있나?

작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와 반대다. 현실이나 법의 중력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가상 세계(소설)에서 묘사되는 애욕은, 하나같이 변명 되거나 옹호될 만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더 리더』는 ‘뭔가 더 깊이 있는 것’을 얘기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기거나, 이런 엽기적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채 성차별에 대한 ‘이중 기준’을 체화한 사람이다. 이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거다.

『더 리더』를 ‘러브 스토리’로 읽는 것은 가장 편안한 독법이다. 하지만 ‘어떤 텍스트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읽는 것이다’라는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의 연애사보다는 작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점’이 『더 리더』를 해석하는 더 높은 차원이 된다. 즉 『춘향전』을 이도령과 춘향의 연애담뿐 아니라, 당대의 신분질서에 대한 발칙한 도전으로 읽는 방식이다. 그럴 때 인계철선trip wire처럼 끌려 나오는 개념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다. 물론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 『더 리더』의 여주인공을 질타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너무 밋밋할 수 있지만, 그동안 이 식상한 개념은 아돌프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이나 루돌프 헤스(루돌프 헤스, 『헤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와 같은 고위층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때문에 『더 리더』의 여주인공과 같이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왔다.

악이란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특별난 것이 아니라 누구나(자신도) 알지 못하는 채로 행해지는 극히 평범한 것이라는 아렌트의 논리는,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관용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김선욱이 옮긴 한길사판에 첨부된 정화열의 해제는, 인간의 복수성複數性과 타자他者를 생각할 줄 모르는 기계적이고 무사유적인 인간이 범했던 게 바로 홀로코스트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가 친위대 최상층의 아이히만이 됐든 작중의 한나 슈미츠처럼 친위대의 말단 병사가 됐든, 인간의 복수성과 타자에 대한 존중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에 가담할 수 있다는 뜻에서, 악이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현대 사회와 윤리학에 제공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개념은 타자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하고 인간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매서운 질타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더 리더』의 작가는 ‘악의 평범성’을 질타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작가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그것이 드러난 바대로 받아들인다. 즉 앞서 말한바 ‘악이란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특별난 것이 아니라 누구나(자신도) 알지 못하는 채로 행해지는 극히 평범한 것’으로 수긍함으로써, ‘악의 평범성’이 유래하는 기원과 의식 구조를 지워버림은 물론 그 개념이 지닌 비판적 성격을 거세한다. 그래서 어쩌면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 이 작품에 접근하는 것보다, 독일에서 이런 작품이 나오게 역사적 배경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정(그게 너무 거창하다면 우리나라로 국한)을 생각해 보는 게 더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대가로 독일은 분단국가가 되었다. 이때 나치가 저질렀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서독과 동독의 사후 처리는 매우 달랐다.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지만, 어쨌거나 이론상으로는 나치에 저항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동독은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범죄를 사죄하는 일에 무심했다. 반면 나치의 제3제국을 인수한 서독은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해 끊임없이 사죄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다. 전후 사죄 문제에서 서독과 동독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1971년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던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다. 서독 수상은 했지만, 어느 동독 수상도 폴란드인이나 유대인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에 의해 동독이 흡수 통일되면서, 독일인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를 새로 평가할 환경을 맞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가적 사죄를 서독 시절에 완수한 통일 독일은,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출발하는 새로운 앞날에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우길 원치 않는다. 그런 독일 사회의 변화는 일상사에 기초하여 나치 시대를 ‘근대화의 한 과정(병리현상)’으로 합리화하고 홀로코스트 범죄를 면죄하는 방향으로 갈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통독 이전에 서독에서 출간된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개마고원, 2003)는 이 방면의 선도적인 저작이다. 지적 충격으로 가득한 그 책에서 저자는 나치 시대의 독일인들이 나치에게 바랐던 것은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시대가 주지 못했던 ‘정상성’에 대한 희구였다고 말한다. 『더 리더』의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일자리와 질서’라는 정상성에 탐닉했던 나치 시대의 평균적인 독일인을 보여준다. 이때 그녀가 소년에게 즐겨 반응했던 도서 목록의 대개가 ‘고전’이었다는 것은 정상상에 대한 좋은 증빙이 된다.

이 소설의 역자는 한나 슈미츠의 문맹이 “이 소설의 핵을 이루는 포인트”(235쪽)라고 썼다. 문맹文盲이 당사자를 얼마나 치욕스럽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루스 렌들의 『유니스의 비밀』(고려원 미디어, 1996)을 원작으로 했던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의식>(1995)이 먼저 보여준 바 있다. 미처 원작 소설을 접하진 못했으나 『유니스의 비밀』은 “유니스 피치먼은 읽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커버데일 가족을 죽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고 한다(레이첼 에드워드·키스 리더, 『잔혹과 매혹』, 이제이북스, 2005. 212쪽에서 재인용). 실제로 <EBS>의 ‘세계의 명화’를 통해 본 <의식>은 주인 가족에게 문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던 가정부가 미심쩍은 여자 친구(레즈비언?)와 함께 주인 가족을 몰살시킨다. 그런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자가 정말 그렇게 믿었다기보다는, 독자들을 위한 ‘눈높이’ 해설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의 문맹이 작품의 핵이 될 수 없다.

『더 리더』의 작가가 진실로 나치와 홀로코스트 범죄를 두둔했던 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재독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덕적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진 칸트와 헤겔”(150쪽)에 대한 책을 쓴 철학자 아버지와 재판이 끝난 뒤 “마치 신들린 듯이 공부”(178쪽)만 했던 그 아들로 표상되는 ‘독일의 지식인’이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판단중지’를 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이게도 그 의미심장함을 웅변하는 것은 이 번역서의 앞표지 날개에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소설”이라고 씌어진 소개글이다. 『양철북』의 세 살짜리 오스카는 나치의 범죄를 독일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하는 반면, 『더 리더』의 주인공 미하엘은 마흔이 되어서도 세 살짜리가 가졌던 의문을 모른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를 포함, 여러 나라에서 호응을 얻은 까닭은 뭘까? 유대인의 시각이 독점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신선해서?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탐욕과 획일화된 미디어 기술이 현대인들을 노골적으로 속화된 ‘악의 평범성’에 물들였기 때문일까? 만약 후자가 맞다면, 우리는 『더 리더』를 읽으면서 우리의 유죄성을 위무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나 슈미츠 부인의 절대적인 책임감(직업정신)을 배우리라고 결심하고, 미하엘 베르크의 세상과의 ‘거리 두기’를 미덕으로 삼겠다고 덤으로, 다짐하면서!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마음산책, 2007)을 읽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작품이 ‘엿같다’에 표를 던질 배배 꼬인 인간이 나 혼자만 아니었던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책 160쪽에, 사이토 미나코라는 문학 평론가가 『더 리더』에 대해 쓴 혹평을 전재해 놓았다: “지식인 남자가 자기 편리한 대로 쓴 소설. 소년기·청년기·중년기를 통해 ‘나’는 시종일관 ‘좋은 생각’만 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는 부탁도 안 했는데 성욕을 처리해 주고, 청년 시절에는 드라마틱한 정신적 갈등을 제공해 주며,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가실 수 있는 일을 그녀 스스로 처리해 준 셈이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책을 낭독해 주었다? 전쟁범죄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런 것은 ‘좋은 생각’과 하나지요. 대체로 이 ‘나’라는 사람, 잘난 체가 하늘을 찌른다. 자신은 언제나 안전지대를 벗어나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사색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런 지식계급의 별 볼일 없는 남자가 기껏 ‘낭독’이라는 행위를 통해 면죄를 받는다.”

사족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연애담이라면, 한나 슈미츠의 자살은 예정된 것이다. 슈미츠 부인이 기소되었을 때의 나이가 마흔세 살이었으니, 18년 동안의 형기를 마쳤을 때는 예순한 살이 된다. 그녀는 마흔 살의 미하엘과 연인이 될 수 없다. 그건 더 이상의 왈가왈부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닫힌 결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사보다 작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점’을 중심축에 놓고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녀의 자살은 독자들에게 무성한 이론異論과 열린 결말을 선사한다. 나는 그녀의 자살로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21세기 독일인의 무죄 항변을 떠올리고, 또 나치 독일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우고 싶은 21세기 독일인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본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나 슈미츠의 문맹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만의 “본원적 약점”(235쪽)을 뛰어 넘어, 좀 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한나 슈미츠 부인의 문맹은 그녀의 치부이면서, 홀로코스트 범죄에 참여했던 나치 부역자들의 순진무구함과 무죄성을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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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