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26

《20》 ‘한산도’의 봄

한산도와 올스타



그가 처음 “나 한산도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이 본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명이었다. 한영근 선생. 선생은 올레길을 걷다 보면 누구보다 자주 만날 수 있는 분이다. 그도 서동철 대장처럼 수시로 올레길을 오가며 올레길의 상징인 리본과 화살표를 점검하고 쓰레기도 줍고 올레꾼들의 어려움을 파악해 도움도 준다. 그는 올레꾼을 교육하는 올레 아카데미 교감 선생님이다. 물론 올레에 관한 모든 일이 자원봉사다. 그 같은 자원봉사자들이야말로 올레라는 보석을 다듬는 세공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서귀포 어느 막걸리 집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낯선 나그네를 살뜰하게 배려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의례적인 친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러 달을 겪으면서 그 친절함이 타고난 본성임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섬세하고 품이 너른 사람이다. 그의 친절은 계산이 없는 친절이라 아름답다.

제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 제주에 정착한 지 25년이 넘었다. 한곳에 그토록 오래 살았다면 그곳이 고향이 아니라고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태어난 곳도 고향이지만 오랫동안 사는 곳도 고향이다. ‘옛 마을’이란 그런 것이다.

본래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익산.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밴드부 활동을 했다. 공부보다 음악이 좋았다. 그는 밴드부에서 트롬본을 불었다. 지금도 석양녘 그가 사는 법환 포구 바닷가에 울려 퍼지는 저음의 트롬본 소리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얼마 동안 서울 성수동에서 국제전광사라는 시계 회사에 다녔다. 1975년, 군대에 다녀온 뒤 같은 회사에 복직했고 밤에는 선배의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군대에서도 논산훈련소의 군악대에 근무했었다. 그때 화성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작곡과 편곡도 공부했다. 군대 시절에 한 공부가 제대 후 음악 활동의 밑거름이 됐다. 1979년 군산에서 ‘한산도와 올스타’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룹사운드는 일반 업소에서 일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의 활동 대부분은 밤무대와 나이트클럽에서 이루어졌다.

군산관광호텔, 전주코아호텔 나이트클럽을 시작으로 그의 밴드는 충주, 삼척, 여수, 마산, 진해, 충무까지 전국의 밤무대를 누볐다. 당시 신진 밴드들은 주로 지방의 밤업소를 돌며 실력을 연마해 대도시로 진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의 밴드도 그 수순을 제대로 밟았다. 전주코아호텔에서 연주를 하던 1986년 우연히 놀러왔던 제주칼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의 눈에 띄어 즉시 제주로 스카웃된 것이다. 당시는 제주관광산업이 정점에 달할 때였으니 제주로의 진출은 서울 입성에 못지않은 성과였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 후에는 쭉 제주칼호텔, 서귀포칼호텔, 프린스호텔 등 제주에서 활동했다. 준수한 외모와 큰 키, 거기다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그는 여성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여성 팬들이 그를 보기 위해 나이트클럽을 찾을 정도였다. 밴드의 리더였던 그는 베이스기타와 트롬본, 오르간까지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가정을 꾸린 것은 1979년 군산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할 때였다. 선배의 소개로 만난 여자는 논산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다. 6개월의 열애 끝에 6개월간 동거를 하다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했다. 아내는 밴드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했고 군산에서 아들을, 마산에서 딸을 낳았다. 아내도 음악을 좋아했다. 밴드 활동의 수입은 마스터인 그가 두 몫, 단원들에게는 한몫씩 균등하게 분배됐다. 1980년대 중반 단원들의 월수입이 70만 원 선이었고 그는 1백40만 원 정도였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더 호황이었다. 그래서 팁도 많았다. 팁은 모았다가 공평하게 분배했다. 단원 한 사람당 팁이 한 달에 30만 원 정도씩 돌아갔으니 전체 수입이 적지 않았다.


지조 있는 사내

그가 밴드 생활을 접은 것은 가정에 균열이 생기면서였다. 1995년 경 그의 아내는 도박에 빠져 모든 가산을 탕진해버렸다. 막판에는 아이들의 교육 보험까지 해약하고 통장에 든 약간의 잔고마저 빼서 도박장으로 갔지만 그 또한 단 3일만에 다 털어먹었다. 그 뒤 아내는 잠적해버렸다. 실종 신고를 내고 10년을 넘게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혼자서 아이들을 무람없이 키워냈다. 2005년, 결국 법원에 이혼 심판 청구서를 냈고 이혼 판결을 받았다. 이런 순정이 어디 있을까. 그는 내내 혼자 살았고 지금껏 혼자다. 아내를 못 잊어서가 아니다. 의리 때문이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킨 그는 지조 있는 사내다.

서귀포검도협회 상임부회장인 그는 검도 4단의 무도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약용식물관리사 자격증도 땄다. 언뜻 보면 그의 얼굴은 40대 후반, 잘해야 50대 초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올해 61세다. 그러나 허리도 꼿꼿하고 몸도 탄탄하다. 검도로 수련하고 거의 매일 올레길을 걷는 덕분일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직도 철없이 살기 때문에 젊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옹다옹 사는 것이 잘 늙는 지름길이야.”

욕심 없이 사는 것이 청춘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말씀이다. 뭍에 사는 노모는 얼굴 볼 때마다 환갑인 아들이 아직도 걱정스러워 “너 언제 속 차릴래” 하며 지청구다. 그러면 그는 “육십 넘어서 차릴 속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대답하며 허허 웃는다. 그는 오늘도 배낭을 메고 올레길을 걷는다. 때로는 철모르고 피는 꽃이 아름답다. 그는 이제부터가 다시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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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