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주의 여왕 제주의 여신, 해녀
이승에 집을 두고 저승에 직장 두고
어제 보목리 구두미 바다에서 팔순의 노 해녀가 물질을 하다 돌아가셨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슬픔보다 안도감에 젖는다. 노인은 이어도에 갔을 것이다. 살아서는 갈 수 없는 제주 사람들의 유토피아. 물고기처럼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노인의 혼백은 이어도로 떠나고 빈 껍질만 물고기로 떠올랐을 것이다. 뭍의 노인들이 논에서 김을 매다 죽는 것처럼 제주 해녀들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뭍에서는 관절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팔순의 해녀도 바다로 가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으니 노인은 그렇게 마음껏 헤엄치다 떠난 것이다. 제주 해녀들에게 바다는 끝끝내 돌아가야 할 모성의 바다. 어머니의 품으로 이어도로 갔으니, 노 해녀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혼백상자 등에다 지고
가슴 앞에 두렁박 차고
한 손에 빗창을 쥐고
한 손에 낫을 쥐고
한 길 두 길 깊은 물속
허위적허위적 들어간다”
“호잇.” 노 해녀가 삶을 떠났지만 오늘도 법환 포구 앞바다는 물질하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로 생명력이 넘친다. 숨을 참고 물질하다 바다 위로 솟아오르며 내뱉는 소리, 막혔던 숨통이 터지는 소리, 생명의 소리. 숨을 쉴 수 없는 바닷속은 더 이상 이승이 아니다. 해녀들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이승과 저승 사이를 넘나든다. 이승에 살며 저승에 직장을 둔 이들.
6월의 한낮, 이즈음 해녀들이 제주 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아 올리는 것은 성게다. 오늘 법환의 해녀들은 다들 물질해온 성게의 알을 까느라 경황이 없다. 가시가 긴 보라성게는 4월부터 8월까지가 제철이다. 알이 가득 차는 때는 6~7월 두 달 남짓이다.
“겨울에는 하나도 없어. 똥밖에 없어.”
요즈음은 산란기에 접어든 소라와 전복은 잡지 않는다. 소라는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작업하면 끝이다. 여름에는 미리 잡아둔 것을 판다. 자연산 전복은 나오는 것이 거의 없다. 해녀의 집에서 파는 것도 대부분 양식이다. 오로지 알밖에 먹을 것이 없는 성게는 알이 찼을 때 아니면 잡아도 소용없다. 해녀들은 오전 내내 물질해서 잡아온 성게를 까느라 종일 쉴 틈이 없다. 각자 작업해온 성게들은 어촌계를 거쳐서만 출하된다. 제주 각처에서 온 상인들이 어촌계를 통해 성게를 매입해간다. 해녀 한 사람당 하루 평균 성게 알을 2킬로그램 정도씩 수확한다. 가격은 킬로그램 당 4만 원에서 5만 원 선. 도시의 횟집에서 성게 알이 얼마나 비싸고 귀한 대접을 받는가. 소비자들은 성게를 열 배, 스무 배 비싼 값으로 사먹는 것이다. 여기서도 이득은 순전히 중간상이나 횟집 상인들의 몫이다.
한 겨울에도 벌거벗고 전복 캐던 잠녀들
해녀는 본래 잠수, 잠녀라 했다. 해녀란 말은 일본식 표현이다. 잠수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제주 사람들은 대개 배를 타거나 잠수하는 일로 생을 이어갔다. 옛날에는 전복을 따서 관에 공물로 바치는 남자 잠수를 포작이라 했다. 잠녀나 포작에 대한 수탈이 극심했다. 조선 세종 때의 제주 안무사 기건은 “추운 겨울 벌거벗고 전복을 캐다 바치기 위해 물질하는 잠녀들을 본 후 평생 전복과 소라를 먹지 않았다”라고 말했으며 김정의 「제주 풍토록」에는 “잠녀들은 탐관을 만나면 거지가 되어 돌아다닌다”라고 적혀 있다.
과거 제주 도민들은 죽을 때까지 온갖 의무에 시달렸다. 남자들은 모두가 평생 군역을 져야 했다. 어린 아이나 팔십 노인까지도 군역을 면할 수 없었다. 제주 목사를 지낸 이형상도 『남환박물』에서 “갓 태어나 머리가 채 마르지 않아도 신역(身役)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왕조가 공납과 세금, 군역 등 의무를 지우는 데는 가혹했다. 심지어 여자까지도 군역을 담당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제주에는 남정이 5백, 여정이 8백”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군역이나 전복을 따는 역 외에도 제주 사람들은 귤을 재배하고 진상하는 역, 뱃사람의 역, 말을 기르는 역 등 수도 없이 많은 고역에 시달렸다. 그중에서도 뱃사람의 역으로 목숨을 잃는 제주 사람이 해마다 수백이었다.
“슬프다 선인(船人)이란 사람들이 져야 하는 역이다. 아침에 배 하나가 표류하면 사람은 죽는 것이고 저녁에 배 하나가 침몰했다 해도 뱃사람이 죽게 된다. 이러므로 뱃사람으로서 죽어서 뼈를 고향의 산에 묻는 일이 드물다. 탐라 사람으로서 그 역을 피하기란 마치 함정이나 그물을 피하기와 같이 어렵다.”―최부 『표해록』
낭만의 삼다도가 아니라 고통의 삼다도
16세기 후반, 수탈을 피해 뭍으로 도망친 제주 남자들만 만 명이 넘었다. 공납이나 부역, 가혹한 세금 등에 시달리다 제주를 탈출하는 남자들이 점점 증가하자 조선왕조는 그것을 막기 위해 출륙 금지령을 내렸다. 1629년(인조 7년)부터 1834년(순조 34년)까지 2백 년간 계속된 출륙 금지령은 제주 사람 전체를 유배 죄인으로 만든 악법이었다. 제주는 그 자체로 감옥이었다. 뭍으로 탈출하고 또 바다에서 수장 당해 돌아오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아지면서 남녀 성비 균형이 깨졌다. 여다(女多)의 섬. 제주가 돌, 바람과 함께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면에는 그토록 아픈 수탈의 역사가 숨어 있다. 늘 바람이 목숨을 위협하고 갈아먹을 밭은 돌투성이고 과부가 된 여자가 넘쳐나는 삼다도는 낭만의 삼다도가 아니라 고통의 삼다도였다.
해녀들은 그 경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위계가 엄격하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직업인 까닭에 규율이 세다. 지도자인 상군 해녀의 풍모는 늠름하다. 시바 료타로는 『탐라기행』에서 그런 상군의 모습을 “고대의 여왕 같다”라고 표현했다.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역시 그녀의 책 『제주걷기여행』에서 상군 해녀를 “여신과 같다”라고 묘사했다.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 수사다. 근대에 들어서도 해녀들은 부산, 울릉도, 백령도는 물론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원정 잠수를 다녔다. 동아시아 바다가 모두 제주 해녀의 바다였다. 제주 해녀처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의 여성상은 한국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을 나갔다 배에서 해산하는 산모도 많았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집이요, 배 밑창이 칠성판이었다.’ 제주 어디나 그렇듯이 이제는 법환 포구에도 할머니 해녀들만 남았다. 해녀의 시대가 저물어간다. 머잖아 해녀는 전설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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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
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