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비구니 스님들 올레길에 취하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참다운 벗이 아니다.” ―이탁오(李卓吾)
중이 염불이 나와야 하는데 자꾸 노래가 나오네!
비구니 스님들은 산에서 내려 왔다. 두 스님을 부른 것은 올레길이다. 경북 청도 호거산 아래 천년고찰, 운문사에서 온 스님들. 운문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비구니 승가대학교가 있는 절이다. 진광 스님은 운문 승가대학교의 강사 스님, 세속으로 따지면 교수님이다. 대학원에서 미술사와 동양철학을 전공한 철학박사 학승이다. 함께 온 현우 스님은 그의 제자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진광 스님은 주저 없이 걸망을 메고 바다를 건넜다. 진작부터 올레길을 걷기 위해 기다렸던 터다. 현우 스님은 늦은 나이에 출가해 이제 겨우 사미니계를 받은 예비 승이다. 카이스트에서 물리학과 박사를 마친 뒤 미국 유학에서는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이도 절에서는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승가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스승을 따라 나섰다. 5박 6일 일정으로 제주에 온 지 3일째, 두 스님은 벌써 7, 8, 9, 세 코스나 걸었다. 오늘은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보고 표선 쪽으로 갈 예정이다.

진광 스님은 8코스 숲길에서 바라보는 제주 바다가 가장 행복했다. “8코스 강추”라며 환하게 웃는다. 9코스 숲길의 수선화 향기에도 반했다. 예전에도 자주 제주에 왔지만 늘 자동차만 타고 다녀서 감동이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꿈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법 무거운 걸망을 메고 매일 여섯 시간씩을 걸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정해진 대로 가지 않고 가서 멈추는 곳에 쉬고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해변 아무 곳에나 ‘너부러져 노래하고’ 눕기도 했다. 9코스 숲길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 「산타루치아」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잠시 후 올레꾼 네 명이 뒤따라와 스님의 노래를 들으며 왔다며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청해서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을 어쩌랴.
“중이 염불이 나와야 하는데 자꾸 노래가 나오네!”
그래도 스님은 마냥 흥겹다.
스승은 30년 넘게 ‘중물’이 들었으니 뺄 때가 됐지만 제자는 이제 겨우 1년, 오히려 중물이 들어야 할 참이다.
“나는 노래가 나와도 제자는 염불이 나와야 될 텐데” 하면서 스님은 웃는다. 진광 스님은 올레길이 중물을 쏙 빼줘서 이제 많이 부드러워지셨단다. 진한 먹물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에 바래서 편안한 빛깔이 된 것이다. 먹물이 빠진 대신 올레길에 만난 고운 인연에 물들고 노을빛에도 물들었다.
“현우야, 너는 중물 제대로 들어야 한다. 고집불통, 이상한 중물 들면 안 돼.”
제자는 머리를 끄덕인다. 진광 스님은 해마다 방학 때나 혹은 업무 차 많은 여행을 다녔다. 미국, 인도, 네팔, 티베트, 몽골, 바이칼, 쿠바, 태국, 호주, 베트남, 일본 등으로 운수행각을 다녔다. 국내도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번 올레길을 걸으면서 어느 나라보다 제주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카리브 해보다 아름다운 제주 바다
제주의 물빛은 쿠바에서 본 카리브 해의 물빛보다 푸르렀다. 일본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너무 강한데 제주 올레는 자연스러운 미(美)가 있다. 스님은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질 강들이 안타까워 낙동강 길을 몇 번씩 걷기도 했다. 강 주변은 이미 녹색 생태 공원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생태공원들이 너무 반생태적이었다. 그에 비해 제주 올레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을 파헤치는 대신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강변길이나 조성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진광 스님은 바닷길을 걸은 것이 처음이다. 늘 산길만을 다녔다. 물을 무서워하는 성품 탓이다. 그래서 오롯이 바다를 바라본 적도 없었다. 올레길을 걸으며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떨쳐냈다. 해변에 앉아 있으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동요와 가곡, 외국 민요들, 벌써 30년도 전에 속가에 있을 때 배웠던 노래들이 고스란히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출렁 출렁 배 저어라. 저 먼 곳 그곳을 향해….”
「고향 바다」를 부르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호프만의 뱃노래」도 불렀다. 자연과 교감을 하니 노래가 안 나올 수 없었다. 사람의 소리 중 노래야말로 자연과 가장 가까운 소리다. 햇빛 부서지는 바다가 바다별처럼 예뻤다. 파도가 철썩이는 것은 지구가 숨 쉬는 것 같았다. 바다에 와서 비로소 지구의 숨소리를 들은 것이다. 스님은 올레길을 걸으며 비로소 제주의 본모습을 보고 느꼈다. 스님은 곧 산으로 돌아가더라도 머잖아 다시 올레길을 찾을 것 같다. 올레길만 생각하면 내내 가슴이 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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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제윤시인,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89년 첫 시집을 낸 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느라 오랫동안 글쓰기를 떠나 있었다. 3년 2개월간의 투옥생활 이후 군사정권시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조작간첩'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인권활동을 했고 이들은 후일 재심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8년 보길도로 낙향한 후에는 보길도 자연하천을 시멘트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저지시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훼손시킬 대규모 댐 건설을 막아냈다. 2005년 다시 고향을 떠나 집 없는 유랑자가 됐다. 10년 동안 한국의 사람 사는 섬 500개 모두를 걸어서 순례할 서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150여 개의 섬을 걸었다. 시인은 여전히 섬을 걷고 있다. 지금은 가장 큰 섬 제주에서 1년 남짓 장기 체류하며 제주 땅과 올레길을 걷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단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그동안 제주에서 만난 생각과 사람과 사랑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저서로 『섬을 걷다』, 『파시』,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숨어사는 즐거움』,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