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8

소설, 자서전 10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자넷이 카톡을 보내왔다. 남편과 다시 헤어졌고, 그 이유는 나 때문이라 했다. 이유를 물으니 만나서 이야기하자 했다. 봄이 시작되는 3월 초, 뉴욕의 봄은 춥다. 


우리는 소호의 안젤리카 극장 카페에서 만나 영화라도 보자고 했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극장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극장의 캄캄한 실내에 같이 앉아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내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아무런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미동도 하지 않으니 그녀가 무색한 듯 손을 거뒀다. 나는 문득 걱정되었다. 소위 아무에게도 연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에이로맨틱Aromantic, 에이섹슈얼Asexual, 무성애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성애자가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 생각을 예언하기라도 한 듯 영화는 한 무성애자의 인생에 관한 영화였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개든 고양이든 아무것에도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은 어느 날 다육식물을 파는 가게에서 선인장과 사랑에 빠진다. 선인장이 하는 말이 그에게만 들린다. 


“저를 당신 아파트로 데려가 주세요.” 


주인공은 선인장을 사서 햇빛이 환하게 드는 창가에 놓아둔다. 그로부터 선인장과 그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때 갑자기 자넷이 나가자 한다. 나는 그녀를 따라 극장을 나와 하우스톤 거리를 지나 소호 쪽으로 걸었다. 그녀가 내 팔짱을 끼고 어깨를 기대왔다. 아주 조금씩 내 안의 온기가 되살아오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이탈리안 식당으로 들어서니 낯익은 나이 든 웨이터가 자넷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넷이 남편과 자주 오는 곳이라 했다. 와인 한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파스타와 리조또를 주문한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묻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수척해진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머뭇거리며 말한다. 애걸복걸해서 다시 만난 남편이 어느 날 무성애자가 되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커다란 수족관을 사두고는 열대어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남편의 열대어 사랑은 도가 지나치기 시작해서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열대어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들어보니 열대어를 향해 아내가 전 남 친구와 다시 만나 바람피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끔 자넷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받으면 끊어지는 전화였다. 자넷은 모르는 번호이며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화라 해도 남편은 믿지 않았다. 사실 오래전 그들의 이혼도 남편의 망상 때문이었다. 둘 사이의 딸이 자기 딸이 아니라는 망상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딸을 사랑했다. 가끔은 아버지가 아니라 연인처럼 집착하기도 했다. 


사춘기에 들어선 딸아이는 두 사람의 싸움 사이에 끼기 싫어서, 초등학교 시절의 친한 친구가 사는 뉴멕시코주의 고등학교 기숙사로 떠났다. 두 사람만이 남아 열대어들과 살아가는 삶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남편은 이별 통보도 없이 나가버렸다. 열대어들과 커다란 수족관도 함께였다.


사람은 늘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다가 죽는 존재다. 왜 나를 떠나 그와 재결합했냐고 물으니  자넷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  했을 뿐 아니라, 딸아이가 하도 아빠 편을 들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재결합하자마자 돌아가신 남편의 아버지가 물려준 센트럴파크 근처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독일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사이의 외동아들인 그는 엉뚱하게도 어릴 적부터 히틀러를 존경하면서 자랐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여러 번 읽을 정도였다.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서 사들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옳다.’ 히틀러가 자필로 쓴 캔버스를 경매에서 사다가는 거실에 걸어놓기도 했다. 남편은 히틀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있었다. 가끔 히틀러가 사람 혼을 홀딱 빼놓는 웅변으로 우매한 대중을 제압하는 장면만 모아놓은 다큐 필름을 하루 종일 틀어놓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참을 수 있었냐고 물으니 어릴 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한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고, 선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홀대하던 어머니의 악담이 히틀러의 웅변을 닮아있었다 했다.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웃’하며 히틀러를 닮은 카리스마로 아버지를 내쫓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왠지 익숙해진 것들, 길들여진 것들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자넷이 나를 이해하는 줄 알았다. 늘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며 나의 슬픔을 함께하는 사려 갚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일고 보니 그녀는 그냥 늘 웃고 있는 거였다. 남의 말을 이해하기는커녕 듣고 있지조차 않았던 건지 모른다. 늘 선하게 웃고 말이 없으며 늘 내 말을 경청하며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듯 끄덕이는 사람, 그런데 속으로는 듣고 있지조차 않은 사람, 듣는 게 듣는 게 아닌 사람, 그 자리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일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오랜 세월이 흐른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런 사람을 그리워했다는 사실도 쓸쓸했다. 말이 없던 그녀가 한꺼번에 쏟아놓는 말들로 그녀가 누군지 처음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날의 솔직한 대화가 없었다면 아니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녀가 누군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 나 자신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다시 나와 함께 할 생각이 없어서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 건지도 몰랐다. 예전의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진짜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세상에는 혼자 떠드는 자와 듣는 척하는 자가 있을 뿐, 대화를 나누는 일은 드물고 귀한 순간일지 모른다. 그날 그녀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즐거운 적이 별로 없으며 남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 표현은 그냥 그런 척 시늉하는 거라 말했다. 


왜 그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게 늘어놓는 간지 알 수 없었다. 진심이 없이 시늉만 하는 건 자넷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은 어린 시절로부터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건지 모른다. 나와 헤어진 것도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전 남편이 거액의 아파트를 물려받았기 때문이고, 미래가 불투명한 내가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왜 내 곁을 떠나갔을까 하는 것에 관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그 뒤에 그들이 다시 헤어졌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잠시 나를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상담 전문가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녀가 좋았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없는 내게 우체국은 내게 쓴 어머니의 편지가 누군가의 음모로 전달되지 않고 캐비넷 안에 쌓여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과 사실은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게 삶의 슬픔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몇십 년 우정을 함께한 친구나 혈육, 부부 사이에서 뒤늦게 이 참담한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은 듣는 척, 느끼는 척했을 뿐 당신과의 섹스도 실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고 고백한 뒤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깨졌다. 자넷은 신이 나서 그동안 마음속에만 두었던 말들을 남편을 향해 퍼부어 댔다. 자신도 그 많은 말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잔인한 말들을 마구 퍼부어 대고 나니 가슴 속이 후련해졌다고 했다. 


그 뒤로 남편은 열대어와만 소통하기 시작했다. 선의의 거짓말처럼 인류를 존속하게 하는 힘은 없다. 그녀는 내게도 남편과의 관계처럼 똑같이 대했던 거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는 것이다. 아무리 솔직하게 말해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말이 없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말들로부터 나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나야말로 그녀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깨달음 속에서, 언젠가 읽은 니체의 문장이 맴돌았다.


“결혼이 불행해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 부족해서다.”


그리고 그 한결같은 우정처럼 어려운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