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이게 후광이에요? 下

저자소개

이미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그렇다면 기독교 미술에서는 후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불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미술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후광이 존재하겠죠? 물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특이하게 동물에게도 후광이 있습니다. 


산비탈레 성당의 천장 모자이크, 548년. 라벤나.


앞글, 「그림에도 은유가 있나요?」에서 은유의 예로 든 산비탈레 성당의 천장 모자이크화입니다. 십자가 중앙의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양이 그냥 양이 아니기 때문에 머리에서 후광이 빛나는 겁니다. 중앙의 원형 장식roundel을 떠받치고 있는 네 천사의 머리에서도 후광을 볼 수 있고요.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과 네 천사의 후광 모두 속이 꽉 찬 원형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을 채운 원형 후광을 ‘님부스nimbus’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원광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더군요. 먼저 십자가가 들어 있는 원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여러 번 보여드렸으니까, 이번에는 산 비탈레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ta Apollinare Nuovo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들어있는 원광은 주로 예수님에게만 사용되는 것 같아요. 어른 예수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의 후광에도 십자가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후광이 잘 보이도록 그림의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벽면 모자이크 중 일부, 6세기. 라벤나.


미상의 비잔틴 작가,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중 일부, 13세기. 패널에 템페라. 국립미술관, 워싱턴.


원형의 후광은 때로는 꽃무늬로, 때로는 글씨로, 때로는 투명한 바탕에 금으로 장식되기도 합니다.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 『수태고지』 중 일부, 1423~1424년 혹은 1427~1429년, 148 × 115 cm. 국립미술관, 워싱턴.


필리피노 리피, 『아기 예수 경배』 중 일부, 1475/1480년. 포플러 패널에 유화, 81.5 × 56.3 cm. 국립미술관, 워싱턴.


산드로 보티첼리, 『성모와 아기 예수』 중 일부, 1470년. 패널에 템페라, 74.5 × 54.5 cm. 국립미술관, 워싱턴.


후광이 굉장히 화려하죠? 이 후광들은 위에서 살펴본 동양의 후광들과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동양의 광배가 크게 원형, 연꽃무늬, 불꽃무늬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됐다면, 기독교의 후광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속이 차 있는 바퀴 모양의 윤광輪光, nimbus, 동그란 테두리로 이루어진 반지 모양의 환광環光; gloriole, 몸 전체를 비추는 전신광aureole 혹은 aureola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신광 중에서도 아몬드 형태는 ‘만돌라mandorla’라고 부릅니다. 님부스는 위에서 보여드렸기 때문에 환광과 전신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환광은 종교화가 아니더라도 만화나 웹툰에서 마음속 갈등 상황이나 죽은 사람을 표현하는 삽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 갈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


로렌조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 1456/59~1537의 『성 줄리앙과 성 니콜라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프랑스어: La Vierge et l'Enfant entourés de saint Julien et de saint Nicolas de Myre1494에서 환광의 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머리 뒤에 고리 모양의 후광이 보이죠? 같은 원형의 후광이라도 속이 꽉 찬 윤광과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로렌조 디 크레디, 『성 줄리앙과 성 니콜라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 중 일부, 1494년. 나무에 유화, 163 × 16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라피스 라줄리의 파란색과 골드의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의 얼굴이 너무 어른스러워 보입니다. 아기 예수의 얼굴이 왜 이렇게 성숙해 보이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집중적으로 다뤄 볼 예정입니다. 조금 기다려 주세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아몬드 모양의 후광이 있는 그림을 한 점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레초 마가리토Margarito d’Arezzo가 그린 『서사적 장면들과 함께 있는 옥좌에 앉은 성모자The Virgin and Child Enthroned, with Narrative Scenes1263~1264년에서는 아몬드 모양의 만돌라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의 머리 뒤에 있는 원형의 후광과 성모 마리아의 머리 뒤로 보이는 원형의 후광 형태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아레조의 마가리토, 『서사적 장면들과 함께 있는 옥좌에 앉은 성모자)』, 1263~1264년. 나무에 에그 템페라, 국립미술관, 런던.


지금까지 보여드린 후광의 예 중 앞부분에 있는 『옥천사 괘불』을 제외하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열 명을 넘고, 게다가 얼굴이 정면을 향하는 등장인물과 정면을 등지고 앉아 있는 등장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 그림을 보고 후광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등장인물이 많더라도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골리노 디 네리오, 『최후의 만찬』, 1325~1330년. 나무에 템페라와 금, 34.3 × 52.7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의 경우에는 후광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우골리노 디 네리오Ugolino di Nerio, 1280~1339/1349의 『최후의 만찬』1325~1330에서도 후광이 없는 왼쪽 아래 등을 돌린 제자가 유다입니다. 후광의 유무 덕분에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만 후광이 없는 경우에는 유다를 쉽게 찾아낼 수 있지만, 무수한 『최후의 만찬』들 속에서 유다를 찾는 일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프란스 푸르부스 2세Frans Pourbus II, 1569~1622의 『최후의 만찬』1618처럼 예수님에게만 후광을 그려 넣고 열한 제자에게는 후광이 없는 경우도 많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8처럼 예수님과 열한 제자 모두 후광이 없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뒤로 보이는 둥근 팀파눔tympanum; 창문 위에 얹혀 있는 반원형의 부조 장식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더불어 후광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더군요.       


프란스 푸르부스 2세, 『최후의 만찬』, 1618년. 캔버스에 유화. 287 × 370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석고, 제소, 회반죽 위에 템페라, 460 × 880 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밀라노.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3%9Altima_Cena_-_Da_Vinci_5.jpg#/media/File:Última_Cena_-_Da_Vinci_5.jpg 제공.


다시 우골리노 디 네리오의 『최후의 만찬』으로 되돌아가서, 후광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제자들 머리 뒤에 후광을 그려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머리가 후광에 다 가려버리겠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가가 후광을 얼굴 앞에 그려 넣은 것 같은데, 결과는 커다란 원반이 제자들 얼굴 앞에 하나씩 달리게 된 거죠. 제자들의 시야를 가로막아 버리는 겁니다. 후광은 얼굴과 몸 주변을 밝히는 빛 덩어리라 실제로는 그림처럼 시야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3차원적인 빛의 분산을 2차원적으로 그림에 표현하다 보니 저렇게 둥근 원반이 돼버렸습니다. 또한 똑같은 크기의 후광들을 성인들 머리 뒤에 모두 그려 넣다 보니 후광이 원근법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고요. 그림에 깊이감이 생기려면 앞쪽의 후광은 크게, 뒤쪽의 후광은 더 작게 그려야 하는데, 우골리노 디 네리오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 오히려 뒤쪽의 후광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문제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의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프랑스어: Le Couronnement de la Vierge1425~1450에서는 조금 개선됐지만,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성인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 넣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프라 안젤리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1425~1450년. 나무에 템페라, 213 × 21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렇게 여러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크레디처럼 투박하고 두꺼운 님부스 대신 부피감이 덜한 환형 후광을 그리거나, 보티첼리처럼 투명해 보이는 가벼운 후광을 그렸을 겁니다.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 1406~1469의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Madonna with the Child and two Angels1460~1465에서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가는 환형 후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필리포 리피,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의 일부, 1460~1465년. 패널에 템페라, 230 × 173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후광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프란스 푸르부스 2세처럼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성인의 머리에 후광을 그리지 않고 예수님에게만 후광을 그리거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후광을 아예 생략하는 겁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면서 배경이나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에 따라 후광을 생략하는 경향도 더 커지죠. 이런 사실주의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같은 화가에 이르게 되면 후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종교와 신화를 그리는 대신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으려 했던 그의 예술 철학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유명한 말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려 주겠다.” ‘천사’ 대신 ‘후광’을 넣어도 같은 의미일 겁니다. ‘내게 후광을 보여달라, 그러면 후광을 그려 주겠다.’ 이런 쿠르베의 철학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의 사실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라파엘 전파 역시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까요. 그런데 라파엘 전파보다 쿠르베가 더 사실주의를 고수했던 것 같아요. 쿠르베는 실제로 종교와 신화에 관한 작품을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은 반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종교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으니까요. 앞글, 「대천사 가브리엘에게도 성별이 있나요?」에서 보여드린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수태고지』1850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의 머리 뒤에서 금색 후광이 빛납니다. 반면에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는 종교화를 그리되 더 엄격하게 사실성을 추구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 성화에서 후광도 빼고, 성모 마리아의 옷에서 화려한 장식도 벗겨내고, 호화로운 가구와 배경도 들어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의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보죠. 다음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일까요? 


존 에버렛 밀레이, ____________, 1849~1850년. 캔버스에 유화, 86.4 × 139.7 cm.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런던.


누군지 당연히 아실 거라 믿습니다. 이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1849~1850입니다. 지금까지 보여드린 다른 그림들과는 확연히 다르죠? 성 가족이 지저분한 목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계층으로 묘사된 겁니다. 그러니 당시에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이 일었겠죠.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는 성 가족을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라고 맹공격을 퍼부었다는군요. 제목을 보지 않고 이 그림에서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요셉과 세례 요한, 성 안나를 알아볼 관람객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지금까지 특별한 존재에 대한 환유로 작용하는 후광의 다양한 형태뿐만 아니라 후광의 변천사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각각의 후광은 그 후광이 그려진 시대의 특성과 요구가 반영된 시대적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후광마다 독특한 매력과 의미가 있는 거겠죠. 우리 시대에 그려지고 있고, 미래에 그려질 후광은 어떤 모습일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