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는 매주 일요일 분리수거를 한다. 종이·플라스틱·비닐·스티로폼·병·캔 등 한주 동안 집안에서 ‘할 일’을 다한 생활용품이 종류별로 집결된다.
낡은 의자나 소파 같은 가구들은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크기별로 ‘딱지’를 붙인다. 지난주에도 3인용 갈색 가죽 소파와 다리 하나가 어긋난 의자가 나와 있었다.
일과 놀이, 노동과 휴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보완 혹은 의존관계다. 원인과 결과, 끝과 시작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저 둘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진다. 구분이 잘 안 된다.
밤이 사라지고 24시간 내내 ‘낮’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어야 하는데, 평일에 근무한 뒤 주말에는 휴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영광의 시가 주목하는 폐가구는 노년의 은유다. 월급을 받거나 월급을 주기 위해, 아니면 스스로 벌기 위해 불철주야 ‘현역’으로 뛰다가 물러난 ‘제대병’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일정 기간 ‘예비군’으로 복무해야 한다.
여기까지였다면 이 시는 고정관념을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우리의 상투적인 의인화상상력를 뒤집는다. 폐가구를 재활용하지 말자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덧붙인다. “의자는 의자에 앉아서 침대는 침대에 누워서” “생전 처음”으로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낡은 의자를 갖다 버릴 때 자문해보자. 나는 어떤 의자였고, 지금 어떤 의자이며, 앞으로 어떤 의자이고 싶은가. 내친김에 더 물어보자. 내가 은퇴를 전후한 의자라면 내가 앉고 싶은 의자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의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