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정우현 덕성여대 교수, 이어령 선생, 한승헌 변호사, 방혜자 화백. |
지난해,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유달리 많이 작고하셨고 그래서 그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간곡했다. 그럼에도 그 한풀이는 밝은 새해의 첫 글로 미루었다. 먼저 가신 분들이 나와 한 또래 나이들이어서 바로 나 자신을 미리 조문하는 듯 묵지근한 느낌에 눌리기도 했지만, 한 해가 지고 있다는 우수에 젖어,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말로나 글로나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분들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득해 있었다. 그처럼 허망해하는 나를 달래준 것이 정우현의 『생명을 묻다』였다.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이라고 표지에서 밝힌 것처럼 생리학, 유전학에서 형이상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관련된 뭇 물음들에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그의 책에서 나는 내 앞의 어두운 함정을 다시 보고 새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가령 “살아가는 데 잠이 꼭 필요하듯이 죽음도 생명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육체의 소멸을 넘어 생명의 본원을 가리키는 손짓을 보았고 “누군가는 죽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지혜에서 ‘생명의 법칙’을 읽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라며 모든 생명이 죽음의 잉태를 통해 태어나는 순환-지속의 과정임을, 종교를 넘은 과학에서 해탈로 다가가는 자연의 도리로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서의 변화 속에서 내가 지난해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회상의 무거움을 새해 밝은 봄기운의 환하고 싱싱한 쪽으로 견뎌, 바꿀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사상계』에서 진지한 서양 지성으로 익힌 글들로 나를 깨우쳐준 분이 불문학자 정명환 선생님이었고 그분의 첫 비평집을 내가 일하던 출판사에서 간행할 수 있었기에 자주 뵙지 못해도 친근한 스승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우리 지식사회에 서구 인문학을 자양으로 들여오면서 후진적인 우리 지성계를 세련시켜주셨다. 서광선 선생님은 우리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지성과 화해를 위한 신학으로 발전시킨 신학자였다. 6·25 때 목사였던 아버지가 참혹하게 학살당한 모습을 보고 복수를 작심했지만 하우스보이에서 미국 유학생이 되어 신학자로 귀국한 뒤 민중신학으로 그 지향을 개척하셨다. 같은 교외 도시에 살면서도 메일로만 소통한 내게 서 목사님은 2년 전의 성탄에 “환호와 소음의 축제가 아니고 조용히 문 닫고 식구들만 모인 가난한 식탁 위의 촛불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이어령 선생님은 분명 우리 문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분 중 한 분이어서 그분의 때 이른 작별은 더욱 안타깝다. 대학생 때 ‘우상의 파괴’로 기성 문단을 요란하게 흔든 선생은 서울 올림픽에서 소년의 굴렁쇠로 개막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했고 일본인을 ‘축소지향형’ 인간으로 분석해 왜인을 놀라게 한 탁월한 문화비평가였다. 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1966년 남정현의 『분지』 사건 재판에 피고 측 증인으로 나왔을 때였다. 문학작품이 북에 이용되게 했다는 검사의 비난에, “장미는 자신을 위해 뿌리를 뻗는 것이고 그걸 파이프로 만든 것은 인간”이란 촌철살인의 반론에 말이 막힌 검사가 분별을 잃고 선생에게 “당신 군대 갔다 왔어?” 하고 엉뚱한 질문으로 분기를 터트리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남정현 작가의 변호인이 한승헌 선생님이었다. 당시 소장 변호사였지만 그분부터 황인철 홍성우 등의 ‘인권변호사’란 이름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시인으로서의 그의 문재도 유명했지만 사석에서 그분과 자리를 함께하면 즉흥적으로 만드는 그의 재치와 유머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치적 불의에 대한 그의 단호함은 의연했다.
유머는 역사학자 김동길 선생님에게도 방창했다.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님의 동생인 김 박사는 시국에 대한 야유 섞인 비판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분이다. “이게 뭡니까”란 말로 유신 시절의 억압당한 세태를 야유하면서 그가 전공한 미국사에서처럼 우리 사회도 정치적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소망이 막힘 없이 시원한 목소리의 강연에 담겨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부터 한 세대 동안 유신 정치 억압에 가장 강렬하게 저항한 시인 김지하도 청년 시절부터 여러 고비를 잘 넘겨왔음에도 끝내 지난해 이승을 떠났다. 유신을 앞둔 박정희 정권의 억압 체제에 담시 『오적』으로 폭탄을 던진 김지하의 젊은 시절은 그 문학적 반항 때문에 군부 체제의 가장 혹독한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비판과 저항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가장 뜨거운 증례였고 문학과 문학인이 독재자의 억압 아래 어떻게 고통받아야 했고 또 반항해야 하는지 보기를 보여준다. 그런 그도 생명사상에 젖은 후기의 조용한 생애에 다가온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빙모 박경리 선생님 작고하신 빈소에서 조용히 침묵으로만 추모의 자리를 지키던 자그마한 여성을 눈여겨보았다. 나중에 기회가 닿아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그분은 파리에서 활동하는 화가 방혜자 선생님이었다. 빛, 무한, 우주, 근원 등 인간의 영원한 아프리오리를 주제로 추상화를 그리시던 방 선생님과의 메일이 문득 끊기더니 몇 달 후 그의 작고 소식이 들어왔다. 조용히 말을 아끼며 인간의 원초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형상화하던 방 선생님이 선물하신 한 점 작품이 내 설움을 다듬는다. ‘三百六十日三百六十花開’삼백육십일삼백육십화개의 글씨가 쓰인 김지하의 매화 그림과 이 그림은 함께 그 두 화가와 이별한 것이다. 여기에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에게 더불어 추모의 인사를 바친다. 내가 출간할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난장이 연작들은 우리 근대화로의 역경을 치르던 시대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슬픈 벽화가 되어 그 시절의 아픈 정서를 따듯한 설움으로 되새겨준다.
이렇게, 80대 정신들이 이해에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분들은 전쟁과 변란, 갈등과 혼란이 난만했던 한 세대 동안 그 암울한 미래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 우리 지적 정서를 어떤 모습으로 다듬어야 할지 고민해온 지성들이었다. 이제 그분들이 비운 자리에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정신들이 들어설 것이다. 『생명을 묻다』가 깨우쳐준 대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비한다. 이 빈자리에 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돋고 자랄 것이다. 한 설움이 가면 다음 봄꽃들이 새로 피어나 세상을 싱싱하게 만들듯. 그 환생을 밝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렇게 가고, 가면 또 오리니, 이 거듭되는 세상의 끝없는 이어짐이 이어지리라….
★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