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인지 기억의 회로가 망가졌다. 나는 미군에 입대했던 게 분명하고, 훈장을 많이 받아 그걸 누가 훔쳐갈까 봐 겉옷 속에 숨기고 다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누군가 내 훈장들을 모두 훔쳐 갔고 나는 어느 해변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이름이 ‘존’이라는 것도 아슴푸레 생각이 났다. 꿈속인지 현실인지 낯익은 벽장 속에서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발견했던 기억, 바이올린 뒷면에 영어로 ‘존과 크리스틴’이라고 씌어 있던 기억도 떠올랐다. ‘크리스틴’, 오랜만에 떠오른 이름이다. 그래 크리스틴, 어떤 이유로 우리가 헤어졌던가? 그것도 맴도는 이름일 뿐, 인연의 실체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사정으로인지 세상 여러 곳의 수많은 도시의 수많은 거리를 전전하다가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 같이 살게 되었고, 새아버지가 된 분은 군인이었다. 그분의 권유로 나는 미군에 입대하였고 중령으로 퇴역하였다. 기억의 페이지는 여기까지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기억나지 않는다.
살면서 아마도 여러 번 부모가 바뀌었던 기분이고,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분의 집에는 흙으로 만든 테라코타 전사들이 마당에 놓여있었다. 마치 우리 집을 호위하는 것 같았는데 참 좋은 분이셨던 어머니는 절대 목욕하지 않는 내게 웃으면서 말하셨다. “네가 목욕하지 않으면 저 전사들이 너를 보호해 주지 못한단다.” 그래도 나는 목욕을 하지 않았고, 햇빛 좋은 날이거나 달빛 좋은 날에 바람에 몸을 말렸다. 어디서 들은 건지 이런 노래가 떠올랐다. “달에서는 아무도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달빛이 우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씻어주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은 걸까? 하긴 마당의 테라코타 전사들도 늘 달빛에 목욕했다. 그들이 달빛에 목욕하는 꿈을 꾸면서 나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꿈속의 전사들은 나를 왕이라고 불렀다. 폐하라고 불렀던 것도 같다. 내가 어느 나라 왕이냐고 물으니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제라고 했다. 그래서 어째 내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있느냐 물었더니 폐하가 중국에 계시던 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백 번째 전생이라 했다. 팔천 명의 테라코타 전사들과 함께 무덤에 묻혔던 그 전사들은 누군가에 의해 훔쳐져 이 먼 나라까지 오게 되었다 했다.
이렇게 이상한 꿈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데 다른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부분 기억상실증이라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증세라 했다. 그러나 테라코타 전사들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종종 꿈에 나타나 위험한 데는 가지 말라든지 뭐 그런 암시를 전해주곤 했다. 내가 군인이 되어 훈장을 많이 탔을 때도 전사들이 꿈에 나타나 절대로 훈장들을 집에 두거나 풀어놓지 말고 꼭 몸에 지니고 다니라 말해주었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정원에 있던 병마용갱兵馬俑坑 전사들을 떠올렸다. 가끔 숨이 막힐 정도로 불안했고 누군가 그리운 것도 같았는데,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중국에 갈 일이 생기면 꼭 시안西安의 병마용갱을 찾아가리라 늘 생각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는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며 엄청난 노역과 세금을 걷어 지하에는 병마용갱을, 지상에는 만리장성 등을 건설했다. 내가 황제였던 시절, 과연 나는 행복했던가? 살아생전의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전사들과 함께했던 땅속의 온도가 느껴져 가끔 오한이 들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라고도 할 수 없을 긴긴 오랜 세월 동안 잠자고 있던 진나라 대군들의 원성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겨우 그런 우울한 기억들만 남을 걸, 기억의 조각도 아닌 한낱 무의식 속의 어둠으로 남을 바에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었던 왕의 생애라 한들 무슨 소용이랴. 나의 수많은 전생 중에는 천상의 음률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도 있었고, 평생 그 나라를 벗어날 수 없는 폐쇄적인 나라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나 부모가 공개 처형당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슬픈 소년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먼 기억 속의 소년은 부모가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너무 슬퍼서 슬픈지도 모르는, 아니 슬픈 게 뭔지를 배우지 못한 그런 전생의 꿈을 가끔 떠올리곤 했다. 때로는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삶 말고 다른 삶은 없다.” 가끔 아득히 떠오르는 전생의 삶들은 다 내가 만들어낸 것일까? 그러기엔 그 삶들의 기억은 무척 또렷하기도 했다. 정작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바로 이 삶의 전생, 아니 며칠 전인지 몇 달 전인지 모를 현실 속의 삶이었다. 군인이었던 전생인지 현생인지 모를 삶 속에서 나는 어딘가 낯선 전쟁터를 헤맸던 생각이 나기도 했다. 전쟁, 그것도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지옥을 닮은 전쟁,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나는 누구를 죽였단 말일까? 분명 나는 어딘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참전용사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다. 애지중지하던 금이나 은, 동으로 만들어진 훈장들은 누가 다 훔쳐 가버려 어느 전쟁에 참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포화 소리와 옆에서 죽어가던 동료 전사의 비명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기억나기도 했다.
나의 기억은 실로 나의 기억인가? 기억을 소환하기 위하여 나는 몇 날 며칠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다. 세상의 무궁무진한 드라마 시리즈들 속에는 우리들의 모든 전생이 다 담겨있는 듯했고, 계속 서로 이어져 절대로 끝이 날 것 같지 같았다. 진시황제의 고조할머니의 이야기부터 인공지능 애인의 이야기까지, 나는 이야기의 바다에 빠져 나의 전생,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까운 전생을 찾아 헤매다가 마치 언젠가 내가 남긴 말 같기도 하고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 같기도 한 말들을 메모했다. 그 안에 내 삶의 문으로 들어가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있기라도 하듯. 어느 드라마 속에서 누군가 말한다. 마치 언젠가 내가 말한 것 같기도 한 말을 그가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종이므로, 그 누구도 특별히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사람을 한 번 죽이고 나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 죽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인 뒤 머리가 이상해져 폐인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말한다. 신이 두려운 건 전지전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그 예측 불허인 대상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매일 매일 무언가와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죽는 거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다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남이 보기에 부럽기 그지없는 복이 많아 보이는 존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전생을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모자랄 것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다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성공하는, 그리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그런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사라진 이후로 내게는 머릿속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었다. 음악과 나는 늘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내게는 늘 알 수 없는 멜로디가 맴돌았다. 무슨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그 낯익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엔딩 자막에 슈베르트라고 씌어있었다.
슈베르트, 그 이름 정도는 물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음악을 내가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신기한 기분은 무엇인가?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다가 나는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우연히 악기를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누군가 서툰 솜씨로 슈베르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을 맴돌던 바이올린 소나타의 음률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켤 수도 없는 바이올린의 기억을 지닌 ‘과거가 없는 남자’, 혹은 과거가 너무 많아 자기를 찾을 수 없는 남자, 나는 중고 바이올린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악기를 손에 들자마자 나는 배워보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기적을 목도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제목도 모르는 멜로디들이 낡은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감동한 나는 벽장 속에서 누구의 술인지도 모르는 술 한 병을 꺼냈다. ‘나폴레옹 코냑’이라고 씌어있었다. 나의 첫 연주를 기념하기에 딱 좋은 술 같았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한두 잔 마시니 딱 좋았고, 더 이상 마실 필요도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잘 아는 사람이 옆에서 들려주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술은 참 좋은 거지. 다정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살고 싶어지고, 죽음이 두렵지 않아지지. 그런데 술을 너무 친한 친구로 삼으면 안 된다네. 내 마음을 다 알아주고 다 이해하는 것 같던, 사실은 내 말을 듣고 있지조차 않던 그 진심 없는 절친이랑 비슷하단 말이지.”
그러나 그날은 시작한 이상 술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먹다 만 술이 꾸다가 만 조각난 꿈들 같아 궁금증이 나서 나폴레옹 코냑 한 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이런 느낌이 낯설지 않았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술주정뱅이였는지도 모르고, 바이올린을 켜는 건 그야말로 꿈속의 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