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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의 인세는 누구에게 가야 할까
2007년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에서 재단법인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이소선 어머니가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이소선은 저에게 전태일평전 인세를 전태일 동생 전태삼의 쌍둥이 딸아들, 이소선에게는 손녀손자인 아이들에게 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께 답했습니다. 어머니,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평전의 저작권은 법으로만 따지면 조영래 변호사 생전에는 조영래 변호사에게, 조영래 변호사가 돌아가신 지금은 부인과 가족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조영래 변호사나 부인 이옥경 씨 모두 지금까지 인세에 대해 일언반구 한 마디도 없었던 것은 평전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당연히 평전은 어머니의 것이며, 인세 또한 어머니의 것으로 어머니의 활동비와 생활비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인세가 쌍둥이에게 간다면 그건 전혀 다른 소유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머님이 지금까지 쌓아온 노동자의 어머니로서의 이름에도 한쪽 귀퉁이에 오물이 묻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얘기를 듣고 어머니는 그럴까요, 라고 한마디 하시고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조영래 변호사가 1970년대 수배 중에 집필한 전태일평전 원고를 어머니에게 드릴 때 정말로 지극한 마음으로 공손하게 바치는 모습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민종덕으로부터 여러 차례 생생하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남 개발 이전 개포동의 어느 배밭이었다고 합니다. 수배자들이 만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생전에 조영래는 평전의 인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습니다. 전태일평전의 임자는 당연히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영래의 부인 이옥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머니 방을 나오면서 저는 아, 인세 문제뿐만 아니라 재산 문제 모두가 불거질 수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전 인세뿐만이 아니라 전태일이라는 이름도 전태일기념관도 당연히 ‘내 것’, ‘내 소유’라는 의식을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었습니다. 내 아들이니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소유권으로까지 확장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983년 평전 출간 이래 돌베개 출판사에서는 평전 수익의 거의 전액, 아니 그 이상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었습니다. 10%의 인세는 기본이고 임승남 사장은 명절 때뿐만 아니라 수시로 활동비 조로 어머니에게 봉투를 갖다 드렸습니다. 적지 않은 액수였습니다. 임승남 사장의 뒤를 이어 경영을 맡게 된 한철희 사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공과 과
솔직히 말하면 이소선 어머니는 유달리 돈과 재산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평생을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았고, 1970년대 청계노조 활동을 하면서도 보따리 옷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청계노조 활동비를 조달해야만 했던 그 경험 때문에 형성된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최혁배가 마련해 준 전태일기념관과 노조 사무실 등 부동산은 대부분 이소선 어머니 개인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김금수 이사장은 기념사업회 재산이 이소선 어머니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은 모양도 안 좋고 소유권 문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등기를 정리해야 된다고 여러 차례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전태일 동생 전태삼이 사업을 하다 망했을 때 빚을 졌는데, 그때 빚보증으로 이소선 어머니는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던 전태일기념사업회 부동산들을 모두 근저당으로 잡혀버렸습니다. 사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하고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민종덕도 기념사업회 임원들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노조 사무실 사용료 장기체납을 이유로 노조 사무실 압류 조치를 취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민종덕과 임원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당시 사무국장 황만호와 송병춘 변호사가 나서서 해결하긴 했습니다.
이소선 말년의 혼란과 갈등
이소선 어머니는 민종덕이 사단법인에서 재단법인으로 전환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찬성했습니다. 기념관의 소유권과 평전 인세 등을 재단법인 소유로 이전하는 것에도 찬성했습니다. 반대할 명분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어쩔 수 없이 찬성한 것이었습니다.
말년의 이소선 어머니 마음속에서는 개인 차원의 욕망과 사회 차원의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의해 왔던 민종덕이 오히려 어머니의 욕망과 집착을 공격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을 때부터 어머니는 판단 착오와 함께 본능에서부터 방어 자세를 취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몰라주는 민종덕이 야속하고 심하게 배신감까지 느꼈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어머니는 재단 전환을 보류하라고 민종덕에게 지시하고, 민종덕을 단칼에 상임이사직에서 밀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자 재단법인으로의 전환을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민종덕의 대항마로 하필이면 이미 전태일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길로 멀리 가버린 장기표와 전태일 친구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민주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장기표가 초대 이사장으로 등장하면서 전태일 재단은 처음부터 전태일을 배반하는 반전태일-반노동 단체로 출발했습니다.
박근혜의 전태일 재단 방문 시도 사건, 민종덕이 출판한 이소선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