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13일 전태일 54주기를 맞아 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와 박승옥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두 사람이 공저로 『지금 여기 전태일』기적의 마을책방을 출판한다. 1983년 돌베개출판사 편집장 박승옥은 민종덕이 비밀리에 들고 온 조영래의 전태일평전 원고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두 사람은 현재의 전태일 재단은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의 ‘각성과 자비행’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고, 박정희와 박근혜, 윤석열과 뉴라이트들을 불러들이는 반전태일-반이소선 단체라고 지적하면서 전태일 기념사업의 어제와 오늘을 하나하나 사실을 들어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기후지옥-AI 시대에 걸맞는 풀뿌리 밑바닥으로부터의 새로운 ‘전태일 사건’, 새로운 ‘전태일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은 언제든 환영한다. ─ 글쓴이 주
책 주문은 네이버 카페 ‘기적의 마을책방’, 또는 010-9566-8790에 문자로. |
고 최혁배 묘지 안장식을 폭력으로 무산시킨
전태일 재단과 백기완 재단
2023년 3월 10일, 전태일, 백기완 묘소 바로 앞 묘지에서는 ‘고 최혁배동지 유골 안장식’이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최혁배는 직전인 1월 20일 코로나로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유족들이 마석 모란공원의 민주공원 안에서 묘지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해 장례식이 2개월여나 지연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묘소에서 뒤늦게 치르려 했던 유골 안장식은 그러나 30여 명에 이르는 이른바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의 폭력과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전태일재단, 백기완 노나메기재단, 추모연대, 노동자 역사 ‘한내’ 등에서 나온 활동가 무리들은 전태일, 백기완 묘역 앞은 추모객과 추도식 등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공터로 비워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국립묘지도 아니고 정당한 비용을 치르고 사설 공원묘지를 구입한 고 최혁배 유가족들로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였습니다.(유재무, 「최혁배동지 유골 안장 저지는 범죄」, 예장뉴스, 2023. 3. 20.)
최혁배는 1970년 서울법대에 입학해 그해 11월 13일 ‘전태일 사건’을 만납니다. 전태일 분신 당시 장례 활동을 벌이면서였습니다. 전태일 사건은 이른바 출세가 보장된 그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강력한 세계관의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직후부터 그는 이소선 어머니와 교류하면서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지원한 숨은 조력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태일 분신은 그냥 매일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 가운데 하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미디어에 잠시 주목을 받다가 이윽고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그때 그 사건’으로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내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 하고 대학생 친구를 희망했던 전태일의 바람대로 조영래, 장기표, 최혁배를 비롯한 수많은 대학생들이 구름같이 장례식장에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나의 나’인 또다른 전태일들이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뒤를 이어 전태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대학생들도 전태일이 되었습니다. 대학 진학률이 70%에 이르고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전태일과 이소선의 현대판 종9품 ‘능참봉’들,
전태일 재단
최혁배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1970년대에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학생 출신 노동운동, 이른바 위장취업의 몇 명 안 되는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청계천에 ‘또또사’로 취업했던 김문수 현 노동부장관과 경북고―서울대 동기이자 절친이었습니다. 물론 1990년대 김문수가 민자당에 입당하면서부터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현장에서 나와 기독교단체에서 일하던 그는 얼마 뒤 단체를 그만둡니다. 그리고는 특유의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다양한 비공식 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합니다.
그는 쌩텍쥐페리 재단인 ‘인간의 대지’로부터 1980년대 초 당시로서는 거금인 20만 마르크약 1억 4,400만원을 지원받아 창신동 ‘평화의 집’을 구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공간이 다름아닌 전태일기념관입니다.
전태일기념관과 노조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기본 자산으로 전태일 재단이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천 지역 노동자들의 공간인 골목집, 구로 여성노동자 공간, 철산동 공동육아 공간 마련을 비롯하여 노동자복지협의회, 서노련 등 노동운동단체는 물론 민주언론협의회『말』지, 민불련서동석, 「민불련 창립의 뒷이야기」, 『불교평론』, 2022년 겨울호., 공해문제연구소 등에도 자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노동운동 단체와 민주화운동 단체에는 그야말로 생명수와도 같았습니다.
저도 최혁배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철산동 공동육아 공간이 마련되자마자 저는 일부러 그 근처로 이사해서 첫째 아이를 거기에 맡겼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박석운의 아이도 거기에서 함께 성장했습니다.
최혁배는 1970년 11월 13일 ‘생을 걸고’ 온마음으로 전태일을 만나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전태일로 살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안기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민주화운동 기독교 단체들의 자금줄을 건드린 그를 이른바 일부 종로5가 진보 목사들이 증오에 가깝게 싫어했고, 그를 안기부에 넘겼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결국 최혁배는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서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못 쓰게 돼 목발을 짚고 살다가 결국에는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최혁배를 만난 저는 그의 목발을 붙잡고 눈물이 핑 돌아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최혁배에 대해 전태일재단은 존경과 추념의 마음으로 경건하게 추도식을 주관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모란공원 민주묘역의 유골 안치식까지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하의 전태일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이근안처럼 전태일을 물 고문하면서 전태일로 하여금 진정한 벗이었던 최혁배의 얼굴에 침을 뱉도록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짐승 같은 짓거리였습니다.
아니 정정합니다. 짐승 분들이여! 널리 용서해주시길. 제가 실수로 잘못 말했습니다. 짐승들도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갚습니다.
지하의 이소선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까무러쳐 기절했을 것입니다.
전태일 재단의 최혁배 묘지와 장례식 방해는 전태일과 백기완 묘역을 성역화 ― 권력화하고 전태일을 기득권 금수저로 신분 상승, 아니 전락 ― 타락시키는 북한의 세습왕조식 행위와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금수저 기득권이라는 비유가 다소 비약이고 귀에 거슬리면서 좀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태일 재단이 폭력을 동원하면서까지 받들어 모시고 있는 우상은 이런 신분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지금 여기 오늘의 ‘고故 전태일’은 최하위 벼슬이지만 종9품인 ‘능참봉’들을 30여 명이나 거느리고, 조물주 위의 건물주로서 수십명의 비서진들을 두고 있는, 뼈대 있는 운동권 성골 이소선-전태일의 명문가 2세, 금수저 기득권으로 신분이 상승돼 있습니다.
전태일은 예수, 붓다, 보살입니다
전태일은 예수였고 붓다, 보살이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22살의 젊은 청년이 노동자도 인간이라며 분신을 결행하기에 앞서 쓴 유서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깊고도 잔잔하게 울립니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조영래, 『전태일 평전』 2차 개정판, 돌베개, 2021.
전태일의 일기를 보면 그는 오랜 시간의 고뇌와 사색을 거듭합니다. 마침내 전태일은 ‘나, 자아’를 버리고 나의 나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모든 생명체가 연결된 하나임을 깨닫고 생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조영래, 『전태일 평전』 2차 개정판, 돌베개, 2021.
그렇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단순한 투쟁과 저항의 행동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감동과 공명을 일으키고자 한 깨달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태일의 각성과 자비행은 이소선 어머니와 조영래, 최혁배 등 대학생들의 각성과 자비행으로 이어져 20세기 내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나의 나’인 또다른 전태일들이 생명으로 깨어나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