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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대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고 “그들은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림 형제Jacob Grimm, 1785~1863 & Wilhelm Grimm, 1786~1859의 「피처의 새Fitcher’s Bird」1812를 읽다 보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먼저 ‘어, 이게 동화 맞아?’ 하는 생각이 들죠. 애초에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데다 납치와 살인 같은 폭력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하니까요. 동시에 ‘어, 이거 「푸른 수염」인 것 같은데 왜 제목이 다르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줄거리가 프랑스 동화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의 「푸른 수염프랑스어: La Barbe-Bleue」1697과 흡사하거든요. 두 동화의 출판연도를 따져보면 「푸른 수염」이 「피처의 새」의 전신일 가능성이 높죠. 그런데 이 두 동화에는 사소하지만,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선 「피처의 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거지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납치해다 아내로 삼으려 했던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마법사는 한 집의 맏딸을 납치해 온 다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그녀를 안심시킵니다. 얼마 후 마법사는 방 열쇠들과 달걀 하나를 맏딸에게 맡겨 놓고 집을 떠나죠. 집안의 모든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되 한 방에만 절대 들어가지 말고 달걀을 항상 들고 다니라는 지시를 내려놓고요. 금지된 방에 들어가면 죽음을 맞을 거라는 경고도 하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맏딸은 금지된 방에 들어가고 맙니다. 방에서 토막 난 시체와 흥건히 고인 피를 발견한 맏딸은 놀라서 달걀을 떨어뜨리죠. 집에 돌아와 피 묻은 달걀을 본 마법사는 맏딸이 방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토막 내 죽입니다. 다음으로 붙잡혀 온 둘째 딸도 언니와 똑같은 일을 겪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딸도 붙잡혀 오죠. 그런데 언니들과 달리 막내딸은 달걀을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집을 돌아봅니다. 그녀는 금지된 방에서 언니들의 유해를 발견하고 토막 난 조각들을 접합해서 언니들을 살려냅니다.
집에 돌아온 마법사는 달걀에 얼룩이 묻어있지 않자 복종 시험을 통과한 막내딸과의 결혼을 서두릅니다. 막내딸은 바구니에 언니들을 넣은 다음 마법사에게 금을 넣은 바구니라며 창문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쉬지 말고 친정에 가져다 달라고 하죠. 쉬려고 하면 언니들이 바구니 안에서 빨리 가라고 꾸짖는 바람에 마법사는 쉬지도 못한 채 두 자매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줍니다. 막내딸은 해골에 옷을 입혀 다락방 창에 올려놓고 새로 변장한 다음 집에서 나옵니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마법사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오던 마법사가 이 새를 보고 붙여준 이름이 ‘피처의 새’입니다. ‘피처’는 마법사의 이름일 수도 있고, ‘물갈퀴 달린 새fitfuglar’를 나타내는 아이슬란드어나 ‘날개Fittich’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온 이름일 수 있답니다. ‘서투른 비행이나 펄럭이는 것flitcheren’을 묘사하는 중세 영어에서 왔다고도 하고요. 아무튼, 마법사 하객들과 마법사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세 자매의 오빠들과 친척들은 문을 잠그고 마법사의 집에 불을 지릅니다.
「피처의 새」는 막내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푸른 수염」과 달라집니다. 「푸른 수염」 이야기가 독일에서 변형을 거쳤거나 그림 형제가 새로운 요소를 덧붙여서 각색했을 수도 있겠죠. 「푸른 수염」에서는 막내딸 역시 금지된 방에 들어갔다가 달걀을 떨어뜨립니다. 결국 막내딸도 두 언니처럼 죽을 처지가 되지만 마지막 기도를 하는 순간, 오빠들이 들이닥쳐서 목숨을 구해 줍니다.
「푸른 수염」와 「피처의 새」 모두 금지된 방을 모티프로 한 동화입니다. 이 두 동화를 읽다 보면 ‘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호기심을 충족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판도라나 프시케, 세멜레 같은 신화의 주인공들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이 신화의 주인공들과 「피처의 새」 속 막내딸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금기를 어길 때 나타날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세워뒀느냐 아니냐일 겁니다. 그런데 판도라나 프시케, 세멜레와 달리 그리스 신화에도 이 막내딸처럼 ‘달걀을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호기심을 충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오디세우스입니다. 오디세우스는 페르세우스에 이어 ‘보지 말라’ 혹은 ‘알려고 하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도 비극적인 결과를 모면한 두 번째 주인공입니다.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의 『일리아드』기원전 8세기와 『오디세이』기원전 8세기에 주로 등장합니다. 이 두 서사시 모두 트로이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잠시 언급됐듯이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를 탈취한” 사건으로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중심으로 결성된 그리스군은 헬레네를 되찾아오기 위해 트로이를 포위하고 전쟁을 벌입니다. 『일리아드』가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해 중 나흘 낮과 이틀 밤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면, 『오디세이』에는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얼마 동안 계속됐을까요?
1. 한 달
2. 일 년
3. 십 년
4. 이십 년
트로이 전쟁은 장장 십 년 동안 이어집니다. 아킬레우스 같은 전사자도 나오고, 긴 전쟁에 지친 사람들은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죠.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목마 덕에 트로이는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요?
1. 한 달
2. 일 년
3. 십 년
4. 이십 년
또다시 십 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트로이 출정부터 귀향까지 총 20년이 걸린 거죠.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수많은 모험과 연애를 했던 그 이십 년 동안 어린 아들과 함께 고향에 남아 있던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수많은 구혼자로부터 결혼 압박에 시달립니다. 모험을 떠난 연인 페르귄트를 평생 기다리는 솔베이그와 비슷하죠. 페넬로페는 늙은 시아버지의 수의를 미리 마련해서 며느리로서 마지막 도리를 다한 뒤 재혼할 대상을 선택하겠다는 핑계를 댄 뒤, 낮에는 천을 짜고 밤에는 도로 풀어버리는 수법으로 수의의 완성을 미룹니다.
마침내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쯤 됐을까요? 60대 초반쯤 됐을 겁니다. 늙은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을까요? 사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그를 알아본 사람은 늙은 유모가 유일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발을 씻기다가 발등에 난 상처를 보고 그의 정체를 안 거죠. 그런데 유모보다 먼저 오디세우스를 알아본 존재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오디세우스의 사냥개 아르고스였습니다. 늙은 아르고스는 20년 만에 다시 만난 주인을 반갑게 맞이한 후 곧 숨을 거둡니다. 제가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펑펑 운 유일한 장면입니다.
도대체 오디세우스는 어디서 뭘 하느라 십 년이나 걸려서 고향에 돌아왔을까요? 물론 부하들도 한몫하긴 했습니다. 부하들이 때로는 포도주에 빠져, 때로는 연으로 만든 음식에 빠져 여정이 지연되기도 했으니까요.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시, 「연 먹는 사람들Lotus-Eaters」1832에는 고향을 잊은 부하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의 노란 모래 위에
해와 달 사이에 앉았다.
조국과 아이를, 아내와 노예에 대해
꿈꾸자니 달콤했다.
바다와 노는 지겨웠다.
황량한 거품이 일렁대는 바다도 지겨웠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돌아가지 맙시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함께 노래했다. “우리 고향 섬나라는
파도 너머 저 먼 곳에 있네; 이제 방랑은 그만합시다.”
― 앨프리드 테니슨, 「연 먹는 사람들」 중 일부
오디세우스는 식인종 라이스트리고네스족과 외눈박이 키클롭스족을 만나기도 만나고, 마법으로 사람을 돼지로 변신하게 만드는 키르케와 일 년을 보내기도 합니다. 키르케의 요구로 저승세계로 가서 예언자 티레시아스를 만나고 오기도 하고요. 오기기에 섬에서는 바다의 님프 칼립소에게 붙잡혀 7년을 같이 지내다 제우스의 개입으로 그곳에서 간신히 벗어납니다. 폭풍우에 부하와 배를 모두 잃고 표류하다 파이아케스인들이 사는 나라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아 공주와 알키노오스 왕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트로이에서 출발할 때 12척이었던 배와 600명 정도의 부하들을 모두 잃고 노인이 되어 홀로 이타카로 돌아온 겁니다. 이 글에서는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오며 겪은 여러 난관 중 세이렌의 유혹에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아이아이에 섬에 들릅니다. 이 섬에 살고 있던 여신 키르케는 마법을 부려서 부하들을 모두 돼지로 바꿔버립니다.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몰리라는 약초를 마시고 마법에 걸리지 않죠.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의 『오디세우스에게 잔을 건네는 키르케Circe Offering the Cup to Odysseus』1891에는 키르케가 돼지로 변신시키는 마법의 잔을 오디세우스에게 건네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키르케 앞에는 마법의 약을 만드는 온갖 약초들이 널려 있고 왼쪽 발치에는 그녀가 마법으로 변신시킨 돼지가 누워 있습니다. 그녀의 등 뒤 거울에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보이고요. 이 그림을 보면 거울이 등장하는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Arnolfini Portrait』1434이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시녀들Las Meninas』1656이 살짝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 색다른 느낌의 키르케 그림이 있더군요. 『키르케Circe』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 게오르게 그로스, 『키르케』, 1927년. 종이에 수채와 잉크, 65.7 × 48.6 cm. 현대미술관, 뉴욕.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33643 제공.) |
부적절한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돼지로 변신한다, 즉 동물 수준으로 전락한다는 의미겠죠? 키르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마법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제압해서 부하들을 모두 원래대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키르케는 그와 부하들을 일 년간 섬에 붙잡아 두죠. 그러자 부하들이 나서서 잔치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고향을 잊은 것처럼 보이는 오디세우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합니다. 오디세우스를 붙잡을 수 없었던 키르케는 떠나려는 오디세우스에게 앞으로 닥칠 여러 위험을 경고해 줍니다. 이때 키르케가 언급한 첫 번째 위험 요소가 바로 세이렌입니다.
이제 내 말을 잘 들어요.
신이 당신에게 상기시켜 줄 거예요.
먼저, 당신은 세이렌에게 가게 될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남자를 매혹해요.
그래서 모르고 가까이 갔다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고향에 절대 돌아가지 못하죠.
아내의 환영도 받을 수 없고,
아버지의 귀환에 얼굴이 환해지는 어린 자식들도 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높고 청아한 노래로 세이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테니까요. 세이렌은 썩어가는 사람 뼈들이
높이 쌓여 있는 풀밭에 앉아 있을 거예요.
말라 가는 살이 아직도 그 뼈들에 붙어 있죠.
그들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요.
동료 선원들이 절대 듣지 못하게 해야 해요.
달콤한 밀랍을 부드럽게 녹여 발라서 그들의 귀를
막아놓도록 해요. 그런데 당신이 꼭 들어보고 싶다면
동료 선원들에게 나무판에 당신의 손과 발을 묶은 다음
돛대 옆에 세우고 밧줄로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해요.
이렇게 하면 당신은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즐길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혹시 당신이 선원들에게 풀어달라고
간청하고 명령을 내리면, 선원들에게 이미 단단히 묶어놓은
결박을 더 세게 묶으라고 시켜요.
― 호메로스, 『오디세이』
오디세우스는 키르케가 알려준 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세이렌의 섬을 지나갑니다. 세이렌은 과거에 대해 위로받고 미래에 대해 현명해질 수 있으니 가까이 다가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높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오디세우스를 유혹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도취시켜 암초에 부딪혀 난파시키는 로렐라이 요정과 비슷하죠? 오디세우스는 동료 선원들에게 밧줄을 풀어달라고 신호를 보내지만, 동료들은 오히려 더 꽁꽁 그를 묶고 빠르게 노를 젓죠. 아래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오디세우스와 세이렌Ulysses and the Sirens』1891에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섬을 지나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아니, 세이렌이 하늘을 난다고? 인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스타벅스 로고 덕분에 세이렌을 인어로 알고 있는 분이 많을 테니까요.
| 스타벅스 로고. https://en.wikipedia.org/wiki/File:Starbucks_Corporation_Logo_2011.svg#/media/File:Starbucks_Corporation_Logo_2011.svg 제공. |
키르케의 경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이렌이 처음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기원전 8세기에는 세이렌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만 나오죠. 그러다 후대에 와서 세이렌이 때로는 상반신은 여성으로, 하반신은 새로, 때로는 인어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적화도기 속 세이렌의 모습과 워터하우스의 그림 속 세이렌의 모습이 비슷하죠? 그림의 구도도 유사하고요. 그런데 이 두 그림을 보다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위에 말씀드린 키르케의 경고에 보면 세이렌은 풀밭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고 나와 있거든요. 더 이상한 것은, 세이렌이 그림처럼 뱃사람 가까이 날아올 수 있다면 굳이 가까이 다가오라고 노랫소리로 유혹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어쨌든 인어건, 새건, 세이렌이 목소리로 남자들을 유혹한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세이렌은 매력적이면서 위험한 여성의 유혹, 특히 여성의 설득력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죠. 이런 점에서 세이렌은 메두사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메두사 역시 여성의 설득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페르세우스 신화에 대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동산에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이브를 유혹하기 때문에, 뱀은 곧 사탄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뱀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는 뱀 같은 혀를 놀려 남성을 유혹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성의 설득력에 대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메두사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세이렌 이야기 역시 여성의 설득력을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키르케와 일 년을 같이 보낸 전력이 있고, 앞으로 칼립소와 칠 년을 함께 보내게 될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의 유혹쯤이야 아주 사소한 위험 아니었을까요? 『오디세이』 24권 중 이제 딱 중간인 12권에 이르렀는데 주인공을 해골로 만드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고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위기를 기다렸던 제 기대와 달리 오디세우스는 동료 선원들의 비협조로 무사히 세이렌의 섬을 벗어납니다. 그 후 세이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오디세이』에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이우스 히기누스Gaius Hyginus, 기원전 64년~서기 17년의 『이야기Fabulae』에 의하면, 오디세우스가 탄 배가 돌아오지 않고 가버리자 세이렌이 절망해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세이렌과 스핑크스가 겹치죠? 세이렌처럼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던 스핑크스 역시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다른 신화 텍스트에 의하면 세이렌의 노래에도 유혹되지 않고 세이렌의 섬을 무사히 통과한 또 다른 배가 있습니다. 아폴로니오스Apollonius of Rhodius의 『아르고나우티카Argonautica』기원전 3세기는 이아손과 함께 황금 양모를 구하기 위해 아르고호에 탄 50명의 영웅에 대한 서사시입니다. 아르고호 역시 세이렌의 섬을 지나가게 되는데 오르페우스가 수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 세이렌의 노래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 후 세이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지만 『아르고나우티카』에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만남에 대해 살펴봤으니, 이제는 이 신화에 들어있는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키르케는 세이렌에 대해 경고하면서 동료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놓으라고 한 반면, 오디세우스에게는 “당신이 꼭 들어보고 싶다면 동료 선원들에게 나무판에 당신의 손과 발을 묶은 다음 돛대 옆에 세우고 밧줄로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해요. 이렇게 하면 당신은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즐길 수 있을 거예요.”라며 선택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동료 선원들처럼 귀를 밀랍으로 막아서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아예 듣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돛대에 결박당한 상태로라도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것인가?’ 결정권은 오디세우스에게 넘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귀를 막으면 안전은 보장되는 반면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없고, 귀를 막지 않으면 세이렌의 노래는 들을 수 있겠지만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부정적인 결과가 생기는 딜레마입니다.
‘귀를 막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들을 것인가?’라는 오디세우스의 딜레마는 먼저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의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화들과 달리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신화에서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금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불을 인간에게 주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이 있었고, 판도라에게는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이 있었죠.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명령했고,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려 하지 ‘말라’고 금합니다. 파에톤은 아폴로로부터, 이카로스는 신들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아버지 다이달로스로부터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요. 오이디푸스 역시 아폴로의 신탁을 전달하는 티레시아스로부터 더 이상 진실을 캐지 ‘말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오르페우스 역시 하데스로부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에게는 키르케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으면 들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올림포스의 신은 아니지만 여신의 명령이 없었다고 해서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죠. 페르세우스 신화에서 보지 ‘말라’는 신의 명령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메두사의 얼굴이 금기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되니까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는 것은 금기를 따르는 것이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은 금기를 어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사 팔과 다리를 결박당한 상태로 노래를 듣는다 해도 말이죠. 그러니 ‘듣지 말라’는 금기를 충실히 지키는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이고, 금기를 어기는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귀를 막을 것인가?’의 대립 구도는 다시 자유로운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아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를 살짝 변형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백 번 듣는 것보다 세이렌의 목소리를 한 번 직접 들어보는 것이 낫다’가 되겠죠. ‘백문이불여일견’은 ‘보는 것’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말은 아닙니다. ‘보는 것’을 포함한 모든 ‘직접 경험’을 다 포함하는 말이죠. 이것을 문학 용어로 설명해 보면, ‘백문이불여일견’에서 ‘문聞’은 ‘듣는 것’으로 모든 ‘간접 경험’을, ‘견見’은 ‘보는 것’으로 모든 ‘직접 경험’을 의미하는 환유입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 환유니까요. 예를 들어, ‘손’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일손’이나 ‘머리’로 ‘마리’를 나타내는 ‘소 50두,’ ‘돛’으로 ‘배’ 전체를 나타내는 ‘돛을 올리다’ 같은 표현은 모두 환유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겠다는 오디세우스의 바람은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은 욕망, 즉 직접 경험함으로써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경우 벌어질 끔찍한 결과를 우려해서 내려진 밀랍으로 귀를 막고 ‘듣지 말라’는 조치는 지적 호기심에 대한 통제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는 정치 상황을 묘사할 때 국민의 ‘눈과 귀를 막다’ 혹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으며, 입을 틀어막다’라고 표현하죠. 이 표현들 모두 ‘듣는 것’이 곧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와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디세우스는 이 두 대립 구도를 무너뜨리는 해결책을 따름으로써 딜레마를 벗어납니다. 물론 이 해결책을 오디세우스가 찾아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이것을 따르느냐 마느냐는 결국 오디세우스의 선택에 달려있었죠. 페르세우스와 마찬가지로, 오디세우스는 호기심 대 통제의 대립 구도에서 “양자택일 대신 양자를 모두 선택합니다. 아니, 양자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봤다면, 오디세우스는 섬에 올라 세이렌 가까이서 노래를 듣는 대신, 배 위 돛대에 기댄 채결박당한 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피처의 새」에서 막내딸이 금지된 방에 들어가기 전에 달걀을 안전한 곳에 내려놓은 것과 같은 영리한 방법을 선택한 거죠. 세이렌의 노래가 초래할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피해를 피할 수 있도록 결박이라는 안전대책을 세운 다음 멀찌감치 떨어져서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서 듣지 않았고, 동시에 듣지 않으면서 들었습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금기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금기를 위반했습니다. 그는 이 선택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면서 도전했고, 지적 호기심을 적당히 억누르면서 충족했습니다.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 없이 지적 호기심을 90퍼센트 정도 충족한 거죠.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안전하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쯤 해서 정말로 궁금해지지 않나요? 도대체 세이렌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기에 오디세우스는 결박당한 채라도 듣고 싶었던 걸까요?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분은 여기를 눌러 보세요. 클로드 드뷔시의 『세 개의 야상곡』 중 「세이렌」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세이렌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MptyFmD8uQ)
오디세우스의 대안에서는 몇 가지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오디세우스가 택한 결박이라는 대안은 통제라는 말과 연관됩니다. 몸은 밧줄로 꽁꽁 동여맸지만, 귀까지 막지는 않았으니까요. 듣기 위한 귀는 열어 둔 채 세이렌의 섬에 올라가지 않도록 몸을 결박하는 것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 1947~ 가 『금지된 지식Das wichtigste Wissen』2020에서 말한 “통제”에 해당합니다. 동료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서 아예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지적 자유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금지”라면, 자유로운 지적 추구는 허용하되 어느 정도의 제한을 가하는 것은 “통제”라 할 수 있습니다. 피셔는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누구도 지식을 향한 추구를 인간에게서, 예컨대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예컨대 정치권력을 통해서 금지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했죠. 그렇다고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피셔는 자유로운 지식 추구는 “금지”하지 않되 이런 지적 추구가 초래할 위험을 예상해서 예방조치로서 일정 부분 제약을 가하는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그의 생각이 집약돼 있습니다.
피셔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살펴볼까요?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최초 시행했고, 2013년부터 전부 개정된 법률을 시행했습니다. 이 법률에서는 윤리적 문제와 안전성 문제로 체세포 복제 기술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의학적 연구 목적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체세포 복제 배아 연구에 사용되는 난자는 수정되지 않은 잔여 난자나 적출 난소에서 채취한 잔여 난자로 한정되고 있죠. 반면에 인간 개체 복제나 이종간異種間 핵이식, 혹은 인간 배아에 줄기세포를 이식하는 행위는 금지되고 있습니다. 체세포 복제 기술 연구를 전면 “금지”한 것이 아니라 엄격한 허용 조건에 따라 “통제”하고 있는 거죠. 물론 영국처럼 체세포 복제를 허용한 나라도 있습니다. 체세포 복제를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국가에서는 기술 연구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고 규제할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밀랍 때문에 듣지 못하는 동료 선원들에게 결박을 풀어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내는 오디세우스처럼 난치병이나 불임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에서 체세포 복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체세포 복제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유롭게 탐구할 것인지, 아니면 규제라는 안전장치를 설치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인류에게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딜레마가 체세포 복제 기술 분야에만 한정되진 않죠. 인공지능AI, 정보 통신 기술ICT, 나노 기술, 에너지 기술, 우주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자유로운 지적 탐구 대 규제의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대안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성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이미 예상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오디세우스의 결박은 지식 대상을 간접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지식/진리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섬에 올라 세이렌의 지척에서 노래를 듣는 것이 직접적으로 노래를 듣는 것이라면 배 위에서 결박된 상태로 거리를 둔 채 조금 떨어져서from a distance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은 간접적으로 노래를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페르세우스가 청동 방패에 비춰서 메두사의 얼굴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섬에 올라 지척에서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노래를 듣는 순간 죽는다는 것은 결국 지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지식 혹은 진리가 간접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이 두 번째 특성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세 번째 특성으로 이어집니다. 즉, 완전한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결박된 채 멀리서 듣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지척에서 듣는 소리보다 더 작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완전한 지식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알고자 하는 욕망을 극도로 추구하다 눈이 먼 오이디푸스와 달리 부분적인 진실에 만족한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페르세우스의 선택과 더불어 인간의 지적 탐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부분적인 지식에 만족하라.’ ‘지식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지식 탐구 대 규제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여러 그리스 신화에서 얻은 이런 사실들을 잊지 않는다면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처럼 인류 역시 지식과 기술 추구 과정에서 생겨날 부정적인 효과를 조금은 줄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오디세우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설사 죽은 한이 있더라도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시겠어요? 아니면 귀를 막으시겠어요? 아니면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