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정남수
소속 동아리 방구석살롱
여행 지역 전북 무주군
여행지 한 줄 추천 더운 여름 가볍게 시집과 떠나는 여행
5년 전 봄이었다, 결혼 전 책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몇몇이 육아와 살림에 지쳐가다가 우연히 다시 모이게 된 때는. 평일 저녁 시간 책을 매개로 강연이 열리고,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즐거운 시간은 결혼과 함께 멈췄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컸지만, 그와는 별개로 읽고 나누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러다 우연히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모여보자고 의견을 모았고, 회원의 방구석에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네 번의 봄을 더 보냈다.
계절마다 방구석에 모여 읽은 책들은 다양했다. 심리학 관련 책부터 소설에 시집까지 두루 읽었다. 책 이야기에 각자의 이야기가 보태지고, 전문적이지 않아도 깊이가 얕아도 좋았다. 산책하듯 정한 길이 아닌 곳으로 이리저리 이야기가 흘러도 지루하지 않았다.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모임이 차곡차곡 쌓였다. 다시 읽고 나누는 재미를 찾을 무렵 코로나19의 엄한 시기를 지나야 했지만, 온라인으로 만나고 띄엄띄엄 만나고, 맘이 있는 곳에 책과 함께 모임이 있었다.
어느 날 에너자이저 회원이 “사람과 책이 만나고 책과 여행이 만나다” 공모전 이야기를 했고, 그 핑계로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다 금방 날이 잡혔고, 뒤이어 여행지와 숙소도 잡혔다. 우리가 묵을 펜션을 보니 객실마다 이름이 ‘파울폰 하이제, 앙드레 지드, 오에 겐자부로’ 등등이었다. 책 모임의 여행을 위한 숙소로 우연치고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어서 여행과 함께할 책으로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를 골랐다. 뜨거운 여름이 절정일 때 나오기 시작하는 사과의 색깔을 한 시집이라니. 게다가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다니! 여름 책 여행에 딱 맞는 시집이었다. 책이 먼저인지 여행이 먼저인지 중요하지 않을 계획이 이렇게 또 우연히 만들어졌다.
![]()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방구석살롱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 「여름」 중
여행의 묘미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밤이 새도록 나누는 이야기가 아닐까? 매번 헤어질 때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말하는 우리에게 무한의 시간이 주어진 것 같은 배부른 느낌이니까. 숙소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던 숯불 연기도 줄어들고, 시끌거리던 바깥의 소리도 조용해졌다. 풀벌레 매미 소리도 잦아들고, 가까운 듯 먼 듯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만 남을 때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저녁 식사 후 우리가 돌아간 숙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던 지나온 이야기의 이야기들. 있는 그대로 맘껏 풀어내는 무장해제의 시간이었다. 뜨거운 여름이 오려면 당신들이 필요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사과나무를 심었어
누군가 몰래 사과를 따도
붉은빛이 매달려 있는
여름밤
― 「8월의 크리스마스」 중
책 모임을 한 지는 5년이나 됐는데,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간 건 처음이었다. 여고 수학여행 기분으로, 대학교 엠티 기분으로 뭘 해도 낄낄대고 선선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덕유산’으로 향했고, 날씨는 폭염을 토해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신나 있었다. 가벼운 시집을 들고 산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맘에 드는 시를 한 편씩 읽었다. 시를 함께 읽는 재미는 자기가 골라내는 시 안에 자기의 마음이 그대로 비친다는 거다. 똑같은 시집이고 시인데,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고 발 아래 계곡 물소리가 배경으로 깔리고, 서로가 읽는 시를 음미한다. 들뜨고 즐거운 마음만은 진정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오늘은 너도
시가 된다는 것
너는 가장 달콤한
시라 는 것
― 「나의 시인」 중
![]()
‘덕유산’ 곤돌라를 타고 내리면 정상인 향적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물론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속아서 올라갈 만한 거리이다. 높은 하늘과 구름, 낮은 야생화와 나란히 걸어서 가는 기분은 가느다랗게 연결된 선을 따라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내 느낌과 경험에 맞춰 나아가다 보면 어느샌가 책의 정수에 다다르는 것처럼 말이다. 힘겹게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희열도 그렇다. 무심하게 걷고 걸어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정상의 산바람은 시원했다. 정상에 서서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람을 맞았다. 회원들 각자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풀어보며, 혹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숨을 고르는 순간. 이때만큼은 모두가 시인이 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시상詩想이 되는 듯했다.
가능하다면 내가 아는 기쁨 을 나누고 싶다
글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을 말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유일」 중
여행하면서 남긴 사진들을 보니 표정이 하나같이 모두 밝다. 절로 웃음이 나는 사진에 오래오래 소장하고 싶은 사진까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누군가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맞지만, 사진만큼 더 오래 남는 것은 글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오늘의 기억과 이번 여행의 추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쏟아내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감동의 정도가 ‘갈라진 주전자’ 수준이라 할지라도, 나의 책 모임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서툴게라도 이야기하고 싶고 기록해 두고 싶다. 시인도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마음이거나, 혹은 더 큰 소명으로 가치 있는 것을 나누기 위해 책을 쓸 것이다. 우리는 책 모임을 통해 간접적이지만 다시 그 가치를 함께 이야기하며 나름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새롭게 나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이다.
어쩌다 시작된 책 모임.
어쩌다 다녀온 책 여행.
여름이 오려면 당신들이 필요해.
다음 여름에도 또 다음 여름에도,
어쩌면 매 여름마다.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