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 이끌려서 샀지만 읽지 않고 모셔두기만 했던 『멜랑콜리아 I-II』를 다시 꺼냈다. 책 제목만으로 어떤 우울에 관한 이야기이겠거니 지레짐작하고서 읽기는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나의 우울에 어떤 우울까지 덧붙일 것이 두려워서였다. 욘 포세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소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멜랑콜리아 I-II』는 욘 포세가 재구성한 라스 헤르테르비그Lars Hertervig, 1830~1902에 관한 이야기다. 라스는 재조명된 노르웨이의 유명한 풍경 화가라고 한다. 인상파 화가로서 고흐는 친숙하지만, 풍경 화가로서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낯설다. 라스는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호기심, 그것이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I-II』를 읽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망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했다가 지치고 우울해진다. 욘 포세의 독특한 글쓰기 탓에 나는 라스의 탈구된 시간성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닌다. 서사는 끊임없이 도돌이표다. 마침표도 없이 반복적으로 흘러다니는 욘 포세의 단편 연작인 『3부작』보다도 장편서사인 『멜랑콜리아 I-II』는 긴 호흡으로 한층 더 반복 강박에 시달린다. 저 멀리 빛이 보이는 자유의 땅으로 헤엄쳐가고 싶은데 밀려드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도망친 해변으로 번번이 되돌아오는 탈옥범의 거듭된 좌절처럼, 이야기의 진척을 고대하는 독자의 기대는 보기 좋게 좌절된다. 서사는 서서히 물속으로 잠기는데도, 마침내 나는 라스의 느리고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시간성 속에서 숨쉬기가 편안해진다. 경이로운 경험이다.
「멜랑콜리아 I」과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자본주의적인’ 책읽기에 중독되었는지를 절실하게 경험한다. 투자한 시간 대비 책에서 빨리빨리 ‘이익’재미, 위로, 교훈, 경험, 지식, 성찰 등을 착취하여 나의 것으로 축적하고자 했다. 이익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생산적인’ 독서인 것처럼 착각했다. 하지만 ‘정신머리나간’ 화가, 적당히 실패한 작가, 치매 노인의 특이한 시간성으로 전개되는 『멜랑콜리아 I-II』는 ‘자본주의적인’ 읽기를 보기 좋게 좌절시킨다.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노래 가사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이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서사적 자본을 찾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인 읽기에 저항하는 황량하고 고독한 『멜랑콜리아 I-II』의 깊고 어두운 우물 속에서 익사 직전의 고요한 평온함이 마침내 빛과 함께 찾아든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농인의 수어 속에서 청인이 맛보는 구어 너머의 숭엄함이라고나 할까?
「멜랑콜리아 I」은 1853년 늦가을 실패한 화가인 ‘나’ 라스의 어떤 하루, 1863년 가우스타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나’ 라스의 어떤 하루, 그리고 1991년 적당히 실패한 작가인 비드메가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걸린 라스의 그림과 만나는 어떤 하루로 구성되어 있다. 특정한 연도의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의 사흘 동안의 이야기가 조금씩 변주되면서 결코 마침표가 찍히지 않을 것처럼 거의 400페이지손화수 번역본으로에 걸쳐 흘러간다. 연작처럼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II」는 1902년 초가을 스타방에르 언덕꼭대기에서 살고 있는 라스의 누나 올리네의 어떤 하루의 회상이다. 「멜랑콜리아 II」는 「멜랑콜리아 I」에서처럼 일인칭 ‘나’의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삼인칭 시점이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늙고 치매에 걸린 올리네의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시점이기 때문이다. 수명이 다해 깜빡거리는 형광등처럼 올리네의 기억은 흐릿하고 몽롱하다. 그럼에도 어린 동생 라스에 관한 기억만큼은 오늘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다’고 올리네는 말한다. 이처럼 미쳤거나, 치매이거나, 혹은 신탁이거나 간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상의 둔감한 시간성 속에서 전개되는 서사와는 결을 달리한다.
1853년 뒤셀도르프, 늦가을 오후,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스승이자 유명한 화가인 한스 구데를 만나야 하지만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를 만나기 싫다. 무기력하게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나’는 누워있다. 마치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에서 작은 북소리가 ‘한스 구데를 만나기 싫다’로 시작한다면, ‘싫다, 싫다, 싫다’는 북소리의 크레센도처럼 고통스럽게 증폭된다. 독자는 무기력하게 누워서 반복 강박증자처럼 다시 또다시 구데에게로 되돌아가는 ‘나’의 내면세계로 어느새 들어가게 되고 ‘나’의 눈으로 어둡고 막막한 세상과 만나게 된다.
헬레네가 머리카락을 물결처럼 출렁이며 나타난다. 황금빛이 반짝거린다. ‘나’는 헬레나를 사랑한다. ‘나’는 난생처음 말카스텐에 간다. ‘나’는 말카스텐의 문을 연다. 밝은 빛 속에서 헬레네가 기다리고 있다. 그 빛은 흰색과 검은색의 천들로 바뀐다. 헬레네는 흰 천 검은 천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진다. 그림도 못 그리는 화가들이 말카스텐에서 왁자지껄 떠든다. ‘동굴 속에 홀로 누워있지 않고 왜 나왔나?’ 퀘이커 교도가 말카스텐에 오면 안 되지. 미친놈. 자네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여기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랑 얘기함세. ‘나’가 보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하고 ‘나’가 듣는 것을 그들은 듣지 못한다. 그들의 둔감함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환각, 환청, 환시, 유령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흰 천과 검은 천으로 변한 헬레네가 ‘나’의 눈을 가린다. ‘나’는 헬레네와 함께 슈트케이스를 끌고 그곳을 떠난다.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
1856년 가우스타 정신병원 크리스마스이브다. 산드베르그 박사는 나에게 건강해지려면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우스타 병원에 있을 동안 ‘나’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 나는 이제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세상일과 갖가지 의미들을 지우고, 근심걱정을 가느다란 직선으로 그린다.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빛, 내 눈에 보이는 빛을 그려야 한다. ‘나’는 퀘이커 교도인 아버지의 말씀대로 내면에 고요한 빛을 간직한다.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지 않는다면 다시 빛 속에 앉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박사는 나에게 자위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 올레 산드베르그 박사의 집무실에 가기 싫다. 그는 내게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1853년 한스 구데가 나에게 화가의 자질이 없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면, 1856년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는 산드베르그 박사의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처방이 ‘나’는 두렵다. ‘나’는 도망쳐야 한다.
1991년 늦가을 저녁, 오슬로의 오네사. 작가 비드메가 비바람을 헤치며 어둠 속을 걷고 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작가다. 세찬 비바람으로 우산은 망가지고, 신발창은 떨어져 덜렁거린다. 그는 오늘 새로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지만 시작할 수가 없다. 적당히 실패한 작가 비드메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다. 그는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 갔다가 신의 계시작가로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처럼 그림 한 점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것이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보르그외위 섬」이다. 그 그림 앞에서 비드메는 얼어붙고, 인생 최대의 경험을 한다. 비드메는 라스의 고향인 보르그외위 섬을 찾아간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그냥 미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비드메는 글을 쓰기 위해 신의 자비를 구한다. 그에게는 신의 자비가 필요했다. 라스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선 신의 자비가 필요하다.
「멜랑콜리아 II」 1902년 초가을 스타방에르: 올리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어린 시절의 일뿐이다. 그 기억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올리네는 지금 요강 위에 앉아 있다. 속옷이 젖은 것 같다. 옥외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들다. 요강에 볼일을 보아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정신이 깜빡거린다. 모든 것이 아슴푸레하다. 어부 스베인이 공짜로 준 물고기를 어디에 두었더라? 이제야 드디어 오줌이 간신히 나온다. 한 방울, 한 방울. 속옷은 이미 젖었지만 일어서기조차 힘들다. 어린 시절 라스는 아버지 일을 거들지는 않고 하루 종일 쏘다니다가 완전히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라스는 참으로 독특하고 이상한 아이였다. 바닷가에 떠밀려 온 부포에 석탄가루로 희한한 그림을 그렸다. 자기만의 동굴에 앉아서 피오르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애가 유명한 화가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자주 화를 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다가도 눈물을 뚝뚝 흘렸던 라스의 슬픈 눈이 떠오른다.
어부 스베인이 준 물고기의 눈이 젖어 있다. 라스의 눈이 젖어 있다. 라스가 물고기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올리네는 생선 눈알을 빌려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 생선 눈알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진다. 온몸이 축 늘어지면서 너무나 평안해진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눈알이 하나가 되고,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댄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있던 올리네는 그제야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새어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514쪽)
적당히 실패한 가난한 작가 비드메가 신의 계시처럼 라스의 그림과 만나고 그에 관한 책을 쓰려고 신의 자비를 구하듯, 라스의 광기는 신의 빛이자 저주처럼 다가온다. 비드메는 「보르그외위 섬」이 보통의 시선과 감각적인 강도로는 듣고 볼 수 없는 하늘, 구름, 바다, 바위, 섬의 환상적인 풍경임을 섬광처럼 알아본다. 그것이 라스가 내면의 빛으로 본 보르그외위 섬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비드메는 바로 그 미친 강도의 시선이 예술적 창조력과 맞닿아 있다고 여긴다, 신의 목소리를 영접한 영혼의 빛이라고. 보통 사람들은 그가 본 그 빛 속의 풍경을 미친 사람의 시선으로 치부했지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적당히 실패한 작가 비드메는 그것을 안다. 라스의 광기는 예술로 남고 우리는 비드메에게서 빌려온 애도를 통해 우울의 바다를 건너간다. 섬세한 신경다양증자들이 자기파괴를 통해 보여주는 광기의 예술에서 위안을 구하면서도, 우리는 적어도 ‘나는 살아남았어’라는 우월감을 동시에 맛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우울하고 ‘사소한’ 삶은 광기의 바다에 점점이 놓여 있는 예술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멜랑콜리아의 검은 바다를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