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네 서점이 문을 열었다. 마들 서점이 ‘휴남동 서점’이 될 리 만무했다. 온라인으로 무엇이든 주문하는 시대에 오프라인의 작은 책방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책방은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책에다 코를 파묻고 지냈던 중년의 여주인은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작은 카페가 들어섰다. 카페 또한 금방 사라졌다. 지금은 탕후루 가게가 들어섰다.
사라진 동네 책방을 생각하다가 피넬로피 피츠제럴드의 『북샵』이 떠올랐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환갑 진갑의 나이인 61세에 그녀는 첫 소설, 『황금 아이』를 썼다. 1970년대 영국인들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인생의 저물녘에 소설 쓰기에 도전한 셈이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북샵』1977의 여주인공 플로렌스 그린처럼, 그녀는 굳건하게 버텼다. 『북샵』은 한때 책방을 한 적이 있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소설이었다. 철학 이론이 철학자의 자서전이라고 한다면, 소설 담론은 소설가의 자서전이다. 자전적 소설인 『오프쇼어Offshore』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그녀는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Y2K 재앙 운운했던 새천년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이야기들은 남았다.
1959년 플로렌스 그린은 한적한 바닷가 소도시 하드버러에서 서점을 열고 싶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8년째 접어들었다. 정체되어 있고 보수적인 이 동네에서 그녀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전쟁터에서 병사한 남편의 연금에 기대어 살고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힘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 동네에는 폐허처럼 버려진 오백 년 된 올드하우스가 있었다. 그 건물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밤이면 난리법석을 부린다고들 했다. 플로렌스는 그런 올드하우스를 구입하여 서점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서점 건으로 잠을 설친 어느 하루 플로렌스의 눈에 공중을 날고 있는 왜가리 한 마리가 들어왔다. 왜가리는 결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장어를 삼키는 중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플로렌스는 ‘인간 세상 또한 절멸시키는 자와 절멸당하는 자로 나뉘어 있고, 언제나 절멸시키는 자가 우세하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심지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쾌락으로 즐기는 사람들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하드버러 주민들은 대부분 고독했고, 대부분 은퇴자들이었다. 외부와 연결시켜주는 철도마저 끊어진 지 오래여서 하드버러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이 지역 명문가 후손인 늙은 브런디시 씨는 홀로 살면서 ‘오소리처럼’ 동굴에 칩거 중이었다. 이처럼 적막한 동네이지만 주민들은 신기하게도 남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꿰고 있었다. 플로렌스가 서점을 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북샵』은 3인칭 제한적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여주인공인 플로렌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 또한 플로렌스를 지켜보면서 소문을 퍼뜨리는 하드버러의 주민들과 한통속으로 은연중 끌려 들어가게 된다.
급할 때면 동네 수의사까지 겸하고 있는 농부 레이븐 씨는 플로렌스에게 서점을 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고 넌지시 비친다. 플로렌스는 그것이 왜 문제인가 물었다. 그러자 레이븐 씨는 “이 마을 사람들은 진귀한 것을 사려고 하지 않거든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플로렌스에게 책은 진귀한 것이 아니라 빵과 마찬가지로 생활필수품이었다. 은행 대출을 받으러 갔을 때 지점장인 키블 씨 또한 늘그막에 서점을 내겠다는 플로렌스에게 그런 문화사업으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장 큰 난관은 이 지역 실세인 바이올렛 가맛 부인이 올드하우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뜬금없이 올드하우스를 지역문화센터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류층 파티에 의아하게도 바이올렛을 초대했다. 올드하우스가 아니라 데븐 씨가 내놓은 어물전 건물이 서점을 하기에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겠냐면서 그녀는 플로렌스의 의중을 은근히 떠보았다. 플로렌스는 바이올렛이 좋은 뜻으로 조언했겠거니 하고 주저 없이 올드하우스에 서점을 열었다. 바이올렛은 사교적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플로렌스 때문에 체면을 구겼다. 이해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는 플로렌스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바이올렛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플로렌스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왜가리와 장어의 싸움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온동네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플로렌스뿐인 것처럼 보였다.
바이올렛의 훼방과 동네 주민들의 걱정과는 달리 서점은 명소가 되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작 열 살인 크리스틴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서점의 조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크리스틴은 나이는 어리지만 똘똘하고 당돌했다. 크리스틴은 차 도구를 담은 플로렌스의 쟁반을 보고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오래된 쟁반, 제 마음에 들어요. 제게 주겠다고 유언장에 써주세요.”124쪽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서점의 창문을 요란스럽게 흔들면서 소란을 피워도, 크리스틴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았다. 어린 여자아이와 나이 든 여자 둘이서 의외로 서점을 잘 꾸려나갔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서점의 수입이 지출을 상회했다. 마침내 행운이 플로렌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 당시 외설인가 예술인가로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던 화제작이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 이 동네에서 그녀의 유일한 지지자인 브런디시에게 『롤리타』를 읽어보시고 발주할 만한 책인지를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롤리타』의 발주는 그녀에게 돈의 문제에 앞서 작품의 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책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해달라는 것이었다. 서점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까지 안고 가는 것이라고 플로렌스는 믿기 때문이었다.
그 건으로 인해 플로렌스는 브런디시의 홀트하우스에 초대받는다. 홀트하우스에 초대받은 사람은 플로렌스가 처음이었다. 브런디시는 바이올렛 가맛이 당신을 쫓아내려 한다고 알려준다. 그런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플로렌스를 보면서 그녀의 용기에 연대한다. 왕립협회 회원인 그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용기야말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일의 미덕이었다. 비록 고목이 되었지만 이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브런디시가 그녀의 지지자가 되어 준다면 바이올렛과의 전투에서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서점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브런디시의 말에 플로렌스는 “구태여 걱정 속에 파묻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으니까요”라고 씩씩하게 답한다.
250부나 발주한 『롤리타』는 불티나게 팔렸고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가맛 부인의 법정 대리인으로부터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협박이 들어온다. 서점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로가 혼잡해지고, 서점 창가에 진열된 책은 아이들의 교육에 부적절하다는 이유 등이었다. 플로렌스의 법정 대리인인 손턴은 소송에 대비하여 나보코프의 선정적인 소설 판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크리스틴의 학교로는 교육청 감사가 진행되었다. 플로렌스가 아동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북적이는 서점과 달리 파리 날리는 주변 상인들마저 서점에 적대적이었다. 바이올렛의 조카는 의회에서 토지수용 법안을 상정했고 법안은 통과되었다. 거주 목적이 아닌 건물로서 오래 비어 있는 경우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역자치단체가 강제수용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법안이었다.
1960년 가을 브런디시 씨는 가맛 부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가맛 부인에게 힘들여 방문한 이유를 단호하게 말했다. 플로렌스 부인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바이올렛
브런디시 씨는 이 마을의 발전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좀 더 유의미한 용도로 써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브런디시
오래된 것과 역사적 가치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둘이 똑같다면 저나 댁이 나 지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겠지요.(228쪽)
기득권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는 바이올렛과 그녀의 정계·재계의 인맥들과 더불어 동네 사람들은 대단한 악의에서라기보다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라서 바이올렛의 편에서 움직이게 된다. 서점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 온 동네가 합심한 셈이었다. 그것이 단지 서점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올드하우스의 강제수용 배후에는 수천만 제곱미터의 해변 습지대와 농지 등을 수용하여 개발하겠다는 시의회의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독자들이 보기에 안타깝게도 브런디시는 바이올렛의 스테드 저택에서 돌아가는 길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브런디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그를 추모하고 싶었던 플로렌스에게 가맛 장군이 구태여 찾아온다. 그날 에드먼드 브런디시 씨가 힘들여 스테드를 방문한 이유는 바이올렛의 계획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올드하우스는 강제철거에 들어갔고 플로렌스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플로렌스는 책도 잃고, 서점도 잃고, 올드하우스도 잃고, 브런디시 씨도 잃었다. 1960년 가을 그녀는 하드버러를 떠났다. 그녀가 10년 가까이 거주한 마을은 서점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샵』은 제인 오스틴류의 유머가 깔린 영국식 사실주의 작품이다. 가난하고 홀로 늙어가는 여자는 존중은커녕 얕잡아 보이기 일쑤다.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물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용기라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88세인 캔 로치 감독은 「나의 올드 오크」에서 ‘용기, 저항, 연대’라는 오래된 깃발 아래 폐광촌의 가난한 영국 시민들과 외부에서 유입된 시리아 난민들이 함께 용기를 내서 저항하고 연대하자고 호소한다. 노감독이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연대의 희망처럼 보이지만, 개연성 없는 연대는 공허하게 다가왔다. 『북샵』은 플로렌스의 완벽한 패배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으니까’라는 플로렌스의 담담한 환상을 독자들에게 공유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환상으로 인해 영화화된 「북샵」은 어린 시절 당돌하기 그지없었던 크리스틴을 화자로 내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이가 들고 머리가 희끗해진 작가 크리스틴의 회상을 통해 영화는 언젠가, 어디서든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플로렌스의 계보를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