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사람이 혼잣말을 한다. 드물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있지만 혼자 있는 사람이다. 자기 앞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 누구도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혼잣말은 자기 안에 타인을 상정하고 나누는 말놀이, 역할놀이이기 때문이다. 앞에 타인이 없을 때 안에서 타인이 출현한다. 앞에서 타인이 말을 걸지 않을 때 안에서 말을 거는 타인이 태어난다. 앞에서 타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안에서 말을 들어줄 타인을 등장시킨다. 이 출현과 등장은 자아의 분열에 다름아니다. 분열을 통하지 않고 안에서 타인을 등장시키는 방법은 없다. 분열을 통해 한 주체는 나와 너, 주와 객으로 바뀌고, 심지어 나와 너희들, 하나의 주와 수많은 객들로 바뀌고, 그러면 비로소 대화가 가능해진다.
말이 소통을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소통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혼자에 있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굳이 말을 하기 위해 자기를 주와 객으로 나누는 것은 왜일까. 주와 객으로 자기를 나누어서까지 굳이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널리 퍼진 생각과는 달리 말이 소통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말을 사용하지 않는 동물들의 소통 능력이 말을 사용하는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다. 소통에 대한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말을 하려고 자기 안에 타인을 만들어내기까지 하지 않는가.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조건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통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살아 있다.’ 이것은 선언이다. 호흡과 맥박과 피의 순환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은행나무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