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출현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국가권력은 인민들이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을 내재화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개별적인 신체’에 대한 규율과 훈육에 관심을 두었다. 여기에서 근대적 규율권력이 출현한다. 감옥, 병원, 구빈원, 학교, 군대, 공장 등의 장치를 통해 이 과정이 어느 정도 진척되고 그 메커니즘이 확립되자, 18세기 후반부터는 이와 더불어 ‘인구’즉 전체 노동력의 육성과 관리에 주된 관심을 두는 생명권력biopower이 등장하게 된다. 개체 수준에서 행사 되는 규율 권력과 인구 수준에서 행사되는 생명권력이 교차적·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하면서, 인간의 생명과 삶이 생산에 활용되고 그러한 활용에 순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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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처럼 전체 인구의 생명활동을 약화시키는 이들은 어떤 종류의 인간들일까?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큰 틀에서 볼 때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자본주의적 규율에 순응하지 못한다고 판단된 인간들, 즉 ‘비정상인’ 내지는 ‘일탈자’들이었다. 요컨대 각종 유전병을 비롯한 질병이나 정신·정서·신체상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일차적 대상이 된다. 더불어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비행자들과 자활自活하지 못하는 인간들 또한 언제든지 그러한 집단에 속하게 될 수 있다. 그들은 전체를 살리기 위해 소극적인 방식으로 죽도록 방치되거나 적극적인 방식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잉여 인간들은 죽어야 한다고, 그렇게 남아도는 인간은 “죽게 내버려두는 게 사회 전체의 증대를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서도 근대적 생명권력의 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 운동이나 나치하에서의 장애인 학살 역시 이런 생명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2019, 140~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