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자유와 권리를 생각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세상을 바꾸는 것변혁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바꾸는 것성장으로서의 교양이다. 그런데 미디어로서의 ‘책’과 ‘지식’은 이 두 가지 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 인류는 지식과 정보를 보존하고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상과 창작의 표현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책을 만들었다. 한 권의 책으로 시대가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이 한 시대를 대표하여 규정지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책이 시대의 변혁을 추동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당하기 때문이다. 이때 ‘한 권의 책’으로 상징되는 것은 단순히 ‘책book’이라는 물성物性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적·사회적 조건의 총체적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구조構造’이며 한 시대의 조건을 극복하고 조직하는 현상이란 점에서 ‘문화적 실천’을 의미한다. ‘한 권의 책’은 그 시대의 ‘사회적·구조적 조건’에 의해 출현하고, 또 다른 책지식과 사상이 출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논리와 힘을 가진다.
세종대왕世宗, 1397~1450은 한글을 창제할 만큼 뛰어난 성군이었고 학문에도 두루 능했으나 서양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는 간신히 편지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 침대 옆에 작은 왁스판을 놓고 쓰기 연습을 했지만, 죽을 때까지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실제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까지 서양의 왕들 중엔 쓰기는커녕 글을 읽지도 못하는 왕들이 수두룩했다. 서양에서 왕족이 글을 읽고 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의 일이었다. 동양은 그와 정반대로 거의 모든 왕들이 읽고 쓰기에 익숙했으며 심지어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직접 책을 쓰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동양은 서양에 뒤처지게 되었을까?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신화였다. 그러나 이 서사시는 시간을 견디는 기록성에는 탁월한 면모를 지녔으나 이동과 전파에는 한계를 지닌 점토판clay tablet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이동과 전파에 좀더 수월한 파피루스papyrus에 뒤지고 말았다. 혜초는 723년 광저우를 출발해 장장 4년에 걸쳐 약 2만㎞의 대장정을 기록한 문명탐험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에서 발견될 때까지 거의 1,200여 년간 잠들어 있었다. 그에 비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대략 1299년 무렵 처음 나오게 되었는데, 당시 『성경』 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현재까지도 120여 종 이상의 필사본이 남아 있다. 특히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 책에 무려 366개의 주석을 달아놓을 만큼 열심히 읽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나치 독일은 자국 내에서 유대인과 체제 저항적인 지식인들의 책을 압수하여 불태웠다. 또한 군국주의 일본도 ‘출판법’과 ‘일반검열표준’ 등의 기준으로 출판을 탄압하고 금서禁書를 양산했다. 그에 비해 미국은 지식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국민이 읽어야 할 필독서들을 ‘그레이트 북스Great Books’란 이름으로 선정했고, 이 책들을 미국 내의 여러 대학에 보급하고 비치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책을 불태운 나라인 독일과 사상을 통제한 일본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세종대왕과 샤를마뉴, 점토판과 파피루스, 『왕오천축국전』과 『동방견문록』, 책을 불태운 나치 독일과 일본, 그레이트 북스가 보여주는 결과는 지식과 사상은 단순히 창작이나 기록, 보존이 아닌 전파와 수용에 의해서만 유용한 도구로서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권리야말로 민주주의와 자유 시민을 길러내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 문자의 탄생 이래 ‘책’은 개인의 지성과 감성을 키우는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을 한 사람의 자유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이 ‘성장으로서의 교양buildung’이며 ‘자유로운 시민을 키워내기 위한 교양liberal arts’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양의 습득이란 단지 타인과 어울려 사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와 소통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키워내는 정치적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과거 권위주의사회 혹은 전근대적 규율사회에서 명령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내려왔으나 이제 명령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다. 과거 규율사회가 강압적으로 “일하라, 공부하라!”고 명령했다면 자율사회는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 계발하고 성장하라!”며 부드럽게 회유한다. 많은 문명비판가들은 폭력暴力이나 돈에 의한 권력집중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의 권력은 카리스마적인 지배가 아니라, 정보information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정보란 다양한 형태의 의사소통수단이다. 의사소통의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는 신화, 전설 그리고 종교가 있다. 신화神話와 종교宗敎 속 이야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훈과 계몽’에 그 목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서사를 통해 청취자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은 오랫동안 라틴어, 한자 같은 지식사회의 언어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권한을 누려왔다. 지방어 문학과 대학의 출현, 종교개혁과 인쇄혁명은 이와 같은 지식 독점의 카르텔을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지식혁명이었다. 이를 통해 대중이 출현하게 되었고, 대중사회 또는 시민사회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고 동원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중요해졌다. 책과 출판의 역사는 이처럼 소수에서 다수로, 저자에서 독자로, 창작에서 해석으로 그 중심축이 이동해온 역사였다. 지식정보의 폭발적인 증가는 과학의 발달, 새로운 기술과 매스미디어의 결합, 새롭고 실용적인 지식과 오락에 대한 수요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부와 국가의 성쇠는 이와 같은 매스미디어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이 현대의 권력을 정당화하는가? 물론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며 ‘헤게모니’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이 바로 ‘여론’이며 ‘정보’이다. 오늘날의 대중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하나의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발전할수록 민주주의의 국가권력도 그만큼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보사회에서 이와 같은 동맹관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정보사회에서의 권력은 과거와 같은 거대 국가로부터 개인, 공동체, 지역으로 분산되고 있다. 이는 대중민주주의의 실현이며, 직접민주주의라는 민주정체民主政體의 완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 공동체, 지역에 분산되어 나누어진 권력의 실상, 탈정치화의 면모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들 내에서의 권력, 고립된 지역 또는 소수공동체 내에서의 권력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스스로 통제받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강제와 보이지 않는 통제invisible control를 행사하는 힘이다.
권력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식은 담론의 생산과 유통을 필요로 한다. 과거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하드웨어적으로 수행되었다. 이 시대에는 출판 등록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하고, 인쇄기를 등록하도록 하고, 출판물을 사전검열하거나 사후 납본과 같은 방식으로 통제했다. 그러나 정보산업, 정보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역할을 좀 더 손쉽게 정보 네크워크가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사회에서는 굳이 인쇄출판의 형태가 아니어도 누구나 저자著者가 될 수 있고,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을 전 세계적인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만인과 공유publishing할 수 있다. 독자는 단지 클릭 한 번으로 가볍게 선택만 하면 되는 편리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지식 생산의 중요한 미덕인 계몽과 설득의 기술이 필요 없는 사회, 사유와 성찰이 필요 없는 반지성주의의 강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속도가 빨라지면서 데이터는 지식으로 해석되고 가공되기도 전에 이미 뒤떨어진 것이 된다. 여기에 더해 해석의 권위를 담보해야 할 언론과 지식권력의 권위가 추락해버렸다. 정보해석의 중요도는 커지는 반면 이를 담당해야 할 능력과 권위는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광장의 정치’는 사라지고 ‘SNS의 기호’만 남는다.
이제 정부를 통제하는 것은 과거처럼 권위와 관료적 근성에 투철한 법, 행정 분야의 전문 관료가 아니라, 데이터를 설계하고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하는 정보기술자들이다. 물론 이들 기술 관료technocrat들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여전히 국가권력과 기업권력이다. 이들은 정보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종합편성채널의 허가와 승인, 포털사이트에 대한 세무조사,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 경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보사회는 표면적으로 개방적인 사회인 듯 보이지만, 그 내막은 전체주의적 통제가능성을 열어놓은 사회란 점에서 열린사회open society이다.
전 세계적으로 열려있는 정보네트워크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보사회에서의 권력은 정보의 독점 그리고 무엇이 유용한 지식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분별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이는 단지 한 국가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Standard & Poor’s나 무디스Moody’s, 피치Fitch의 평가에 목매달아 왔다. 이처럼 신용평가기관들이 발휘하는 권력은 ‘지식에 대한 지식knowledge about knowledge,’ 즉 메타지식meta-knowledge의 생산과 유통 및 소비 과정을 통제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권력이다. 이른바 지식산업의 강국이라 불리는 정보 선진국들은 정보 후진국에게 자신들이 만든 기준에 부합하는 지수index를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다. 비판적 지식생산의 주요 기지 역할을 하던 대학은 이제 영국의 일개 사기업Quacquarelli Symonds이 매기는 ‘QS세계 대학 순위QS World University Rankings’에 종속되었고, 과학기술논문은 미국의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이 주관하는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과거 냉전 질서 아래에서는 지역 엘리트를 풀브라이트나 록펠러 같은 재단에서 선발하여 유학 보내던 방식에서 이제는 지역 국가의 지식인들이 거대 정보망에 자발적으로 흡수되거나 종속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약소국가의 지식체계는 글로벌 지식권력의 하부체계로 종속되어 버리는 것이다.
규모의 경제 속에서 정보산업의 독점이 가속화되고 있다.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출발한 디즈니는 오늘날 전통적인 ‘스튜디오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거대 미디어네트워크 그룹으로 성장했다. ‘월트디즈니스튜디오’, ‘픽사’(2006년 인수), ‘마블’(2010년 인수), ‘루카스필름’(2012년 인수), ‘터치스톤’ 같은 영화제작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ABC방송, 케이블 네트워크 ESPN(MBL, NFL 등 주요 경기 중계권 보유), A&E 네트워크(히스토리 채널 등 교양채널), 디즈니 채널 월드와이드(유아/어린이 대상 채널), ABC 패밀리, SOAP넷(일일드라마) 등 스포츠/교양/드라마/유소년 대상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하고 있다. 그 외에 독일/인도 등에 PP로 진출하는 등 해외진출도 활발하다. 그런가 하면 국내의 대표적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는 오래전부터 ‘가두리양식장’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검색어와 검색 순위 조작 등의 의심을 받고 있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DB 내에서의 정보 분류 방식, 정보 분석을 위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등 정보는 모든 단계에서 아주 교묘하게 그리고 종종 눈에 띄지 않게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고, 주요언론사들마저 포털사이트와 구글, 페이스북의 PV페이지뷰에 종속되어가는 상황이다.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만, 그 바다는 영화 『트루먼쇼』의 바다처럼 통제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Free Software Movement을 주도하고 있는 리처드 스톨만은 지난 1997년 ‘읽을 권리’라는 글에서 미래사회에 대한 암담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내보인 바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미래사회의 책은 당연히 전자책e-book인데, 글 속의 주인공인 ‘댄’이라는 인물이 어떤 프로그램을 ‘내려받기’ 했을 때, 그가 읽는 책은 ‘중앙열람허가시스템’에 의해 언제, 어디서, 누가 읽었는지 등록될 뿐만 아니라 만약 그 책을 누군가에게 임의로 대여해준다면 (마치 오늘날 DVD나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를 범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번 대출이나 대여 시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 처벌당할 수 있고, 중앙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컴퓨터나 이북뷰어에 저장되어 있는 ‘전자책’이 아무 때나 정부 기관 또는 기업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난 2009년 7월 아마존은 킨들 유저들이 구입한 『1984년』 『동물농장』을 포함한 조지 오웰의 작품들을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강제삭제하고 지불한 돈을 환불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이념에 의한 분열과 냉전적 통제 양상이 채 극복되기도 전에 들이닥친 정보사회로의 진입은 지금까지 누적되어 왔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더욱 강화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개별화된 욕망의 주체’로 자리 잡게 된 개인은 IMF 외환위기 이후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욕망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여기에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개인은 더욱 파편화되고, 다양화되면서 개인과 개인을 결속하는 윤리 규범은 더 이상 작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을, 계층 공동체의 해체는 물론 가족 해체의 양상으로까지 진행되면서 이제 권력은 더욱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일상의 현실이란 세계 혹은 세계관을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형성된다.
이 말은 우리의 ‘문화적 기억’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주고, 그 기억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을 상실하거나 그로부터 소외된다면 민족이산Diaspora의 이방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으로 상징되는 공동의 기억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인류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의 기억과 감정구조를 습득하게 만드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디아스포라가 혈연적 민족구성원의 이질화를 초래한다면, 각각의 세대가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과 타협으로 구성해내는 문화실천책 읽기은 세대 간의 문화적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낸다.
비록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화에는 뒤처졌지만, 정보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선진국과 거의 비슷한 진척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세계적인 모범 사례를 만들어 낸 바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 당시 우리는 독재 권력이 금지시킨 책을 함께 읽고 연대하였지만, 오늘날 대학에서는 미래의 노동자인 대학생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쫓아낸다. 이와 같이 각자의 욕망을 좀비처럼 추구하는 사회에서 ‘읽기의 권리와 자유’는 단순히 개인적 욕망의 성취를 위한 ‘자기계발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의 ‘읽을 권리’, ‘알 권리’는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보편적 인권’이 아니라 ‘세금도둑질’이 된다.
그렇다면 정보사회의 거대권력에 맞서 읽을 권리와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인 것처럼 ‘정보유토피아’가 말 그대로 정보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보사회가 반드시 대중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비록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을 방불케 하는 통치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사실 그 내막은 과거의 막무가내 방식의 검열보다는 매스미디어와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세련된 정보통제 방식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의 출현은 정보 제공자와 관리자, 정보 수용자 간의 새로운 긴장관계,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낸다.
우선 우리는 정보제공과 관리, 수용자 간의 새로운 권력관계를 분석하고 저항해야 한다. 교육의 인간화와 다양화, 무엇보다 누구나 동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작게는 정부의 구시대적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저항권력의 정보독점과 조작에 대항하는 것이고, 크게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교육체계를 해체하고 나아가 교과서가 아닌 다양한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개인의 고립된 읽기시험 준비를 위한 읽기, 자기계발을 위한 읽기가 아닌 ‘공동체의 독서’, ‘공동체를 위한 독서’ 문화를 부흥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시민운동단체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도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소규모 지식공동체 운동, 자유학교, 상호부조조직과 양서협동조합의 설립, 작업장에서의 자주관리운동, 각종 문화운동 등을 독자적으로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보제공자, 정보가공자, 정보매개자에 대한 정보수용자의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이다. 대학, 매스미디어, 지식인, 언론인 등이 제도권 정치에 대한 체제 순응적 태만에 매몰되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감시하고, 비판하며 후원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국가권력, 기업권력에 의한 정보조작과 통제에 대하여 시민사회의 공론에 호소하고, 이를 조직하여 실천하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규칙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경고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저 말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 ‘의심하고 고민하라.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좁은 하늘을 세상의 전부로 믿으며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