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배신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교육 이념은 토머스 제퍼슨의 마음속에 뚜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스틴 모릴에 와서 그 이념은 좀 약화되거나 흐릿해졌지만, 애초의 국유지 교부 대학 법안 조문에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살아있었다. 교육은 ‘실용 교육’일 뿐 아니라 ‘교양 교육’이라고 하는 법안의 취지에서 제퍼슨의 교육 이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건전하고 번성하는 농업과 농촌생활”을 키워나가고자 하는 소망에서, 농업과 산업의 구분에서, ‘항구적인’ 농업을 뿌리내리게 하고 유지시키려는 목적에서 우리는 제퍼슨의 교육 이념을 찾아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유추해본다면, 농업의 항구성은 ‘농촌 가정과 농촌 생활’의 안정성에 달려있다는 인식 역시 제퍼슨의 교육 이념과 맞닿아 있다. 그 이념은 바로 농부는 교양교육을 통해서든 실용교육을 통해서든 농부로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은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는 인식 위에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여기서 교육 이념의 핵심은 단순히 학습을 통해 농민들을 교정하고 향상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농민들 스스로 신뢰를 주고 의무를 다하는 ‘지역사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토머스 제퍼슨의 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감독하는 태도”의 최고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런 리더십 없이는 지역사회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업을 산업과 구분시켜주고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키워주려면 그런 리더십은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건대, 그런 리더십이 있었더라면, 현재 아미쉬 인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지역사회에서 테크놀로지 사용에 제한을 둘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제퍼슨의 교육 이념을 살펴보니, 국유지 교부 대학들 자체의 퇴행성과 모순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대학들이 농촌 공동체가 망가지는 데 퇴행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학들의 실패는 지적·교육적 기준의 훼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의 실패는 신뢰의 배신이다.
국유지 교부 법안을 보면 대학들은 정부의 기금과 교육/연구 위탁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 법안에는 일반적으로 농업과 농촌생활 보존이라고 할 수 있는 목적이 들어있었다. 법조문을 보면 이 목적이 실제적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감히 말하건대,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목적은, 훨씬 인정을 덜 받는 사항이기는 하지만, 가치와 정서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것이라는 점 또한 명백하다. 농업을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들로만 규정하는 한 (이런 규정은 그 자체로 완전한 허구지만), 순전한 실용성의 관점에서 농업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전한 실용성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교양교육,” “건전하고 번성하는 농업,”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농산업,” “발전과 향상”과 같은 어휘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시골 가정과 시골 생활”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데에도 전적으로 실패한다. 예를 들면, 해치법이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농산업”과 “농촌가정과 농촌생활의 발전과 향상”이라는 목표를 대학들에 부여했을 때, 그 법안은 미국 역사와 사상의 지배적인 주제 중의 하나를 구성하는 농적農的 가치에 충실할 것을 대학들에 요구한 것이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의 비극은 그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결국 입신제일주의를 추구하는 비도덕적인 전문가들의 기준과 실행 방식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농‘학’ 실행자들의 정신 자세에는 경력의 필요성과 실험 논리에 의해 설정된 방향성 이외에는 어떤 목적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분명한 도덕적 충실성이나 태도 또는 제약 같은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가장 큰 권력에 복무하게 된다. 현존하는 가장 큰 권력은 산업경제이며 ‘농기업’은 그 일부다. 농업전문가의 ‘객관적’인 전문기술은 어떤 도덕적 힘이나 나름의 비전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침반 바늘처럼 ‘농기업’의 더 큰 이익을 가리키고 있기 마련이다. 실험실의 객관성은 세상사에 냉담하다. 무책임한 지식은 바로 상품이다. 탐욕은 그 응용의 동력이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농촌 가정과 농촌생활의 발전과 향상을 도모하기는커녕, 사실상 인구 전체의 이향(離鄕) 행렬을 맹목적으로 뒤따랐으며, 대규모 이향에 따른 무질서를 맹목적으로 기록하거나 무질서에 ‘기여’하였고, 이 무질서를 맹목적으로 ‘진보’라거나 ‘기적적 발전’이라고 합리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 시점에서 모릴법의 “교양교육과 실용교육” 조항에 가해진 폭력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제퍼슨은 ‘실용교육’을 포함시키는 것 자체를 반대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되돌이켜 보면, ‘실용교육’ 포함의 위험성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릴법은 분명히 ‘교양교육과 실용교육’을 별도의 두 가지 교육이 아니라 하나의 교육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두 용어가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한, 교양과 실용은 어떻게 조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교양교육’은 가치에 입각해서 ‘실용교육’에 필요한 제동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용’의 관점에서 보면 ‘교양교육’의 도움을 받아 활용과 효과라는 핵심적인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모릴법의 조문은 마치 “교양교육 또는 실용교육”이라고 쓰여있기라도 한 것처럼 칼로 잘린 듯 이등분되어 각각 실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종류의 교육이 이론적으로는 둘로 나뉘어 각각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둘로 나뉘면 바로 적대적인 관계로 맞서게 된다. 이 둘은 서로 경쟁관계에 들어서고 일종의 교육에서의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실용교육은 교양교육을 내몰게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두 종류의 교육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정반대의 입장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교양교육의 기준은 여러 분야에서 탁월함에 대해 내려진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탁월함에 대한 규정은 선례에 기초한다. 우리는 전범典範이 되는 과거의 사상가, 연설자, 작가들을 공부함으로써 생각의 질서를 잡고 조리있게 말하고 글쓰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단테의 『신곡』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공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획득하여 그것을 다른 무엇과 바꾸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의 질서와 종류種類를 이해하고 우리의 정신에 주제와 전범을 공급하기 위해 공부한다. 교양교육의 기준은 본보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반면에 실용교육의 기준은 무엇이 유효하게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기초한다. 교과 과정 상의 정의에 따르면 실용교육이라는 것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현실적으로 유효하냐는 질문은 가장 천박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돈을 벌어주는 것이 실용적인 것이다. 가장 실용적인 것은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실용 교육은 ‘투자’다. 무엇인가를 획득해서 그것을 ‘상품,’ 일자리, 돈, 위신과 같은 다른 무엇인가와 교환하려 하는 것, 그것이 투자이고 교육이다. 교육은 학생들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이며, 그런 만큼 교육은 전적으로 미래지향적이어서 급변하는 세계에서 유효한 것을 선택한다. 현재 적용되고 있는 실용성 기준은 본질적으로 퇴행적 기준이다. 앞으로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 것이니 학생들은 무엇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추정해보는 것 이외에는 퇴행적인 기준을 교정할 방법이 없다. 미래는 당연히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누가 어떤 추정을 하든 다른 누구의 추정보다 신통치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실용성 기준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실용성 기준은 학생들의 필요가 아니라 욕망을 만족시키려 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학생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경력에 어떤 과학지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그것을 가르칠 방법은 없어진다.
교양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은 문화적 생득권을 지닌 잠재적 상속인이라는 점에서, 교양교육은 유산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실용교육은 미래의 지위, 신분, 부 등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양교육은 자연과 인간성이 급변하지 않는다는 가정 위에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교양교육의 토대를 이루는 가정이다. 실용교육 담당자들은 교육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고려 대상으로 인간 사회만을 꼽는다. 따라서 근본적인 변화가 늘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또한 이들에게 미래는 과거와 전적으로 다르고 과거는 낡고 부적절하며 미래에 거추장스런 부담이다. 따라서 현재는 단지 과거와 미래를 갈라놓는 시간이고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분리와 대립에 기초해 교육에 대해 내린 이런 식의 정의들은 너무 단순하다. 어느 한쪽의 관점을 받아들여 다른 한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잘못은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은 양쪽을 갈라놓은 분리에 있다. 이 책의 목적 중의 하나는 실용이 가치의 규율로부터 이탈하면 어떻게 사업자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경향이 생기고, 그에 따라 어떻게 가치를 파괴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는 실용적인 가치와 다른 가치들을 모두 포함한다) 교양교육이 실용교육과 담을 쌓게 되면 교양교육은 가르치는 내용이 어떻게 사용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 의식하지 않게 되므로 교양교육은 결국 약화되고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다. 제임 D. 왓슨의 DNA 구조 발견에 대한 책, 〈이중나선〉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순수’ 과학의 순수성은 지식의 활용, 책임, 영향에 대한 인식 없이 고도로 경쟁적인 지적 게임으로 숭배된다. 그리고 이른바 인문학이라는 것도 ‘그들’만의 세계가 되어, ‘직업적인’ 특수용어, 복잡하고 난해한 해석의 회로, 무기력한 감상의 남발이 곧 인문학이 되었다. 역사적 가치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추지 못한 실용교육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가장 터무니없는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론적으로 추정된 미래상을 제시하고 거기서 유추되는 필요를 기준으로 한 ‘적절성’이 바로 그런 기준이다. 그러나 실용성과 분리된 교양교육은 그에 못지않게 터무니없는 기준을 제시한다. 교양교육의 이러저러한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는 교수들은 자신들이 학습한 과거 유산의 후견인 노릇을 자임하지만, 이들은 정작 그 유산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바가 없는 자들이다.
교양교육은 실용적 교과과정과의 경쟁에 직면해서 자체적인 기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스스로 실용적인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말하자면, 교양교육 역시 경력제일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현재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유일한 이유는 수입을 벌기 위해 문학 또는 철학 교사가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최근 수사학 교재 한 권이 우송됐는데, 내용을 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전문적인 언어학자가 아니라면 언어실행 과정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언어학자는 언어학자가 되길 열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단지 그런 목적으로만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가정이 함축되어 있다.
농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그 못지않게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은 현재의 농학 교육은 위험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농학도들은 실용 지식과 실행 절차에 대해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학습받은 지식과 절차가 적용될 사용처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 사용처는 농학교육의 범위와 관심 밖에 있다. 농과대학은 농부 뿐 아니라 농업전문가와 ‘농기업인’을 양성한다. 농과대학 졸업생 중 농업전문가와 ‘농기업인’의 숫자가 훨씬 많다. 원래 농민에 대한 “교양 및 실용 교육”을 위해 마련하기로 결정되었던 공공기금은 이처럼 도덕적 태만으로 농민들의 경쟁자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보조금으로 둔갑한다.
떠돌이 귀족들
근대 사회에서 발생한 일과 가치의 분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여가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귀족적’ 개념이 어떻게 교육 체제에 제도화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책임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의 대부분의 ‘선진’국에 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하층계급의 공민권 획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는 여가, 상류층 생활관습(예절과는 반대되는 의미의), 패션, 의상 차려입기, 까다로운 다이어트 등과 같은 상류계급의 매우 피상적인 가치들이 대중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휴가’와 넥타이 정장 착용에 대단히 과장된 가치부여를 해왔다. 외양을 새롭게 바꾼 자동차 구입에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한다. 흰 빵에 대한 선호를 만족시키느라 돈과 건강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한때 세습귀족에게 부여되었던 것과 똑같은 가치가 어떤 종류의 직업군과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자에 부여되고 있다.
고도로 계층화되고 유동성이 강해진 사회에서 생산 분야 그 자체가 유용함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계층화와 유동성은 모두 사회적 위신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회적 위신은 다시 사회적으로 숭배되는 패션을 얼마나 따르는가에 달려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의사들은 농부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의사들이 더 필요하고 더 유용하며, 더 능력있고, 더 재능이 있으며 덕성이 더 많은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이들이 항상 학습받은 특수용어를 사용하고 좋은 옷을 입고있으며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육체를 사용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의미의 ‘사무직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산업노동자는 장인이 아니라 감독이나 매니저가 되기를 열망한다. 농부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농부가 되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농부의 아들이 스스로 더 훌륭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려면 그는 아버지보다 직업적으로 더 훌륭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현재 자기가 하는 일에서 더 나아지거나 지역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공적인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개선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특징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인간이 되고, ‘좀더 주목받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자신을 향상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변화란 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양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변화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지리적인 이동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단 하나의 염원은 필연적으로 인구와 가치의 동요를 불러온다. 전형적인 미국인의 ‘성공담’은 시골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풍요로 끝맺는다. 성공 스토리는 또한 육체노동에서 사무직으로 이어지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한 농부의 아들이 농학 교수가 되어 대단히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고 할 경우, 이런 믿음은 그의 사회가 절대적으로 승인해주고 있는 바이기도 하겠지만, 농학교수가 된 농부의 아들이 제공하는 교육의 효과와 영향은 어떤 것일까? 그의 성공은 ‘신분상승’의 동기 때문이지만, 그의 신분상승 동기는 본질적으로 질과 관련된 문제를 회피한 채 단순히 농업 전문가가 농부보다 훌륭하다고 가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 아닌가?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신분상승’은 곧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는 명제에 대한 예증 아닌가? 박사학위를 받고 도시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성공한 그가 어떻게 자신의 최고의 학생들에게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라고 조언할 수 있겠는가? 또는 그 학생들이 그렇게 할 무슨 이유라도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 기반한 우리의 성공 공식은 양적 기준으로 만들어짐에 따라 사실상 질적 기준의 후퇴와 문화의 해체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대학은 문자 그대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정보를 축적하고 있지만 대학의 구조와 자존심은 생산된 정보의 귀향을 제도적으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거주 지역에서 연구하지 않는다. 교수들과 동료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으려면 우리는 출신 지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농업 현황
지금까지 미국 교육의 목표가 변화해온 과정을 추적해왔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확정적이지 않은 사실까지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는 내 경험에 입각해서 가능한 이야기들을 썼다. 물론 내가 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비추어서 확인도 받아야 하고 더 확장된 이야기도 나와야 할 것이며 모순된 부분 역시 지적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농촌 생활이 악화되어가고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통계수치와 전문가들의 입증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증거’보다는 경험을 앞세웠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의 증명에 대해서도 숙고해봐야 한다. 한 저명한 전문가가 현재의 농업 현황을 정당화하는 것을 상세히 점검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미국의 농업”이라는 논문은 과학전문잡지 〈과학 미국〉의 1976년 9월호에 실려 있다. 저자는 O. 헤디 백작으로서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커티스 석좌교수이자 ‘농업과 지역개발 대학 센터’의 장이다. 헤디 교수는 “네브라스카 주의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고 네브라스카 주립대를 졸업하고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7권의 책과 725편 이상의 잡지 게재 논문, 연구 소식지와 모노그라프(역자 주-전문학술서적이나 전문학술논문)”를 저술 또는 공동 저술하였다. 그는 미국 농경제학회 부회장, 캐나다 농경제학회 부회장, 농경제학자들을 위한 동-서 세미나 상임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행장行狀ㅗ.에는 다음과 같은 헤디 교수 자신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나는 개발도상국에서 경제계획 담당자들의 자문에 응하고 경제와 농업 개발 정책을 평가하며 개발의 일반 업무를 분석해주는 등 많은 작업을 한다.”1)
헤디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된다. “지난 200년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농업개발 프로그램을 발전시켜왔다.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잘 모방해가고 있다.” 객관성을 표방하는 과학자가 과학 논문 서두에서부터 절대적인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더욱 놀라운 일이 있다. 예를 들면, 1907년 그와 마찬가지로 농학 교수였고 미 농무성의 토양 관리국장을 역임했던 F. H. 킹이 중국, 한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들의 오래된 농업 관행을 연구해보고 이 나라들을 본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헤디 교수는 잊었는가? 아니 알고는 있었을까?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헤디 교수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누구를 설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과학 미국〉의 독자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잡지의 독자들은 대부분 적어도 증거를 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헤디 교수의 논문 어디에도 미국 농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월하다는 입증할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나마 제공되는 증거는 오히려 미국의 농업개발 프로그램의 논리와 성공을 의심하게 만든다.
헤디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미국 농업 개발 초기에, 토지는 풍요로웠고 노동력은 값쌌다. 농장 기계, 비료, 농가가 소비하는 음식과 같은 데 투입되는 자본은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농장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되었다. 농부들은 식구들과 농장에 키우는 동물들의 물리적 작업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동력을 만들어냈다. 농부들은 또한 사람과 동물들이 먹고 키우는 작물의 형태로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서 농사일을 수행했다. 농부들은 윤작을 시행하고 동물 배설물을 이용해서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시키려 했다. 윤작을 통해 해충 또한 어느 정도는 통제되었다.”
헤디 교수의 저 말은 그렇게 비판적 진술이 아니라 그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미국 상당수 지역에서 있었던 농사법에 대한 묘사다. 저런 식의 농사법의 최대 약점은 의심할 바 없이 토양이 불모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약점들도 있었다. F.H. 킹을 동양으로 보내게 한 것도 당시의 미국인들이 이런 약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동양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이곳에 접목시킬 수 있었다면 오늘의 농부들은 토지 사용에 있어 좀 더 부드럽고 자애로워 좀 더 생산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디 교수의 진술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헤디 교수가 묘사한 내용은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농법, 즉 절약적이고 독립적이며 다양한 농장 기반 농법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그 가능성과 손 타지 않은 대륙이야말로 출발선에 있었던 우리의 자산이었다.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헤디 교수는 우리가 그 자산에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진술한다.
19세기 미국의 영토가 서부의 해안까지 확장하여 국유지 교부가 모두 마무리된 후, 정부의 농업 정책은 확장에서 생산성으로 초점을 바꿨다. “연구를 진작시켜 농부들에게 새로운 기술지식을 농부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국유지 교부 대학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토지에 대한 효율적인 대체물”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부터 1970년에 이르는 기간 중 훨씬 줄어든 농토에서 생산은 약 2배로 증가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사용이 빨라지면서 테크놀로지는 “토지 뿐 아니라 노동력을 대체하였다. 그 결과, 1950년과 1955년 사이에 백만 이상의 인력이 농업 부문에서 다른 경제 부문으로 이동하였다.”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끝난 후 농업정책 입안자들이 생산성을 선택한 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기라도 한 듯 현명한 일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이라고 헤디 교수는 말하고 있다. 또한 교수는 생산성을 충분한 기준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논문 어디에도 복원과 유지라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5년간 백만 명의 인력이 자기 일터에서 쫓겨난 것이 테크놀로지의 효율성의 증거로 언급될 뿐이다. ‘이주’의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쫓겨난 인력들은 경제의 어느 부문으로 옮겨갔을까? “이들은 정말로 이주하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부적절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헤디 교수는 1950년부터 1970년까지의 기간에 초점을 맞춘다. “농장들은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 중 한쪽을 선택하면서 규모가 커졌고 더 전문화되었다.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들은 비료, 제초제, 농기계 그리고 기타 주요 물품들의 사용을 크게 늘려갔다…비료 사용은 276퍼센트 증가했고…동력 기계의 사용은 30퍼센트만 증가했지만 1972년의 농가 수는 1950년보다 사실상 적었다. 결과적으로 그 기간 중 농장 노동력은 54 퍼센트 감소했지만 노동 생산성은 4배 늘었고 농장 총생산량은 55퍼센트 증가했다.”
다시 말하지만, 대단히 문제적인 변화들이 오로지 기술진보의 증거로 언급되는데, 헤디 교수는 독자들이 명백히 그런 변화를 그저 좋은 것으로만 여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동력 부족과 느린 속도를 구실로 얼마든지 더 나은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노동’의 대규모 해고가 다루어지고 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 농민들은 “기록적”인 생산량을 달성했고 그에 따라 “기록적”인 소득을 올렸다. 알다시피, 기록 달성은 챔피언이 이루는 것이며 의문의 여지 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헤디 교수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소득의 가파른 상승 곡선으로 농민들은 자본자산 획득에 유리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어떤 농부들은 소득향상으로 생긴 기회를 모기지mortgage 만기 전에 모기지를 상환하는 데에 이용했지만, 대다수는 늘어난 소득을 새 농장 장비 구입, 생활 시설 확충, 토지 구매를 통한 농장 확장에 투입하였다. 결과적으로, 농가의 부동산적 가치가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
이것은 헤디 교수의 논문에서 농토의 가치가 최근에 “기록적인 수준”으로 증가되었다며 두 번째 언급한 내용이다. 마치 부동산 가치 증가가 엄청난 농업적 성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부동산 가치의 증가는 전적으로 농민들 사이의 땅을 사들이려는 경쟁의 결과 때문인가? 인플레이션, 도시개발, 투기가 부동산 가치 증가와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이런 가격 상승에는 위험이 있는가? 인플레이션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문 후반부에 간단히 언급되지만, 위의 질문 셋 중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한 바도 없을 뿐더러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답하지만 셋째 질문 속의 위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헤디 교수는 그 외의 다른 문제들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한다. “높아진 생산성과 기계화와 아울러 농사의 성격 자체가 변해서 농촌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농사 인구의 감소와 함께 농촌 지역에서의 상품과 기업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떨어졌다. 그러므로 전형적인 농촌 공동체에서의 고용과 소득 기회는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농촌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남아있는 인구 중 학교, 의료시설, 기타 다른 기관의 서비스에 참여할 사람은 더욱 줄었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그와 같은 서비스는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후퇴했고 비용은 증가했다.”
“농촌 마을의 비농사 인구는 큰 자본 손실을 입었다.”
헤디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업의 빠른 발전은…환경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 커지고 더 전문화된 농장들은 “토양의 특정한 양분을 고갈시켜 더 많은 양의 비료를 쓰게 하고 있다.” 비료 사용의 증가는 제초제 사용 증가를 동반하며 경작의 강도와 빈도수를 높이게 한다. “그러므로 침적토와 화학비료 물질의 유입으로 인한 개천과 호수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헤디 교수는 말한다. “반면에 미국 농업의 발전은 전체 농산업, 즉 ‘농기업’의 성장을 불러왔다. (농사는 전체 농산업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농촌 가정, 농촌 생활, 농토의 건강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위의 저 “반면에”라는 말에 얼마나 오만함이 들어있는지 알 것이다. 저 말은 가공할 등식의 균형점이다. 헤디 교수는 농촌 삶의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기술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훼손은 ‘농기업’의 성장에 의해 정당화되고 보상된다고 말했다. 소수의 부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가치의 희생이 이처럼 정당화되는 것을 보노라면, 미국의 독립 선언문이 언제 쓰인 적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헤디 교수에 따르면, 현대 농산업은 “3개의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 “투입물 가공 산업,” “농장 자체,” “식품 가공 산업”이 그것이다. 세 요소 중 첫째와 셋째 요소에 대한 헤디 교수의 정의를 거의 그대로 인용해볼 텐데, 독자들에게 헤디 교수가 앞서 우리의 “농업 발전” 초기 농업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염두에 두길 당부 드린다.
“현재 투입물 가공 산업은 한때 농장에서 생산되던 많은 것들을 공급한다. 오늘날 트랙터가 소나 말을 대체했고, 화석연료가 동물 사료를, 화학 비료가 축분畜糞과 질소 고정 작물을 대신한다. 그와 같은 발전은 농업 노동력의 더 많은 부분을 농장 자체에서 투입물 가공 부문으로 옮겨오게 했을 뿐 아니라 농사에 들어가는 자본 비용을 증가시켰다…자금비용의 비율이 커짐에 따라 농사에서 나오는 이윤이 과거보다 시장에서의 가격 등락에 취약해졌다.
“근년 들어 식품 가공 부문은 농산업 전체 중 농업 자체보다 더 큰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1975년 소매가격으로 소비자가 음식에 1달러 지출할 때 42센트가 농부의 몫이고 58센트가 식품 가공업자에게 갔다. 심지어는 전형적인 상업 농가도 현재 농장에서 재배하는 생산물을 소비하기보다는 인스턴트 냉동 포장 식품을 구입한다.”
독립의 이념적 가치라든가 실용적 가치에 대해서는 그만 잊는 것이 좋겠다. 농부가 자신이 재배한 식품에 작은 이윤을 붙여서 ‘농기업’에 판매하고 많은 이윤이 덧붙여진 후 ‘농기업’으로부터 인스턴트 식품을 되사들인다면, 바로 그 순간이 현금 유출입의 꼬리가 입속으로 쏙 들어가는 순간이다. 이 보잘 것 없는 경이로움이 달성되었다고 어떤 농경제학자들의 입에서는 존경해마지 않는 경탄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헤디 교수는 높은 토지 가격의 위험성에 대해서 제기되는 질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답할 뿐이다. “농업의 성격이 변해서 토지소유가 많아 이미 자리를 잡은 농부들의 재정적 지위가 향상되었다…이제 새로 시작하는 농부들에게는 상황이 그만큼 유리하지는 않다…그러므로 우리는 규모가 큰 상업 농장이 더 많이 생기고 작은 농장은 줄어드는 경향이 커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헤디 교수의 “그러므로”라는 말은 거의 “반면에”라는 말만큼이나 무책임하다. 소농의 폐허 위에서 대농의 번성이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은 불평등, 남용, 오해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디 교수는 “그러므로”라는 단순한 말로 이런 조건을 미래에 강요하고 있다.
헤디 교수의 관찰은 분명히 긴급한 사회적, 정치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도로, 농업이나 경제적 관점에서 봐도 정말로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누구도(헤디 교수를 포함해서)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세계의 많은 민중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의 고통을 당할 것으로 현재 예상되고 있다면, 그래서 생산성이 주요 쟁점이라면, 우리가 과연 농장의 대형화 추세를 감당할 여유가 있을까? 이 질문은,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대로, 대형 농장은 소규모 농장만큼 풍부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하지 못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과학 미국〉의 같은 호에 기고한 스털링 보르트만은 “기계화된 농업은 일 인당 – 일 년 단위 생산량으로 보면 매우 생산적이지만, 토지 단위 당 생산성에서 노동집약적 농업 시스템만큼 생산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가축의 노동이 기계를 효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족농/소농으로 돌아가자는 주창이 왜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인가?
둘째, 농지의 규모가 계속 커지는데 그에 비례해서 농가 인구는 줄어든다면, 농가인구는 재생산을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 아닌가? 헤디 교수의 말에 따르면, 농업 종사 인구가 나라 전체 인구의 4.4 퍼센트가 된 것은 미국 농업의 큰 업적 중 하나다. 한 분야의 인구가, 특히 급전직하로 감소하는 인구라면, 어느 수준까지 떨어지면 완전 소멸의 위협에 처하는 것일까? 헤디 교수와 달리 나는 농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농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농사와 토지 관리 지식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며, 이런 지식을 갖고 있는 농부를 확보하는 가장 분명하고 경제적인 방법은 농부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 농토와 유리된 상태에서 값이 매겨지고 있는 많은 젊은 농부들의 지식과 관심사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상태다.
헤디 교수에 따르면, 미국 농업은 여전히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수백만 에이커의 휴경지, 목초지, 삼림, 방목장, 습지를 개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로서는 땅이 농업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는 농부가 앞으로 많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추호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다. “미국 농업의 미래는 생산능력 이외에 많은 다른 요인들에 달려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⑴ 최근의 해외 여건이 앞으로도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⑵ 미래의 공급 통제 프로그램이나 비료, 제초제, 토양 침식에 대한 환경적 제약을 통해서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 정책을 실시할 것인가 아닌가?”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 농업은 ⑴ 기아가 국제적인 위협으로 남아 있는 한, ⑵ ‘농기업’이 제약을 받지 않고 오염과 토양 침식은 기업농의 불가피한 부산물인 만큼 “토지 소유가 많아 이미 자리를 잡은” 농부들이 계속 자유롭게 오염과 토양침식을 일으킬 수 있도록 허용되는 한 앞으로도 번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논리적”인 발전 프로그램에 따라, 농장과 가족에 기반한 독립 농업을 버리고 여러 종류의 산업적 ‘투입물’에 절망적으로 의존하며 여러 종류의 재앙에 단단히 기반한 농업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표토와 인간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무한히 소모시키고 공동체 파괴와 토양과 하천 오염이라는 비용을 들여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식량 생산의 목적은 배고픔을 이용해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헤디 교수가 ‘많은 일’을 수행하는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들은 명백히 농업 자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 그런데 자문단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 경우 이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기아에 허덕일 가능성이 크다.2)
경험과 실험
여러 해 동안 농업 전문가들의 진술을 주의 깊게 읽어본 결과, 헤디 교수가 이례적인 경우라는 위안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교수의 위신을 앞세워 농업에 저질러진 일종의 만행을 호도하고 정당화하는 가짜 지성인 학계의 귀족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농업 파괴 행위는 어떤 사상 체계를 갖고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도 각종 통계수치, 도표, 그래프로 분장하여 일반인들의 의심을 침묵시키고 우중을 속이고 있다.
헤디 교수는 이른바 “논리적” 프로그램을 변호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그의 변호에는 논리가 없다. 그의 변론 방식은 논리 없는 연역법으로서, 논리의 전제를 입증하려 통계수치를 마구 들이밀다 논리 자체가 혼돈에 빠지는, 일종의 잘못된 학술적 형식주의를 표방한다. 그의 전제는 그가 제시한 ‘증거’에 의해 반증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심각하게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지만, 헤디 교수는 흔들림이 없다.
헤디 교수와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권력이 많지 않았다면 주목을 훨씬 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들은 미래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는 산업 정복자들 집단에 속해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형편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속해있는 대부분의 집단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헤디 교수는 전문 기술자다. 그는 전공영역의 성채 안에서 상당한 수준의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치의 관점에서 자신이 창출한 질서와 의미를 정당화하려고 할 때, 그리고 그 질서와 의미는 ‘좋은 것’이며 그 질서와 의미가 기반하고 있는 가정 역시 ‘좋은 것’이라고 설파하려 할 때, 무질서와 무의미가 창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공 기술자가 자신의 질서와 의미를 정당화하려 할 때 그는 정당화 작업 자체를 허용해주는 더 넓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산을 통해 테크놀로지가 “토지 뿐 아니라 노동력에 대한 대체물”로서 효율적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대체행위의 인간적인, 생태적인 맥락을 무시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실업, 지역사회와 가족 붕괴, 범죄, 문화파괴vandalism, 오염, 토양 침식, 이 모든 것들은 테크놀로지의 압도적 ‘투입’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런 현상의 비용을 돈으로 추산해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농경제학자들이 주변을 넓게 보거나 앞을 멀리 내다볼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른 어떤 농업 전문가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농업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결론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논의의 전제다. 농업 전문가들은 이런 전제 아래 광신도의 맹목적 결단력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논의에 임한다. 농업 전문가들은 높은 ‘지위’ 덕에 몸을 쓸 필요를 면한 분들이지만 그 지위 때문에 머리를 사용해야 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은 무서울 것까지는 없겠지만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농업 전문가들이 그토록 열렬히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라는 존재의 삶은 어색할 정도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고 삶의 가치는 높아졌으며 거추장스러울 정도의 권리와 의미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태어날 사람들은 우리의 후손들뿐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지금으로써는 아무것도 생산한 것이 없다. 이들은 전문가가 인정해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어떤 권리나 자격도 없다. 미래는 이미 전문가들과 그들의 고객, 기업 경영자들, 대기업가들의 권리에 맞춰서 조사되어 명찰을 달아놓았다. 미래는 그들의 신세계이며 그들은 스스로 임명된 지배계급이다.
대학의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개발된 농업 전문가들의 지식은 정복된 땅에 강요된 전형적인 외래 질서다. 우리는 이런 지식으로 토착경제를 건설할 수 없으며 토착문화는 더더욱 만들어낼 수 없다. 대학의 지식으로 우리는 조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이런 지식은 문화적 깊이 또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의 지식은 가장 직접적으로 실용적인 (즉, 경제적이고 가끔은 정치적인) 결과들에만 관심을 갖는다. 가령, 대학의 지식은 실험과 경험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른다. 경험은 문화의 토대로서 언제나 전체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경험은 이미 일어난 일의 의미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경험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 못지않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도 흥미를 갖는다. 경험에 입각한 희망이나 욕망은 기억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험을 통해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경험 속 실패에 대한 기억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그러므로 경험은 ‘객관적’ 음성이 아니라,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음성이다. 그에 비해, 실험적 지식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일어나지 않는 일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경험에다 실험의 은유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깊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실험적 지식은 언제나 혁신을 생각한다. 여기서 혁신이란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거나 사용되었던 것을 대체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기계 테크놀로지는 인간이나 동물의 노동에 대한 대체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오래된 방식’은 그때부터 업신여겨지도록 강요받기 마련이다. 유전학에서 그러하듯 테크놀로지의 세계에서 실험적 지식은 가능성의 숫자를 줄여 극단적으로 지나친 단순화를 지향한다. 경험과 문화의 음성은 “달걀을 모두 한 바구니에 넣지 말라”고 조언하는 반면, 실험적 지식인들은 꼭 제국주의자들과 종교적 광신도들처럼 이상하게 작동하여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실험적 지식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부정적 기억들이나 의문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현대 대학의 칸막이 구조를 자신의 둘레에 쌓아올린다. 이런 구조 속에서 원인과 효과는 서로 마주칠 필요가 없다. 어떤 전제 군주가 미로의 한가운데 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쁜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그 곳에 도달하기 전에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전제 군주는 그를 죽일 필요와 수고를 덜게 된다. 실험적 지식은 그 전제 군주와 같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런 종류의 지식 그 자체가 전제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실험 지식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문화적 가치와 그 가치에 함축되어 있는 절제에 대한 고려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냥 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각과 행동은 문화적 해체와 절망 속에 뿌리를 두는 것이고, 다시 문화적 해체와 절망은 정치적 전체주의의 토대가 된다. 인식을 하고 있든 아니든, 농업 전문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절대적인 국가 권력의 출현에 대한 암묵적인 기다림이 있다. 절대적인 국가 권력이 도래하면 실험을 통해 이끌어내는 기술적으로 순수한 해결책을 힘으로 강제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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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디 교수는 1949년 아이오와 대학에 부임한 이래 1983년 퇴임까지 300명 이상의 대학원 제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절반이 개발도상국 등 해외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농경제학 교재로 쓰인 그의 〈농업 생산과 자원 활용의 경제학(1952) 〉Economics of Agricultural Production and Resource Use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농업경제학의 고전으로서, 흔히 ‘농업경제학의 바이블’로 불린다.
2)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헤디 교수가 ‘많은 일’을 수행하는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들은 명백히 농업 자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 그런데 자문단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 경우 이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기아에 허덕일 가능성이 크다.
★ 이승렬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