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 시인, 그림책 작가
1960년 부산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와 그림책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있다. 그림책 전문 어린이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와 이상희의 그림책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이며,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 이사장, KBBY 부회장으로서 그림책이 만드는 평화롭고 순정한 세계를 꿈꾸며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잘 가라 내 청춘』 『벼락무늬』, 어른을 위한 동화 『깡통』, 그림책 『이야기 귀신』 『한 나무가』 『선생님, 바보 의사 선생님』 『난 노란 옷이 좋아』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등을 썼고, 『그림책 쓰기』를 펴냈습니다. 옮긴 책으로 『이 작은 책을 펼쳐 봐』 『네가 만약』 『까만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무들의 밤』 등이 있다.
그림책 한 권을 고르라는 주문에 명쾌하게 답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 어려움이 ‘백 권을 고르는 일이 훨씬 쉬울 만큼’이라는 게 정말이지 엄살이 아니다. 하긴 ‘이건 그림책이고, 저건 그림책이 아니다. (그림책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분류하고 외면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림책다운 그림책, 그림책의 고전 성을 완성도 있게 담아낸 작품에만 집착하던 그 즈음의 취향은 명료했으나 과격했다. 무엇보다 연륜이 짧은 국내 창작 그림책을 모성이 폭발하듯 업고 안고 챙기게 된 것은 아마도 K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운영위며 북스타트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부터인 듯하다. 올해 1월의 그림책으로 손꼽았던 『힐링 썰매』(조은 글, 김세현 그림, 문학과지성사)는 열여섯 장면으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그림책의 두 배가 넘는 양인데도 내 그림책 서가를 차지했고, 좀처럼 손이 가지 않던 만화 기법의 그림책 『알』(이기훈 지음)이며 『감기 걸린 물고기』(박정섭 지음)도 망설임 없이 펼치곤 한다.
『청양장』은 올해에 만난 여러 그림책 가운데서도 즐겁고 그리운 마음으로 여러 번 펼쳐 들었던 시 그림책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공광규 시인이 어머니 손을 잡고 다녔던 시골 장날을 풍성하게 추억했고, 한병호 화가는 청양장의 지역적 특성을 담아내기보다는 관광화되기 이전 우리나라 시골 지역 곳곳에서 닷새마다 섰던 오일장 풍경을 사람살이의 한 국면으로 해석하고 그려냈다.
그림책에 맞게 다듬느라 처음 지면에 발표했던 작품과는 좀 다르다는 시가 아주 감칠맛이 난다. ‘언어로 그린 그림’인 시를 먼저 읽은 다음 그림책을 보는 것은 별미, 시 전문을 읽어보자.
토끼 팔러 온 할머니 입이 오종종 토끼 입이다
소 팔러 온 할아버지 눈이 왕방울 눈깔이다
고양이 팔러 온 할머니 얼굴이 고양이상이다
족제비 가죽 팔러 온 할아버지 턱이 뾰족하다
닭 팔러 온 할머니 종아리가 닭살이다
뱀 팔러 온 할아버지 눈이 뱀눈이다
강아지 팔러 온 할머니 눈이 강아지 눈망울이다
염소 팔러 온 할아버지 수염이 염소수염이다
양 팔러 온 할머니 젖이 무릎까지 늘어졌다
돼지 팔러 온 할아버지 코가 돼지코다
밴댕이젓 팔러 온 할머니 성질이 밴댕이 소갈머리다
새우젓 팔러 온 할아버지 허리가 새우처럼 굽었다
메기 팔러 온 할머니 입이 메기입이다
원숭이 데리고 온 약장수가 원숭이를 닮았다
약장수 주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모두 길짐승과 날짐승과 물고기를 닮았다
─ 공광규 시 『청양장』 전문
이제 그림책 한 장면 한 장면을 곰곰 들여다볼 차례이다. 이 시는 사람 얼굴에서 닮은꼴 동물 이미지 떠올리기를 자주 즐기는 내게 자작시인 듯 공감되었는데, 화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즐겁게 붓을 놀린 듯하다. 한지 위에 동양화 물감을 쓴 채색화 기법으로 장터의 인물 하나하나에 마음껏 몰입해 연출했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그렇다 해도 토끼 입같이 오종종한 입의 할머니와 토끼를, 왕방울 소 눈 같은 할아버지와 소를, 고양이 같은 얼굴의 할머니와 고양이를, 족제비같이 뾰족한 턱의 할아버지와 족제비를, 닭살 종아리 할머니와 닭을… 길짐승 날짐승과 물고기 각각의 동물과 사람을 나란히 이처럼 개연성 있게 그려내기는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양장』을 펼쳐 들고서, 시골 장에 가본 아이들은 신기방기 놀라웠던 경험을 복기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경험한 적 없는 아이들도 장날의 풍경을 흥미롭게 상상할 것이다. 시골 출신 어른들, 나처럼 방학과 가정 대소사 때 시골 외가 친가 나들이를 했던 어른들은 순정하게 빛났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볼 것이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장에 가면 서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 물건 사고팔기보다 안부 인사 주고받기에 바쁘던 모습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난다. 장터에서만이랴. 오가는 길 어디에서나 누군가와 마주치면 아무개네 집 어른이니 인사하라고, 네가 아무개의 딸이냐고 놀라워하며 군것질감을 집어주고 머리를 쓰다듬던 꺼칠하고 뭉툭하던 손이 그립게 떠오른다.
그렇게 『청양장』은 거대 문명도시 중심의 세속자본주의 사회 독자들이 대형 마트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마을 중심 자급자족 공동체 삶의 흥겨움과 온기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매뉴얼로 학습한 인사 대신 저마다 특유의 목소리와 말버릇으로 안부를 묻고 답하던 이웃들, 그들이 키우고 먹이는 가축들이며 심고 가꾸는 작물들이 오늘 우리 삶의 믿음직한 모범이자 대안으로 다가온다. 이 그림책의 장면 하나하나가 글로벌 경제에 잠식당하지 않는 인간 문화 중심의 지역 생태 환경 복원에의 염원 또는 소박하고 건강한 일상 축제를 회복하고자 기원하는 현대 민화로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