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개인의 세계관, 정치인으로서의 정치사상은 ‘생존공간’과 ‘유대인 문제’로 집약된다. 정치사상Political Ideas은 문자 그대로 아이디어일 뿐이므로 체계적으로 전개되어야만 ─ 물론 나름대로의 체계화를 시도하기는 한다 ─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히틀러의 정치사상은 마키아벨리나 루소 등의 정치사상과 달리 아이디어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또는 홉스나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과 같은 후계자들을 얻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오히려 그의 연설, 나치 독일의 정책들을 근거로 후대의 사람들이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이 히틀러의 정치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를 확보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닐 그레고어Neil Gregor는 “싸구려 팸플릿”이나 다름없는 『나의 투쟁Mein Kampf』과 『제2권Zweites Buch』을 독해하여 그의 사상을 추려낸다. 그가 독해의 지표로 삼은 것은 엔서R.C.K. Ensor가 1939년 영국 국립 국제관계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에서 행한 연설 중의 한마디다.: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논리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을 다시 진술해보면 아무리 엉망인 텍스트라 해도 ‘나름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텍스트 독해자의 의무이자 즐거움이겠으나, 나름대로 논리적인 모든 텍스트가 즐거움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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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은 1923년 히틀러가 ‘맥줏집 반란’의 실패로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갇혀있던 기간에 구상되어 그가 서기에게 불러준 것이 1925년, 1926년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나의 투쟁』과 관련된 이 두 가지 사실, 즉 그 책의 집필 과정과 구상 및 출간 시점은 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맥줏집 반란은 실패한 거사였지만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의 지적처럼 “히틀러 자신과 그의 당 역사에도… 하나의 전환점”이었으며, “현대 국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전망 없는 일이며 권력장악은 헌법의 토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히틀러 평전』) 그런데 히틀러는 이것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커쇼Ian Kershaw는 히틀러가 이때부터 “자신만이 독일의 위대한 지도자라 믿게” 되었으며, 동시에 “일부 당원들도 그를 나폴레옹과 비교하고, 독일의 무솔리니로 묘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치당의 “히틀러 숭배의식”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이는 차츰 “히틀러의 공적인 이미지에 대한 능동적인 조작”과 “독일인들의 수용성”, 즉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초인’ 이미지를 받아들일 조건을 갖추고 있던 사회적-정치적 구조, 가치체계, 그리고 ‘심성구조’”가 결합된 히틀러 신화로 구축되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나의 투쟁』은 “극우파 사이에서 히틀러가 가장 역동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과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극단주의자들의 영역에서 지도권을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뒷받침하도록 의도된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나의 투쟁』 두 번째 권이 출간된 1926년에 나치당은 ‘Heil Hitler’를 도입한다. 이로써 공적인 차원에서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뚜렷해졌다.
『나의 투쟁』에는 ‘생존공간’과 ‘유대인 문제’라는 그의 세계관이 지도자의 정책노선에 실려 구체적으로 펼쳐질 준비를 마친 상태로 담겨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나의 투쟁』은 구술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이다. 이는 그 텍스트, 그리고 텍스트의 저자가 가진 기본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레고어에 따르면 “히틀러는 무엇이든 문서로 만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글보다는 연설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연설은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며 카리스마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 있는 것을 선호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산문조차도 그 자신이 쓰지 않고 구술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말을 하면서 생각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차분한 숙고와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다듬은 다음 말이나 글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말을 먼저 내뱉고 생각이 그것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텍스트는 ‘글’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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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히틀러 신화’ 구축을 위해 의도된, 구술을 바탕으로 집필된 『나의 투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닐 그레고어는 “히틀러의 글이 분명히 구역질과 졸림 사이를 오가는 것이지만, 그런데도 여러 다른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하면서 몇 가지 방식을 제안하거니와, 그의 이러한 제안은 이렇게 버려지기 쉬운 텍스트에 접근하여 나름의 논리를 추려내는 데 있어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먼저 그는 “히틀러가 저술에서 계속 사용하는,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비슷한 말과 반대말 쌍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음미하고 알아”낼 것을 권한다. 히틀러의 텍스트에서 민주주의, 언론, 마르크스주의자 등은 모두 유대인에 사용되는 술어이다. 달리 말해서 히틀러가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난하는 구절을 만나면 그것을 곧이곧대로 읽어서는 안 되고 유대인을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범죄자, 배신자, 매국노 등은 부패, 허위, 물질주의, 이기주의, 비겁함과 동일시되고 이 역시 유대인의 품성으로 표명된다. 이에 대립되는 집단은 독일인이다. “도이치 사람은… 온갖 미덕과 결합된다. 곧 정직함, 이상주의, 사심 없음, 용감함, 자기희생 등이다.” 이렇게 히틀러는 유대인과 독일인을 대비시키고 각각에게 특정한 술어들을 할당한다.
이는 히틀러에게서만 발견되는 수사적 특징이 아니다.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규준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 두고 그러한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주 좁은 범위의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라는 범주를 사용하면서 구체적인 적을 설정하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가하는 핍박을 강조한다(이를테면 어떤 지도자가 ‘언론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말할 때 ‘언론’은 반드시 특정 신문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자 집단 일반을 투영시킨 상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이러한 확고한 대비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글에서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제시하는 것을 의도적 전략으로 추구”하며 이것은 『나의 투쟁』에서 반명제로 시작하는 서술법으로 구체화되었다.(피터 램버트, “’제3 제국’에서의 영웅숭배와 악마화”) 어쨌든 이를 우리는 ‘파시스트적 수사학의 이분법’이라 부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레고어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히틀러에게서만 발견되는 현상, 즉 군사적 은유가 정치적 개념을 둘러싸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에 덧붙여 생물학적 은유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은유들은 은유에 그치지 않고 결국 ‘전격전’과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로 구체화되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그레고어는 히틀러에 있어서 “무엇이 현실이었고 무엇이 은유였는지 구분”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는 일종의 가상현실과 고정된 선입견을 확고하게 세워둔 채 말을 떠들어대며, 그것을 현실로 뿜어낸다. 닫혀진 정신에게 권력과 기술문명이 쥐어졌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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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어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나의 투쟁』에서 ‘생존공간’과 ‘유대인 문제’는 물론 히틀러의 역사의식, 히틀러에게 흘러들어온 정치사상, 히틀러의 학습 방법 등을 읽어내기도 한다.
히틀러는 생존공간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인구와 땅 넓이의 관계에 관한 법칙은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 현실에서 한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란, 점차 늘어나는 인구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으로서 꼭 필요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편안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거의 모든 영역으로 퍼져나간 ‘과학의 정신’을 보여주는” ‘법칙’이라는 말에 주목할 수 있다. 히틀러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싸움”은 과학적인 역사법칙의 차원에서 거론되는 것이다. ‘싸움’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세계에 깊이 스며든 다윈의 사고방식”이 그에게까지 미쳤음을 드러낸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며, 그에 따라 “전쟁은 공간을 얻으려는 영원한 투쟁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간주된다. 나치 독일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많은 이들은 과거의 전쟁에서 이끌어낸 일반적인 개전 이유가 여기에 적용되지 않음에 의아해하곤 한다. 그것은 바로 나치의 ‘생존공간 확보” 정책에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것이 일종의 역사적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치 독일의 동유럽 지배는 유럽 제국의 식민지 지배방식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독일인들이 이주했고 현지인을 활용한 통치가 아닌 현지인 절멸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나치독일이 식민지배가 아닌 생존공간 확보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동유럽 지배를 시도했기 때문에 생겨난 사태였다.
‘생존공간’과 함께 히틀러의 세계관의 또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유대인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악마 만들기의 일환이겠지만 19세기와 20세기의 인종주의적 사고가 천박하게 수용된 결과이기도 하다. 히틀러에 따르면 “유대인은… 언제나 오로지 다른 민족들의 몸에 붙어사는 기생충이다.” “질병”이고 “결핵”이다. 유대인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이처럼 생물학적 은유가 사용되는 것은 그 해결책으로 생물학적 처치가 동원될 것임을 암시한다. 유대인이라는 오물로 오염된 독일인이 “그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깨끗이 소독해야 한다.” 이때 국가는 “민족의 생물학적 재생의 담당자”로서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소독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더 나아가 “국제 유대인 공동체라는 구더기들이 번성”하는 정세에 맞서 “국제주의, 민주주의, 평화주의의 정치적 영향력도 없애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계층들 간의 분열을 극복”한 “평등하고도 유기적인 독일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이러한 상태는 인류 보편의 의미에서 설정된 이상적 국가가 아니라 종족주의 국가이다. 그런 까닭에 이 과정에서 국가는 개인의 “번식행동”을 철저하게 감독해야만 하며, “종족을 모든 생활의 중심에 두고 순수하게 유지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국가가 천 년의 미래를 위한 안내자로 나서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이해나 이해의 결핍이나, 혹은 찬성이나 반대나 관계없이 이것을 행해야 한다.”
히틀러가 구상한 종족국가는 반유대주의라는 소극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 건설을 위한 필수적 조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구상은 『나의 투쟁』 첫머리에서 천명된다.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은 역사의 뒤틀림 때문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독일-오스트리아는 합쳐져서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한 혈통은 한 제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적 종족적 요구는 군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다. “칼이 우리의 쟁기가 될 것이고, 전쟁의 눈물에서 미래 세대의 빵이 자라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섭리에 의해 예정된 지도자”가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지도자는 바로 히틀러 자신이다. “운명이 인Inn 강변의 브라우나우Braunau를 나의 탄생지로 선택한 것이 내게는 이제 섭리로 여겨진다. 이 작은 도시는 두 도이치 국가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재통일된 독일과 영웅적 미래라는 전망”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구도를 가진 것이었다. 그것의 근본 원천은 “잘못 규정된 신화적인 과거 황금시대”이다. 히틀러는 먼저 과거의 위대한 시대를 거론한다(여기서 역사적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다음 최근의 쇠퇴한 부르주아 시대를 비난한다(부르주아 시대를 비난하는 것에 광분한 유사 좌파들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적 열망을 미래로 투사한다. ‘과거의 황금시대’, ‘쇠퇴한 최근 시대’, ‘영웅적 미래’라는 세 가지 축 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히틀러의 독창적인 창안이라기보다는 “100년 이상 계속된 종족주의, 민족주의, 군사주의의 정통 저술의 틀”에서 무분별하게 빌려온 용어들로 버무려진 혼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담겨있는 정치사상은 19세기와 20세기의 여러 사상의 흐름을 광범위하게 반영하지만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집약하여 승화한 것이라기보다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과학적, 역사적, 철학적 전통의 핵심 요소들이 천박하게 대중화하는 한 예”일 뿐이다.
그레고어에 따르면 우리는 “히틀러의 글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여러 작가, 정치가, 철학자의 사상의 메아리를 힘들지 않게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아리들은 언제나 공허하고 절반만 이해된 것”이다. 이는 히틀러의 독서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팸플릿이나 신문, 강연, 대화 등에서 간접적으로 지식”을 얻었으며, 책을 읽는다 해도 “지식인의 열린 마음으로… 읽지 않고, 자기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읽었다.” 그는 이렇게 대강 어설프게 읽은 것을 가슴 속에서 버무려 말로 뱉어냈으며, 그것을 받아쓰게 하여 『나의 투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읽기는 엉망진창인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덜 떨어진 사유의 소유자가 사로잡히게 되는 정치적 영감과 열정의 형성과정 및 그것의 현실적 폐해를 절감케 하는 작업일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레고어의 ‘히틀러 읽는 법’은 히틀러에 국한되지 않는 포괄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