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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중의 한 명인 죙케 나이첼은 “글래스고 대학교 초빙 강사로 있던 2001년 가을”에 “독일 잠수함 승조원들을 도청한 기록”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800쪽쯤 되는 문서였고, “모두 1943년 9월의 대화”였다. 그는 다른 기록들도 읽었다. “공군 및 육군 병사들의 대화”였다. “영국인들은 전쟁 내내 수천 명의 독일 포로와 수백 명의 이탈리아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도청했고, 특별히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들은 녹음하고 그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 기록들은 전쟁 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1996년에 공개되었다”.
공저자 중의 한 명인 하랄트 벨처는 죙케 나이첼이 읽은 자료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자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자료들 속에서 군인들은 전쟁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실시간으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료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아니 어쩌면 군대 자체의 심성사Mentalitätsgeschichte에 대해 아주 독특하고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음을 예감하였다.
공저자들은 “우리의 전문 분야(사회심리학과 역사학)를 조합해야만, 이 독특한 심성사적 자료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군인들의 행동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정립된 새로운 시각 아래에 기존의 사실들을 재정리·재배치함으로 이 전쟁과 살육에 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태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켰다.
나치의 유대인 및 소수민족 학살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간편한 것은 히틀러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히틀러의 자살로 이건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남은 것은 히틀러의 잘못을 끊임없이 들추어내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히틀러와 그의 핵심 조력자들1로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전범재판’이 끝났으니 이것도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들이다. 나치 친위대 병사건 국방군 병사건 그들이 “모든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이들의 정체성과 가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들은 나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2에 완전히 사로잡힌, “‘섬멸전Vernichtigungskrieg’을 수행하며 인종주의적 범죄와 학살을 무차별 자행하도록 교육받은 ‘이념적인 전사Weltanschauungskrieger'”였는가, 또는 “1990년대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그려낸 ‘자발적 사형집행인'”이었는가. 우리가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나치의 학살은 히틀러의 단일 의지와 그것의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히틀러의 핵심 조력자들도 불균질한 집단이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 학살을 입안하고 실행한 집행자들을 움직인 동인 또한 여러 가지라는 것, 참전한 독일 군인들의 학살 동기 역시 적극도 떠밀림도 아닌 또다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 이처럼 학살은 각각의 차원에서 교묘하게 맞물린 상황들이 총체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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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논의의 초점은 학살3에 가담한 독일 병사들이 어떠한 상황4에서 그러한 짓을 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지만, 이들이 나치 체제 전체에서 어떤 차원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부과된 (또는 그들이 밀려들어 간) 사태가 어떠한지를 짐작하기 위해 귀도 크놉의 책을 참조하여 체제의 구성원을 몇 개의 차원으로 나누어보자.
나치 체제의 핵심은 물론 히틀러이다. 그는 지도자로서 인종주의적 세계관과 그에 기반한 확고한 실천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적인 면모에 관한 가십거리들은 여기서 핵심적 설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횡설수설이라 간주되곤 하는 그의 ‘저작’ 『나의 투쟁』도 면밀한 독해를 통하면 일관성 있는 주장을 담고 있음이 밝혀진다.5 히틀러의 조력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괴벨스, 괴링, 히믈러 등이 첫째 부류라면, 집행자들이라 할 아이히만, 쉬라흐, 되니츠 등은 둘째 부류이다. 귀도 크놉은 히틀러 및 그와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히틀러 없는 ‘제3제국’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악한 감정의 근원이었던 그가 없었다면 제3제국은 허깨비처럼 사라져 갔을 것이다. 제3제국의 흉악한 성질은 바로 그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독재자도 그를 위해 헌신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을 것이다. 충복이었던 그들은 히틀러의 하수인들이었으며, 또한 그의 권력을 보장해주는 자들이었다. 또한 기꺼이 히틀러에게 헌신한 집행자들이었다. 그들은 군주가 명령한 바를 수행했으며, 때로는 그 이상을 해냈다”. 우리는 이들을 파악할 때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제기해보아야 한다: 히틀러를 만나기 전에 이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히틀러를 만남으로써 이들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은 ‘히틀러’라는 것에서 무엇을 얻었고, 스스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들이 히틀러를 만난 다음에는 어떤 자가 되었는가.
요제프 괴벨스6는 “가난했던 과거”를 가졌다. 이 ‘가난’에 대한 보상을 발견한 듯,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의지하듯, 그는 자신의 우상이 보여주는 호의와 총애에 매달렸다”. 괴벨스는 충복 중의 충복이었다. “그는 가장 광적으로 유대인을 증오한 사람이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삐뚤어진 인종이론의 발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결과였다.” 괴벨스의 자기혐오는 히틀러를 만나 폭력적 발산의 기회를 얻었다.
헤르만 괴링을 움직인 것은 다른 종류의 야망이었다. “그를 자극한 원동력은 괴벨스에게서 볼 수 있는 헌신적인 추종심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탐욕이었다”. 히틀러의 조력자들이 모두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증거는 괴링에게서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루돌프 헤스는 “지도자의 인도를 받고 싶어”한 연약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히틀러를 알기 전부터 이미…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괴벨스의 반유대주의가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된, 어찌 보면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면 헤스의 반유대주의는 다르다. 우리는 나치 상층부의 반유대주의에도 여러 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결코 뛰어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나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기계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수행해 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사상과 신념이 들어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주목을 받을만한 것은 그가 “세무 공무원들이 수많은 소득세 신고를 처리하듯…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카를 되니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히틀러의 후계자”였으면서도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의 당원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확신에 찬 국가사회주의자였다… 되니츠는 히틀러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구원자’의 화신으로 여겼다”.
보어만에게는 “권력만이 주된 관심사”였으며, “‘국가사회주의’는 단순한 개념에 불과했다”. 쉬라흐는 “부지런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허세도 부리고 아양도 떨었다”. 프라이슬러는 “부정한 일을 탁월하게 처리하는 데 있어 대가였다”.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은 “이미 패전한 것이나 다름없던 1944년 여름까지도… 여전히 학살대상자들을 열차에 실어 나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학살 주모자였다”. 멩겔레7는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없었다. “히틀러는 이 사람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맞을 것이다”. 그는 일그러진 체제의 틈에서 자신의 야망을 추구했다.
체제 상층부가 이러했다면 독일인 일반은 어떠했는가. 독일인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동기에서 촉발된 삶을 살아갔는가. 그렇지 않다. “2,200만 명의 독일인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된 유대인 말살 행위에 관해 알고 있었거나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수백만의 독일인들이 방관하고 무시했다. 수백만의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죽임의 집행자가 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였는가. “그들을 자극한 것은 살인적인 반유대주의만은 아니었으며, 대개 반유대주의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악마적인 정권이 그들 내면의 가장 더럽고 비열한 충동심을 풀어낼 —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독일인 일반에게 ‘기회’가 제공되었다. 독일인들은 죽임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에 들어선 것이다. 정상상태에서 공권력은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규정한다. 그런데 나치의 공권력은 정상상태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도 괜찮은 짓’으로 만들었다. 그런 짓을 해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그러한 상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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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불편부당하지 않다. 당연한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접하는 사태를 “아무 선입견 없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어떤 필터를 매개로 인식”한다. “모든 문화, 역사적 시대, 경제 체제, 즉 한마디로 존재하는 모든 요소는 인간이 자신이 겪은 체험과 사건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틀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인간은 구체적인 행위에 나선다. 이 행위의 과정에는 또 다른 요소가 개입한다. 행동은 “추상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그들이 놓인 구체적 장소, 목적,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통찰은 나치 병사들의 죽임 행위를 분석하는 필수적 전제이다. 그들이 놓인 장소는 전장이었으며, 그들의 목적은 죽임이었으며, 그들의 역할은 확실한 죽임 행위자였으며, 그들은 전투 집단에 속해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집약하는 프레임이 ‘전투’이다. 이 프레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나 인간의 잔인한 본능 등과 같은 것으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민간인의 일상을 살아간다. 이 일상에서 “자명한 생활세계Lebenswelt의 역할들은 인식과 해석과 행동 선택지들을 규정”하면서 우리의 사회적 형세Konstellation를 규정한다. 또한 민간인의 일상에서는 여러 역할에 따른 선택 가능성과 행동 대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전투 현장에 들어선 군인들에게는 사회적 형세가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 그들이 속하게 되는 ‘전우 집단’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적 장소”가 된다. 여기에는 역할의 선택 가능성과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명한 생활세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들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술어는 “전쟁노동자Arbeiter des Krieges”이다.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의 이 유명한 표현에서도 “산업사회 해석 틀이 전쟁에서 일어나는 일을 체험하고 처리하는 데 효과적이었음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어떤 사람의 인격적 특성이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평소에 착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가 언제 어디서나, 즉 어떤 상황에서나 착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에 있다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일단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천으로 옮기면, 그다음에는 모든 일이 경로의존성Pfadabhängigkeit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행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개인적 편차는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하찮은 의미만 가질 뿐이다”.
나치의 병사들은 본래 독일 국민이다. 이들은 근대 이후 독일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만들어진 독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1차 프레임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좀 더 구체적인 프레임”, “그 경계를 그릴 수 있는 사회문화적 공간”인 2차 프레임이다. 이것은 나치 체제가 만든 것이다. 나치가 만든 프레임의 핵심 내용은 “유대인 문제Judenfrage와 더불어 차츰 뿌리내린 생각”으로 이는 독일에서만 통용된 것이다. 즉 “인종이론이 정치강령의 기초가 되고 사회사상이 되어서 가차 없는 반유대 정책이 이루어지고 마치 진리인 양 신봉된 것은 독일뿐이었다”8. 반유대주의가 독일 국민의 의식에 각인된 결정적인 현실적 계기는 1933년 1월 30일의 이른바 히틀러의 ‘권력장악Machtergerifung’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독일 국민들의 국가사회주의화가 진행되었으며, 유대인 배제와 절멸을 목표로 하는 독일 사회의 ‘탈유대화Entjudung’가 개인 생활의 영역에 스며들어 “도덕적 기준을 재편성”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겠지만 나치 체제의 독일 국민들은 반유대주의를 도덕적 기준으로 내재화했고 이것은 사회의 관습적 규범으로 통용되었으며, 체제의 공권력도 이에 걸맞게 집행되었다. 독일인들이 본래 반유대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라 나치 체제의 독일 국민들이 반유대주의자로서 사회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반유대주의가 내면의 도덕적 기준이자 사회의 관습적 규범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나치 체제 독일 국민의 인륜Sittlichkeit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 인륜은 독일 국민에게 일종의 삶의 목적을 제시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새롭게 출발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느낌”을 가졌거니와, 바로 이러한 “정서적 측면(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과는 다른 상황, 지금보다 나은 상황을 꿈꾸는 측면)이야말로 왜 체제에 대한 믿음과 총통에 대한 신앙이 나치 체제의 성립 이후 지속적으로 커져 갔는지를 설명한다”. 반유대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좌도 우도 헤게모니를 잡지 못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진공상태9에서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을 강하게 흡입하였던 것이다.
2차 프레임에서 주조鑄造된 독일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3차 프레임으로 들어가게 된다. 전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군사적인 것은 그 시대와 민족에게 전형적인 긍정적 함축을 지니게 되었다. 국가 기관과 군대의 수뇌부는 독일인의 프레임 안에 순수군사적 가치를 닻 내리게 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이를 통해 민족 전체가 정신적으로도 전쟁에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단결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운명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나치가 중시한 인간형인 ‘정치적인 군인’이 되었으며,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였다.
나치의 병사들이 나치적 전쟁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해서 그들이 곧바로 전투에서 거침없이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일종의 적응과정이 요구되었다. 전투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별다른 반성작용 없이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데에 전투의 목적이 있다. 능숙하게 폭력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폭력 사용이 매력적인 경험이라는 사실, 예컨대 ‘짜릿한 일'”임을 뚜렷하게 몸에 새겨 넣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나치의 병사들이 “극단적 폭력에 적응하는 사회화는 종종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바탕은 “살인이 허락되는, 심지어 권장되는 사회적 프레임”이며, 어쩌면 “어떤 무기 하나, 비행기, 아드레날린, 평소에는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 정도면 족할지도 모른다”. 공군 조종사 마이어Meyer 소위와 정찰 장교 폴Pohl 소위가 1940년 4월 30일에 포로수용소에서 나눈 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폴 소위는 “자신이 폭력에 익숙해지고 직접 휘두르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겨우 사흘이 걸렸음을 전한다”. 이 사흘이 지나 폭력에 익숙해지면 폭력은 자체의 목적을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 폭력은 미학화된다. 폭격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공중으로부터의 살인에는 이를 미적 체험으로 인식하고 감지하도록 만드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바로 가시성이고 둘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에 재미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그것은 총격과 재미가 하나로 합쳐지는 세계다”.10
재미라는 말에서 우리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장은 “전쟁 행위와 무관한 민간인 살상과 강간, 전쟁 포로 살해, 국제법에 위반되는 민간 목표물 폭격, 주민에 대한 계획적 테러” 등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공간이다. 죽임에 재미 들린 이들이 생겨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더욱이 국가사회주의적 인종주의가 도덕적 기준으로 내면에 자리 잡은 나치의 병사들은 “전투 행위와 무관한 집단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살해”를 마음껏 실현할 것을 권장 받고 있었다. 상위의 이념과 권력이 하위의 행위를 철저하게 정당화해줄 경우, 이러한 일이 가능해진다. 나치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정위定位, Orientierung를 이미 상부에 맡겨 버렸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작 처리 방식의 기술적 합리성이다. 그 짓이 나쁜 짓인지는 따지지 않고, 그 짓을 얼마나 깔끔하게 하는지, 상부의 칭찬을 듣고 더 나아가 공식적인 포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중대한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다. 포로 에르빈 외스팅Erwin Jösting은 1945년 4월에 이런 발언을 하였다: “유대인을 몰아내야 한다는 데에는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방식이 완전히 잘못된 거라고요”. 유대인 섬멸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과업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을 부적절하게 처리하는 것은 안 된다. 해야만 하는 일인데 잘 해야만 하는 것이다.
폭력의 미학화, 거기에 덧붙여진 재미, 합리적 처리의 추구가 전투에 가담한 병사들을 사로잡은 프로토콜이라면 이들은 전쟁이라는 전체 사태에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상황에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거치면서 전쟁은 독일의 패전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1944년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일의 패배를 믿게 되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군대라는 조직의 구성원 각자는 각자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 임무는 전황 전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 임무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직접 체험을 해야 비로소 패배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인들에게는 “총통 신앙”이 있었다. 이것은 하급 병사건 고위 장교건 마찬가지였다. “총통 신앙은 계급과 직위를 망라하여 철두철미한 확신에 가까웠다”. 포로였던 마이네Meyne 대령은 1934년 6월에 이렇게 말하였다.: “총통은 천재니까, 분명 뭔가 탈출구를 찾을 거야”. 이들은 “복종과 의무수행”이라는 군사적 가치 체계 안에서 패배의 전망을 가지면서도 총통 신앙을 버리지 못한 채 마지막을 향해 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 전쟁 프레임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 있어 “군사적 가치체계와 사회적 주변 환경이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문화적 결속, 즉 “군사적 가치 규범에의 결속, 이와 결부된 공식적 의무와 주관적으로 느끼는 의무에의 결속,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하는 포상에의 결속”이 이런 특징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에 비하면 “이데올로기, 출신, 교육 정도, 연령, 계급, 병과 등은… 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전체 상황이 악화되어도 자기 역할과 임무를 규정하는 프레임은 변하지 않는다. 패전에 이를 때까지도 “집단, 기술, 공간, 시간이야말로 군인들이 기준으로 삼고 중시하는 변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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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병사들은 ‘본래’ 독일 민간인들이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반유대주의적 인종주의로 가득 찬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침윤浸潤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전투 상황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죽임은 이미 정당화된 상태였고, 새로운 소속 집단에 합당한 가치를 주입받았다. 그들은 전장의 병사로서의 정체성에 따라 행위하였다. 그들의 행위를 설명하는 요인은 전투에서 인정받으려는 욕구, 죽임에 부수적인 쾌락, 절차의 기술적 정교함, 그리고 자기합리화 등이다. 그들은 당면한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사태 전체를 조망하는 반성적 사유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귀도 크놉은 말한다: “어느 누구나 히틀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범죄 국가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어느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인간이 늑대가 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 이들은 다른 시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다면 평범한 사람처럼 아주 정상적인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1 히틀러의 심복henchman으로는 괴벨스Josef Goebbels, 괴링Hermann Göring, 히믈러Heinrich Himmler, 헤쓰Rudolph Heß, 슈페어Albert Speer, 되니츠Karl Dönitz 등이 거론된다. 귀도 크놉Guido Knopp의 Hitler’s Henchmen(2000)은 이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Hitlers Helfer: Täter und Vollstrecker(1998)를 두 권으로 옮긴 『히틀러의 뜻대로』와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가 있다. 후자의 책에서는 집행인들인 아이히만Eichmann, 쉬라흐Schirach, 보어만Bormann, 리벤트로프Ribbentrop, 프라이슬러Freisler, 멩겔레Mengele를 다룬다.
2 토니 주트는 나치를 여타의 파시즘과 구별해주는 것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라 본다. “다른 파시즘들은 민족주의적 원한이나 지리적 불평등이라는 인정할 수 있는 틀 내에서 움직였는데, 이는 납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과거에나 지금이나 어느 정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치 시절 독일 지식인들이 나치나 나치 동조자로서 말했던 것은 대부분 오직 독일의 경우에만 적용된다. 실로 나치즘은… 독일인들을 독특하게 만든 것에 관한 일련의 주장들에 기생했다. 루마니아나 이탈리아, 에스파냐의 많은 파시스트 지식인들은 그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신들이 보편적인 진리와 보편적인 범주들을 신봉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보편적 성격이란 스스로를 국제적인 대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특유의 계몽주의적 신념이다… 공산주의자 지식인은, 그리고 어느 정도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파시스트 지식인도, 그러한 대화의 상속자였다. 그렇지만 나치에 대해서는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다.”(『20세기를 생각한다』, 145~146면)
3 이 학살을 저자들은 “죽임과 죽음Töten und Sterben”으로 표현한다.
4 이 상황은 바로 ‘전투Kampf’이다. 전투라는 상황 속에서 병사들은 전투에 합당한 규약Protokoll을 체득하게 된다. 원제가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 Soldate: Protokolle vom Kämpfen, Töten und Sterben(병사: 전투의 규약, 죽임과 죽음)
5 이는 닐 그레고어가 『하우 투 리드 히틀러』에서 시도하였다.
6 괴벨스의 삶 전반에 대해서는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가 쓴 평전을 참조할 수 있다.
7 “멩겔레는 인간 수집가였다. 폰 페어슈어처럼 그도 쌍둥이 연구로 교수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화물 전용 플랫폼에 내린, 죽음을 목전에 둔 무리들 가운데서 찾아낸 쌍둥이 아이들을 ‘나의 기니피그’라고 불렀다. 종종 그는 쌍둥이를 차에 태우고 수용소 길을 따라 달리기도 했고, 그들에게 단 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멩겔레는 아이들의 몸에서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해부용 탁자 위에 눕혔다… 그를 아우슈비츠로 보냈던 오트마 폰 페어슈어 교수는 단 한 번도 그 일로 인해 책임을 추궁받지 않았다. 그는 1952년에 독일인류학회의 회장 직을 맡았다.”(귀도 크놉,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26면) “현재 독일에 있는 많은 연구소들이 그렇듯이 막스플랑크협회도 전쟁 전에 운영되던 전신이 있었다. 그것은 카이저빌헬름협회Kaiser Wilhelm Society였고 1911년에 창설되었다. 카이저빌헬름협회는 독일이 과학적으로 앞서가던 시절에 활약했던 오토 한Otto Hahn,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막스 플랑크Max Planck,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위한 연구소들을 세우고 지원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치가 뛰어난 과학자들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다수를 축출하면서 그러한 시대가 느닷없이 끝났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 기관이었던 카이저빌헬름협회는 독일의 전쟁 기계로 편입되어 무기 연구와 같은 일을 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카이저빌헬름협회는 산하단체였던 인류학, 인간 유전, 우생학 연구소를 통해 인종과학과 거기서 비롯된 범죄들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베를린에 근거지를 둔 그 연구소에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같은 사람들이 과학의 조력자로 활동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대상자들 가운데 다수가 어린이들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멩겔레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형을 선고받았지만(하지만 그는 남미로 도망갔다) 그에게 지시를 내렸던 인류학 연구소의 상관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대학 교수가 되었다. 막스플랑크협회가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뒤를 이어 1946년에 창설되었을 때 인류학은 당연히 피해야 할 주제였다. 실제로 나치 치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독일에서는 인류학 분야 전체가 지위를 잃었다. 인류학 분야는 연구 기금과 훌륭한 학생 그리고 혁신적인 연구자를 유치할 수 없었다.”(스반테 페보,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138~139면)
8 그런 점에서 토니 주트는 나치즘이 여타의 파시즘과 뚜렷하게 다르다고 결연히 말하는 것이다.
9 이 진공Vakuum상태를 제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Anmerkungen zu Hitler(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군주정의 소멸과 불능이 남겨 놓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채울 수 없었던 진공 상태가 여기에 드러났거니와,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1918년 11월 혁명가들에게도 그 반대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널리 알려진 구호처럼, 여전히 ‘공화주의자 없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10 이러한 사례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다. 2010년 4월 공개된 이 동영상은 2007년 7월 12일, 미합중국 아파치 헬기 2대가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의 소도시에서 민간인 차림의 사람들에게 무차별 기총소사를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기총소사도 놀랍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들의 교신내용이다.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기쁨을 나눈다. 이들은 나치의 조종사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