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에서 ‘열정’은 passion의 번역어인데, 이 서평에서는 통용되는 표현인 ‘정념’으로 표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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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도덕적으로 기껏해야 관용되는데 불과했던 이윤의 추구를 프랭클린은 어째서 직업(소명)으로 생각했는가”를 묻는다. 이 물음은 탐욕으로 간주되던 금전추구행위(상업commerce)가 어떻게 하여 존경받는 행위가 되었는가로 확장할 수 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상업 그리고 소유에 근거한 권리 주장이 근대에 들어 어떤 내용의 도덕적 사회적 정당화를 어떤 방식으로 획득하였는지, 달리 말해서 근대인들은 어떻게 해서 ‘마음껏 원해버려!’라는 아담 스미스식의 발언을 기탄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베버의 물음에 함축되어 있듯이 중세적 사회에서 이윤의 추구는 기피되는 행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전욕, 권력욕, 색욕을 3대 죄악으로 간주했고, 최소한 인정한 것은 명예욕과 결합한 권력욕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악덕의 본질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고, 악덕에 의한 악덕의 견제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그러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최소한으로 인정된 명예욕은 중세 기사도의 바탕이 되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명예 추구가 붕괴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홉스는 모든 영웅적 미덕을 자기 보호의 변형으로 보았고… 세르반테스는 영웅적 열정을 정신착란이 아니면 우둔한 짓”으로 격하시키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명예추구의 붕괴가 곧바로 부르주아적 금전 추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나 “소유의 충동과 이에 관련된… 행위가… 광범위하게 고무 찬양”되는 “변화의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근대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대이고 이러한 파악이 모든 탐구 영역에서 바탕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적인 국가이론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였으나 이에 대한 언급은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이다. 그의 『군주론』은 고전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악덕들을 덕의 목록으로 나열한다. 홉스는 갈릴레이의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 본성을 파악하려 했으며, 그에따라 『리바이어던』은 국가에 관한 논의 이전에 10개 장을 인간에 관한 논의에 할당한다. 스피노자, 비코, 루소 등도 이러한 논의에 가담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도덕철학과 종교적 교훈만으로는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파괴적 정념에 대처하는 방안들은 여러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강제와 억압에 호소하는 것인데 근대에서는 칼빈이 이와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두번째로는 “분열적인 정념을 건설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는 생각”, 즉 정념을 이용하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는 비코에서 선구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학문』 132절과 1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률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인간 사회에 유용하도록 고찰하는 것이다… 지상의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이들 3악〔흉포, 탐욕, 야심〕으로 사회적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가 사리私利에만 몰두해 있다면 야수 못지않은 고립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정념으로부터, 인간적 사회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질서를 창출하는 신성한 입법정신이야말로 신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입법정신의 구체적인 내용과 작동방식은 불분명하지만 비코는 ‘법률’이라는 말로써 일종의 제도를 제안하고 있으며, 이로써 그가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의미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정념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근대인들도 있다. 낭만주의자로 분류되는 헤르더는 “인간의 모든 정념은 이해하기 힘든 야만적 충동이지만 이를 따르면 보다 나은 질서를 조성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낭만주의의 합리화를 기도했던 헤겔은 『역사철학강의』 서문에서 정념의 표상으로서의 이성의 간지奸智가 역사를 이끌어가는 계기임을 논증한다(이 개념이 이성적 법이념과 사회과학적 법률론의 통일을 시도하는 «법철학»에는 등장하지 않음에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들 모두 근대의 정념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우리는 “정념과 악덕을 이해관계라는 부드러운 용어로 대체”한 아담 스미스와 “쾌락의 욕구를 이익의 욕구에 의해 억제하는 것을 옹호”했던 데이비드 흄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때 등장한 이해관계는 쿤의 의미 그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었고, 이것이 이후에 전개되는 자본주의 옹호론의 핵심적인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흄과 스미스를 동시에 거론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전자는 인식론적 회의론의 주창자이며, 후자는 고전파 경제학의 정초자라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과는 달리 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된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이렇게 혼합된 영역에서 뭔가를 시도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국부론』 3편 4장의 제목은 “도시의 상업은 농촌의 개량에 어떻게 공헌했는가”이다. 이 제목은 분명 상업이 농촌의 개량에 공헌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4장의 한 구절은 이러하다: “상업과 제조업은 〔이전에는 인근 주민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상태와 영주들에 대한 노예적인 종속상태에서 살았던〕 시골 주민들 사이에 질서와 훌륭한 정치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점차로 도입한다. 이 점은 지금까지 거의 관찰되지 않은 바지만 상업과 제조업의 효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흄은 그것을 주목한 유일한 저자이다.” 이 문장들을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보자. 상업과 제조업이 발전하기 이전의 주민들은 끊임없는 전쟁상태와 영주들에 대한 노예적인 종속상태에서 살았다. 흔히 하는 말로 ‘봉건적 잔재’ 속에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상업과 제조업이라는 경제적인 요인이 개입된다. 그런데 그 결과는 경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질서와 훌륭한 정치,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라는 정치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와 정치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스미스가 인정하는 흄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가.
포칵J. G. A. Pocock은 『The Machiavellian Moment』에서 흄과 스미스의 시대에 선행한 17세기의 상황을 간략하게 거론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에는 정치경제학이 급속하게 형성되며 그에따라 정치와 경제는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토지, 교역, 신용은 공공의 부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과 미덕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흄에 있어서 공화국은 인간에게 장기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게 하고 사적인 이익을 일반의 이익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하며 이성과 미덕의 건축물을 정념의 토대 위에 세우는데 요구되는 도구이자 매카니즘이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상업과 지식이다. “상업과 지식이 없다면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단순한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부르주아가 중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흄은 “이성과 정념, 권위와 자유 사이의 이원성과 창조적 긴장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특권과 관습의 형태로 자유를 물려받은 부동산 소유자들과 확대된 지식과 확장하는 능력의 형태로 자유를 확증하는 동산 소유자들 사이의 유사한 이원성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포칵은 부동산 소유자들과 동산 소유자들의 대립을 거론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근대적 “사유재산의 관계”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틀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산은 세계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부르주아 사회의 질곡을 풀었으며, 세계들을 결합시켰고, 박애주의적 상업, 순수한 도덕, 호의적인 교양을 만들어냈다.” 마르크스가 언급하는 동산의 효과 역시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흄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정념에 의존하고 정념은 경험에 의존한다. 그리고 상업은 인간의 경험, 지식, 가치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흄의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가 1725년에 『Political Discourse』라는 제목으로 묶어낸 12개의 에세이중 중심이 되는 것은 “상업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가의 위대함과 그 신민의 행복은… 일반적으로 상업과의 관련에서 분리될 수가 없다. 사적인 인간이 교역과 부의 소유에 있어 공공의 힘으로부터 더 많은 안전을 얻게 될수록 공공〔영역〕은 사적인 인간의 풍요로움과 확장된 상업에 비례하여 더 강력해진다. 이러한 공리는 일반적으로 참인 것이다.” 이렇게 흄은 “상업과 정념을, 정치사회의 구축과 능동적이고 활력있는 역사에 기여하는 역동적 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업예찬은 흄이나 스미스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그에따라 이해관계라는 관점이 등장한 것도 그들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이해관계’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개인적 복리의 물질적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단어는 오히려 인간의 전반적 정념을 의미하였으며 특히 이러한 정념을 추구함에 있어 숙고와 진지한 계산의 용어를 지칭하였다.” 이해관계는 정념을 대체하는 과정에 들어선다. 그리하여 “이해관계가 인간 행위의 지배적 동기라는 생각은 가능한 사회질서를 위한 현실적 기초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지적인 흥분은 야기시켰다.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에서와 같은〕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 국가 모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예측성이다.” 이해관계를 잘 따지는 것은 이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로크의 『통치론』이 옹호하는 부르주아적 합리성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지도적인 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누르고 좋은 면을 활성화시킨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찬양하였고, 아울러 이렇게 되면 인간 본성의 파괴적이고 불길한 요소를 억누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이러한 태도를 집약한 명제가 바로 ‘온화한 상업doux-commerce’론이다. 이 입장의 선구적인 사상가로는 몽테스키외를 거론할 수 있다. 그는 『법의 정신』에서 “상업주의 정신에는 근검절약, 경제성, 온화함, 평정, 지혜, 질서 및 규칙성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이 지배적이면 상업에 의해 창출된 부는 어떠한 부정적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 몽테스키외의 언급에서 우리는 서두에서 제기된 베버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윤 추구는 온화한 것이다. 어쩌면 금전욕은 권력욕을 억누를 수도 있다. 하나의 정념이 다른 정념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제원리는 정치적인 영역에까지 적용되어 권력분립론을 위한 토대로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전조를 가지고 있는 스미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유로운 사적 이익 추구를 옹호하면서 이해관계와 정념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익추구에 의해 정치적 위험이나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점 대신에 이것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였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는 “여타의 모든 정념을 재산증식욕구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로써 “이전의 많은 사상가들이 규명하려고 노력했던, 이해관계가 정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색이 끝나게 되었다. 스미스 이후의 학문적, 정책적 논쟁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할 때 물질적 복리가 향상된다는 스미스의 이론에 대해서만 집중되었다.” 분명 스미스의 이론은 상업이 가져올 여러가지 효과들에 관한 선행하는 논의들과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일반화의 수준을 높였고, 지적 전문화를 성취했으며, 상업과 산업의 발달로 예상되었던 정치적 효과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설득력을 상실하였다는 역사적 여건에 힘입어 강력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7, 18세기에 상업과 산업에 대한 옹호가 이처럼 강력해진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허쉬먼은 당시 사람들이 “빈번해진 전쟁과 내란 때문에, 종교적 가르침을 대신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엄격히 규율할 새로운 행위 규범을 찾고 있었고, 상업과 산업의 발전이 바로 이런 규범으로 작용하리라고 기대”했다고 본다. 이는 “돈벌이 자체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익한 부수효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기대 속에서 “사회적 파멸을 피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자본주의 확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책은 “인간의 충동과 어떤 성향들을 억누르고 좀 더 단순하고 예측가능한 ‘일차원적’ 인간성을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이는 본래의 의도가 충실하게 실현된 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기대의 잔재를 20세기의 저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케인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위험한 기질은 돈벌이와 개인적인 재산축적의 기회에 의해 비교적 무해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런 기질이 이런 식으로라도 만족될 수 없다면, 잔인함, 권력추구나 자기 과시욕으로 분출될 것이다. 동료 시민을 학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은행계좌를 멋대로 하는 것이 낫다. 돈이 인간 학대의 수단이 된다고 때때로 비난받지만 적어도 대체물이 될 수 있다.” 물론 스미스도 “상업이 허약한 사치와 부패를 가져온다는 고전적인 공화주의적 관점”을 취하기도 했고 그와 동시대인인 스코틀랜드의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도 『An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에서 영국의 상업발전으로 형성된 이른바 ‘세련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잦아들었고 오늘날의 우리는 이러한 낙관론과는 정반대의 현실을 만나고 있다. 금전욕이 권력욕을 내리 누르기는커녕 금전을 가득 가진 자는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자하고 다시 권력은 금전욕을 부추기는, 금전과 권력의 상승효과가 난무한다. 그러니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자본가는 왜 사악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는다.